이질적인 것들이 하나로 묶이는 순간, 세상이 조금 더 선명해진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했다.
"가장 탁월한 인간은 은유하는 인간이다."
처음 이 문장을 접했을 때, 나는 이것을 작가나 시인에게 해당하는 말이라 생각했다. 언어를 다루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 영업 현장에서 하루를 보내는 나에게는 해당 없는 격언처럼 들렸다.
그런데 최진석 교수의 강의를 들으며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다. 그는 은유를 수사(修辭)의 문제가 아니라 창조의 문제로 이야기했다. 지식을 수입하는 나라와 생산하는 나라의 차이처럼, 남의 언어를 빌려 쓰는 사람과 자기 언어를 만드는 사람은 전혀 다른 위치에 서 있다고. 기준의 수행자와 기준의 창조자. 그 간격은 생각보다 훨씬 크다.
그때부터 나는 은유를 다르게 보기 시작했다.
영업 현장에서 나는 공급망이 무너지는 장면을 목격한 적이 있다. 협력사 하나가 화재로 멈추자, 완성차 라인 전체가 흔들렸다. 사람들은 "혈관이 막혔다"라고 표현했다. 흐름이 끊겼다는 말이다.
그런데 내가 실제로 경험한 것은 달랐다. 부품이 없을 때, 단순히 생산이 멈추는 것이 아니었다. 어디에 먼저 공급해야 할지, 무엇을 포기해야 할지, 누구에게 먼저 설명해야 할지 — 모든 판단이 동시에 흐려졌다. 의사결정 자체가 마비되는 것이었다.
혈관이 아니라, 신경이었다.
혈관이 막히면 흐름이 멈춘다. 신경이 끊기면 판단이 사라진다. 이 둘은 전혀 다른 처방을 요구한다. "어서 흐름을 복구해야 한다"와 "판단 구조 자체를 다시 설계해야 한다"는 같은 말이 아니다.
그때 한 가지를 깨달았다. 내가 한 것은 비유를 만든 것이 아니었다. 공급망과 신경계는 원래 같은 구조를 공유하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발견했을 뿐이다.
이것이 은유에 대한 내 생각이다.
은유는 발명이 아니라 발견이다.
만물은 이미 서로 닿아 있다. 완전히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 성격과 기질로 닿아 있는 것이 있고, 기능으로 닿아 있는 것이 있고, 형상과 이름으로 닿아 있는 것이 있다. 이질적으로 보이는 두 영역이 하나의 구조로 묶이는 것은, 억지로 이어 붙이는 것이 아니다. 이미 이어져 있던 것을 눈으로 확인하는 것이다.
비슷한 경험이 하나 더 있다. 배움이 쌓이지 않는다고 느끼던 시절이 있었다. 읽고, 듣고, 정리해도 남는 것이 없었다. 그때 나는 제조업의 질문을 떠올렸다. 무엇을 만들 것인가. 누구에게 팔 것인가. 어떻게 피드백을 반영할 것인가.
이 질문을 배움에 그대로 대입해 보았다. 무엇을 읽을 것인가. 어떻게 쓸 것인가. 누구에게 닿을 것인가.
쓰는 것은 표현이 아니라 제조의 완성 단계였다. 읽기만 하고 쓰지 않는 것은, 생산하지 않고 재고만 쌓는 것과 같은 구조였다. 두 영역이 겹치는 순간,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이 보였다. 문제가 새로 보였고, 처방도 달라졌다.
이것이 은유의 힘이다. 더 예쁘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더 정확하게 보는 것.
아리스토텔레스가 탁월한 인간을 "은유하는 인간"이라고 부른 것은, 글을 잘 쓰는 사람이 위대하다는 말이 아니었다. 세상의 구조를 남보다 더 깊이 읽는 사람이 앞서간다는 말이었다.
최진석 교수가 말한 기준의 창조자도 결국 같은 사람이다. 남의 언어가 아니라 자기 언어로 세상을 보는 사람. 남이 만든 개념을 수입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연결을 발견하는 사람.
나는 아직 그 깊이에 많이 못 미친다. 그러나 적어도 이것 하나는 알게 되었다.
이질적인 것들이 하나로 묶이는 순간, 세상이 조금 더 선명해진다.
그리고 그 연결은, 내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원래 거기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