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도 가까운 타인이다

가족을 타인으로 본다는 것의 진짜 의미

by 김지영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나는 울지 않았다.


2006년, 나는 군 복무 중이었다.
병마와 싸우시던 아버지께서 하늘나라로 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어안이 벙벙했다.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와락 눈물이 쏟아지지도 않았다.


한창 젊은 나이에,
못다 핀 꽃이었던 아버지의 생은 그렇게 지고 있었다.


그 순간 내 안에 스친 것은 이것이었다.


죽고 사는 것은 지극히 한 개인의 서사다.


자조 섞인 냉소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자연의 섭리 앞에서 느껴지는 경외감이,
한 사람의 인생의 굴곡보다 먼저 나를 압도했다.


그로부터 이십여 년이 흘렀다.
이제 나는 아버지가 된 사람이다.


지금 내 아이들이 위험에 처한다면,
또는 극단적인 고통 앞에 선다면,
나는 매우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불현듯 든다.


함께 해온 세월은 8년, 6년으로 짧다.
그런데도 이 애정의 중력
내가 부모로부터 느꼈던 것보다 훨씬 강하다.


마치 블랙홀처럼,
모든 것을 끌어당긴다.


이 감정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곰곰이 파헤쳐보면,
단순히 내 피가 섞여서가 아니다.


자녀의 성장 과정을 지켜보면서 추억이 쌓였고,
세상에 나아가 자기 삶을 살아갈 아이들의 모습을 떠올리니
코가 찡해지는 것이다.


즉, 매우 가까운 거리에서 그들의 삶을 바라보며
살을 부대끼고 살아온 경험이,
그들을 '소중한 존재'로 느끼게 하는 것일 뿐이다.


생물학적으로 보면 자녀는
부모의 DNA를 50%만 공유하는 존재다.


형제도, 부모도 마찬가지다.


어쩌면 가족을 사랑하고 보호하고 싶은 본능 자체가,
유전자를 보존하려는 알고리즘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그리고 아무리 가까운 가족이라도,
내가 아플 때 그 신경계를 대신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존재의 고독은
생물학적으로 내재되어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이미 가족을 타인보다 못하게 대하고 있다.


"저 사람은 밖에서는 잘하고, 안에서는 소홀히 한다."


부부 사이에서 한 번쯤 오가는 말이다.


이 현상을 심리학에서는
'당연시 효과'라고 부른다.


친밀도가 높을수록
상대의 배려와 존재를 당연하게 여기는 경향이다.


가족이기 때문에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는
무의식적 면허증을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것이다.


나도 그럴 때가 많다.


독일 철학자 에리히 프롬은
『소유냐 존재냐』에서 이것을 '소유 양식'으로 설명한다.


소유 양식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이미 가진 것에는 에너지를 쏟지 않는다.


가족은 이미 '내 것'이다.


반면 사회와 타인 앞에서는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야 한다.


그래서 밖에서 더 친절하고,
더 예의 바르고,
더 노력한다.


이것은 내가 말하고 싶은 타인화가 아니다.


가족을 방치하고
무관심으로 타인 취급하자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가족을 소유할 수 없는 '존재'로,
즉 타인의 자리에 올려놓을 때,


비로소 우리는
그 사람을 진지하게 바라보게 된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억제되는 존엄이 있다.


나의 어머니는
내 생각과 미래에 대해서는 자율을 주셨다.


하지만 가정사와 친인척 관계에서는
기준이 명확했고,


그것을 따르지 않으면
화를 참지 못하셨다.


사회적 체면이 중요했다.


나는 알면서도 따르지 않으려 했지만,
부모의 체면을 본체만체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나의 존엄은
조용히 폐기되곤 했다.


그리고 나는 부모가 되었다.


내가 생각하는 도덕과 규범을 넘어서는
아이들의 행동에 역정을 낸다.


아이들의 생각을
어른의 시각으로 평가하려 든다.


아내 역시
첫째 아들과 강대강으로 대치할 때가 있다.


이것이
'관계 내 권리의식'이다.


"내 자식이니까"가 주는 심리적 소유감.


그것이
존엄 침범의 심리적 뿌리다.


철학자 레비나스는 말했다.


"타자의 얼굴 앞에서 나의 자아가 소환된다."


타인을 타인으로 인정하는 것
윤리의 출발이라는 뜻이다.


가족도 예외가 아니다.


동물이 새끼에게 사냥을 가르치고
홀로 서게 하듯,


아이가 건강하게 성장하려면
부모로부터의 심리적 분리가 필수다.


자녀를 사랑의 징표이자
소유물로 여기는 순간,


부모는 그 분리를
방해하기 시작한다.


가족 사이에도
경계선이 필요하다.


"가족이니까 괜찮아"로 정당화되는
감정 착취와 선택지 박탈은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문제다.


나는 가족을 해체하자는 것이 아니다.


부모와 자식 사이의 애정이
거짓이라는 것도 아니다.


그 유대는 진짜다.


생전 경험해보지 못한 수준의 친밀감
가족 안에 있다는 것도 안다.


다만 이것을 말하고 싶다.


소유는
언젠가 반드시 잃게 된다.


소유로 가족을 바라볼 때,
그 관계는 집착이 되고,
억압이 되고,
상처가 된다.


그러나 가족을
'존재하는 타인'으로 바라볼 때,


비로소 그 사람이
온전히 보이기 시작한다.


우리가 타인을 소중히 대하는 방식으로
가족을 대할 때,


그 관계는
더 단단해진다.


가족은 가까운 타인이다.


소유할 수 없기에,
더 아름다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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