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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아 Jan 09. 2024

겪어봐야 알지 (3)

이게 정말 자신을 위한 거예요? 내 행복에 집중해요.

"저... 21살에 결혼했고요.."

(두 달이나 연락을 하고 있었는데 여전히 말을 놓지 않았다. 이것도 나중에 생각해 보니 실수하지 않고 티 내지 않기 위해서 그랬던 것. 나름 철저하게 고려하고 행동한 거다.)


"아이가 3명 있어요."

('1명도 아니고 3명이라고??' 생각하며 놀랐으나 최대한 티 내지 않고)

"아... 그렇구나."


'그렇구나.'라는 말 이외에 내가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무엇이 있겠는가.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다고 특별할 것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다 상대적인 것 아닌가. 또 그게 내 일이 되면 다른 느낌을 받는 것이고 말이다. 난 이제껏 이런 유형의 사람을 거의 만나보지 못했다. 

많지도 적지도 않은 연애를 해보면서 이런 치정의 상황에 놓인 적은 없었기에(운이 좋았다.) 아이가 세명이고 와이프 어쩌고 말하는 그를 바라보고 있는 상황이 비현실적인 느낌마저 들었다. 

어쨌든 이야기보따리가 풀린 그는 술술 아주 진솔하고 솔직하게 (그 안에 또 무슨 거짓말이 있었는지 알 순 없지만)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가 이후에 풀어내는 이야기는 사실 진부하다면 진부했다. 

와이프와는 연애 시절 사고를 쳐서 첫째를 가졌고 결혼을 했고 4년 전부터는 거의 대화도 하지 않고 지내며 사이가 나쁘다. 그 와중에 막내아들 나이가 4살이란 점이 기가 막혔다. 와이프와는 사이가 안 좋아서 단절된 지 오래지만 아이들은 자신에게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이고 (그런데 왜 바람을...) 그런 아이들이 다 클 때까지는 잘해야 된다고 말했다. 

왜 외도하는 유부남들은 모두가 하나같이 와이프와 사이가 나쁘다는 점을 어필하면서 동정심을 유발할까. 잘 먹히는 국룰인가 보다. 


자신의 말에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기 때문에 그의 말은 힘이 없다. 

그럼에도 끊임없이 나오는 그 말들은 


"내가 했던 말은 다 진심이었어요."

"사실 나한테 번호 두 개냐고 물어봤을 때 그냥 차단하고 잠수 탈까 했지만, 보고 싶었어요."

"그런 생각도 했어요. 우리가 만나고 와이프가 알더라도 또 와이프가 만약 소송을 하더라도 OO 씨가 내가 유부남인 걸 알았던 건 아니니까 피해가 가지 않게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치정에 내가 왜 엮이고 싶겠는가...)


이런 얘기들을 하고 있는 그를 물끄러미 보고 있자니 그의 결핍이 느껴졌다. 외로움, 혹은 인정에 대한 갈망 같은 것이랄까. 예전엔 유부남을 만나고 힘들어하는 이들의 심리가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돌림노래처럼 흘러나오는 그의 변명 같은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그래, 이런 얘기를 계속 반복적으로 듣는 데다가 이미 내가 상대에게 마음이 생겨버렸다면 아마 그가 하는 이야기를 믿고 싶겠지? 자기랑은 정말 진실한 사랑을 하는 것이라고 나를 이 사람이 진심으로 좋아하는 것이라고 믿고 싶을 거야.' 하는 생각을 했다. 나 역시 외롭고 결핍된 심리 상태였다면 그냥 그 말을 믿고 싶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내가 자신을 만나면 따귀라도 때릴 줄 알았는데 그러지 않았고, 이야기를 들어줬고, 자신에 말에 심지어 웃어주기까지 했기 때문에 자꾸 기대하는 마음이 된다고 했다. 사실을 알았지만 내가 자신을 예전과 같이 대해주지 않을까. 앞으로도 우리가 계속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면서.


마음의 동요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정말이지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진짜 다행이지 화가 나진 않았다. 상대를 탓하고 싶지도 않았다. 이런저런 얘기들을 하고 있는 그가 행복해 보이지 않았고 스스로를 떳떳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됐다. 씁쓸한 느낌이었다. 더 감정이 생기기 전에 혹은 뭔가 더욱 애매하게 어떠한 선을 확 넘어버리기 전에 이렇게 상황을 알게 되어 얼마나 다행인지 나에게도 그에게도 진심으로 고마웠다. 


어쩌면 당연하게도 그가 연락하고 지내는 사람은 나뿐만이 아니었는데 

밤에만 연락하는 사람, 목적을 가지고 불러내서 만나는 사이, 자기와 같이 결혼을 했으나 남편과는 사이가 안 좋은 유부녀, 사귀지는 않지만 사랑한다 보고 싶다고 말하는 그런 사이. 그런 관계들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이 소모적이고 공허한 관계들 속 누군가를 찾아 헤매는 것이겠지.  


"OO 씨, 그런 관계들은 공허하잖아요. 왜 스스로를 공허하게 해요."

이렇게 말했던 것 같다. 당사자가 아닌데 그가 살고 있는 삶을 어떻게 말할 수 있겠나. 그냥 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는 것. 아주 많이 양보해서 애들이라도 없었다면 남녀 사이의 문제만으로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그는 아이 3명을 둔 한 가정의 가장이 아닌가. 물론 가장이기 이전에 힘들고 외로운 시간을 견뎌내고 있는 한 인간이기도 하다는 생각도 했다.


한 달쯤 시간이 지났을까.


그에게서 만날 수 있냐는 연락이 왔다. 조금 망설였지만 답장을 보냈다. 남의 인생에 뭔 참견이고 오지랖이지 싶었지만 대화를 통해 그의 고민들을 들었었기에 자신의 삶에 집중하고 행복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곧 답장이 왔다. 


'고마워요. 내 행복에 집중해 보겠습니다.'

나도, 내 행복에 집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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