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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도현 May 08. 2023

익사에서 구조된 부뒤


단평 | 당대 프랑스 관객들을 향한 장 르누아르의 독한 풍자극. 그러나 영화의 가치 전복적인 지점들은 지금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타를 던진다. 이는 부르주아나 식민지 담론에 대한 서구 중심의 어리석음이 아직도 편재한다는 방증이며, 한편으로는 결코 뒤집히지 않은 제국주의의 유산을 바라본다. 그러니 부뒤라도 이를 실컷 비웃어주길 바라는게 세계 시민들의 잠재된 욕망일 것이다. | 극장전 | 078 | 한국영상자료원 | 4/25 



비평 | “백인의 짐을 져라. / (…) / 그리하여 너희 꿈이 가까워질 때 / 타인을 위한 목표도 이뤄질 지니, / 너희의 모든 희망을 없애버릴 / 나태와 이방인의 어리석음을 경계하라.” 

러디어드 키플링, <백인의 짐 (The White Man’s Burden) - 미국과 필리핀 제도> 


빵도 없이 이걸 어떻게 먹으라고?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피크닉 중인 커플이 부뒤에게 소시지를 한개 주자 그가 하는 말이다. 가볍게 스치는 장면이라 웃고 넘겨도 되지만, 생각해보면 <익사에서 구조된 부뒤>의 핵심이 담겨있는 문장이다. 사실 그의 말이 맞다. 추측컨데 커플은 샌드위치를 준비해온 모양인데, 줄거면 통째로 줘야 제대로 된 대접이다. 그러나 거렁뱅이처럼 보이는 부뒤에게 그들은 일부만 똑 떼어 준다. 마치 개한테 하는 취급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부뒤는 고작 몇 분 전까지만 해도 부르주아인 에두아르의 집에서 살았으며, 복권이 당첨되어 결혼식까지 올린 상태였다. 즉, 부르주아의 생활 양식에 익숙한 그는 샌드위치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알고, 더 나아가 소시지만 건내는 건 반쪽짜리 호의라는 점을 아는 것이다. 그럼에도 커플이 그에게 걸맞는 대접을 하지 않는 것은 그의 신분을 겉모습으로만 판단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부뒤와 같은 거지들은 소시지만 받아도 감지덕지라고 짐작하지 않았을까. 따라서 그 인식이 몸에도 베어 자연스럽게 행동으로 나타난 셈이다. <익사에서 구조된 부뒤>가 만들어진 1930년대 시대상을 고려했을 때, 겉으로 보이는 품위로 높고 낮음을 평가했던 당시 사람들의 무지가 드러나는 대목이다. 그것은 국가 외적으로는 식민지 주민들을 야만인들로 대했던 제국주의적 사고관이며, 국가 내적으로는 소득 격차로 발생한 빈민층을 깔보았던 부르주아의 오만이다. 장 르누아르가 보기에 이건 아주 웃기는 광경이다. 그가 한 일은 이를 스크린으로 옮긴 후 그 시대의 관객들과 같이 웃은 것 뿐이다. 마음 편히 웃는 관객은 순진한 것이고, 씁쓸하게 웃는 관객은 위선적인 것이다. 한 편의 도덕풍자극과 같은 그의 영화는 마치 제 얼굴에 침을 뱉고 웃는 것이나 다름없는 효과를 준다. <익사에서 구조된 부뒤>는 당대 프랑스 관객들을 모독하기 위해 만든 영화다. 


그러나 시대를 떠나서 이 영화의 윤리적 함정에서 자유로운 관객은 없다. 그건 부뒤를 둘러싼 영화적 상황들이 가진 이중성 때문에 그렇다. 구조적으로 이는 부뒤의 행동 - 부르주아의 반응으로 단순화할 수 있는데, 관객들은 보통 부뒤보다는 부르주아의 입장에 서서 이 상황들을 바라본다. 극장에 와서 영화를 볼 수 있다면 대체로 상식을 가진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알게 모르게 말이 통할 것 같은 에두아르나 엠마 또는 안 마리의 편을 든다. 실제로 이 인물들의 사고나 언행은 모두 정상적인 범주에서 이뤄지며, 심지어는 도덕적이라고 평가해줄 만한 구석도 많다. 대표적인 예는 다름 아니라 에두아르가 익사에서 부뒤를 구조하는 장면이다. 망원경으로 거리를 관찰하던 에두아르는 센느 강에 빠진 부뒤를 보고 바로 집에서 뛰쳐나간다. 그는 옷을 벗어던지고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강물로 뛰어들어 부뒤를 구해낸다. 그러자 주변에 몰려든 인파는 환호성을 지르고, 그가 참된 부르주아의 가치를 행한 자라고 칭송한다. 심지어 부뒤를 구출한 뒤에도 에두아르는 그에게 음식을 주거나 옷을 입히고 집에 머물게 하는 등 여러 호의를 베푼다. 아무리 이를 시니컬하게 보려해도, 에두아르는 정말 진심으로 부뒤를 구한 것이다. 딱 봐도 부뒤의 존재는 그에게 이득이 되기는 커녕, 부끄럽거나 성가시기만 할 뿐이다. 그런 그를 에두아르는 순수한 선의로 대한다. 물론 나중에는 훈장을 받는 등 부차적인 보상을 받긴 하지만, 에두아르는 이런 것에는 도무지 흥미가 없다. 그러니까 완벽한 의미로써 그는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행한 것과 마찬가지다. 이런 상황에서 어느 누구도 그를 나무랄 수 없을 것이다. 한 사람만 예외다. 바로 부뒤다. 


영화는 이 부분에 대해서 딱히 숨기는 것도 없다. 의식을 되찾은 부뒤가 다짜고짜 에두아르에게 가서 따지기 때문이다. 난 죽으려고 했는데 왜 댁이 날 살리고 난리요. 초반부 그가 개를 잃어버리고는 상심한 상태로 파리의 거리를 헤매는 부뒤의 모습을 기억한다면, 그의 말이 여기서도 맞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실수가 아니라 정말로 자살하기 위해 센느 강에 투신한 것이다. 그러나 그저 생명의 은인인 에두아르에게 감사하라는 주변 사람들에 의해 부뒤의 항의는 묻히고 만다. 에두아르의 영웅적 행위는 칭송받으나, 부뒤의 개인사는 쉽게 무시된다. 사람들은 선의로 행한 것이라면 그 결과와 상관없이 긍정하려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선의를 냉소하는 이들은 옳고 그름을 떠나 소외되기 마련이다. 그것이 그 선의의 대상자일 경우라도 말이다. 그래서 그는 억지로 이를 떠받게 된다. 특히 자살은 당시 카톨릭 신앙의 서구 문화에서는 강력히 규탄받는 행위이므로, 부뒤는 본의 아니게 불리한 입장에 선다. 외부인의 시각으로 부뒤는 신을 저버린 야만인, 그리고 에두아르는 그런 그를 구원한 성자가 되기 때문이다. 선의의 거래에는 바로 이러한 도덕적 위계질서가 작용한다. 더군다나 이는 부뒤와 에두아르처럼 명백한 신분 차이를 보이는 당사자들 사이에서는 더 쉬운 일이다. 복잡하게 들어갈 필요도 없다. 부뒤의 사정이야 어쨌든, 타자들이 보기에 이 두 사람의 입장은 선의의 논리 속에서 간단히 정리된다. 


그러나 사실 두 사람의 이해관계는 매우 동등하다. 부뒤는 도와달라고 한 적이 없으며, 따라서 에두아르에게 빚진 것도 없다. 에두아르 역시 선한 마음에서 그를 도와주었고 이를 통해 뭔가를 바라지도 않는다. 실제로 부뒤 다음으로 이 점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것은 에두아르이다. 그래서인지 둘은 죽이 잘 맞는다. 부르주아로써의 체면을 지켜야 하는 에두아르에게 부뒤는 일탈을 상징한다. 그는 자기 마음대로 사는 부뒤를 보면서 온갖 사회의 규범과 도덕적 책무에서 벗어나고픈 그의 은밀한 욕구를 해소한다. 에두아르가 품격있는 그의 부르주아 집안 속으로 부뒤의 야만성을 들이는 것도 그런 대리만족의 일환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그는 가족 구성원들의 회유에 따라 부뒤의 정제되지 않은 습성들을 교화하려는 노력을 기울이지만, 진심인 적이 별로 없다. 에두아르는 부뒤의 기행들을 즐겁게 바라보며, 어떤 때는 그와 동화되기도 한다. 이는 부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그 역시 부르주아의 생활 양식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으나, 이것이 제공하는 모든 편의를 취한다. 빵을 주려는 엠마의 제안에 정어리를 대접하라고 주문하고, 에두아르의 비싼 옷들을 입고 다니며, 이발소에서 면도를 하고 오자마자 바로 엠마에게 추파를 던진다. 그에게도 귀족들의 삶은 흥미로운 것이라서 그의 자유가 훼손되지 않는 선에서 이를 즐길 마음이 있다. 그러므로 이 두 인물이 가진 현격한 계급의 격차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향하는 영향력의 강도는 대등하게 묘사된다. 


만약 우리가 <익사에서 구조된 부뒤>를 식민지 담론을 둘러싼 우화로 본다면, 부뒤와 에두아르의 이러한 역할 세팅은 제법 교묘하다. 제국주의를 강대국들이 일방적으로 약소국들을 침탈하고 착취한 역사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실상은 조금 더 복잡하다. 우리의 생각 이상으로 강대국 시민들은 순진했으며, 문명의 혜택을 누리는 것을 곧 우월함으로 착각했다는 측면에서 그 무지의 증거를 찾을 수 있다. 반대로 약소국 시민들은 철저히 자국의 이익에 기반하여 행동했으며, 비대칭 전력을 극복하기 위해 더 교활하고 치밀한 수법들을 동원했다는 기록들이 많다. 그러므로 서구의 식민사관과는 달리, 이건 어느 한쪽이 특별한 우위를 지닌 게임이 아니다. 강대국 시민들은 식민지 주민들을 야만인들로 규정지은 후, 종교나 문화, 또는 교육을 통해 이들을 계몽시키는 것이 자신들의 의무라며 보기 좋게 포장했다. 그러나 애시당초에 이걸 믿는 약소국 시민들은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 관점은 성립하지 않으며, 지금 와서야 이를 수치스럽게 인정할 뿐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르누아르는 폭소를 참을 수가 없는 것이다. 오히려 더 유효한 관점은 이런 것이다. 한창 제국주의가 진행되고 있던 19세기 말, 프랑스의 식민지 타히티에서는 매독이 유행했다. 이는 젊은 원주민 여성들에게서 빈번히 발견되었는데 발병 원인은 본국에서 건너온 프랑스 남성들이 제공한 것으로 지목된다. 대표적인 예로 후기 인상파의 거장인 폴 고갱을 들 수 있다. 물론 그의 예술작품은 부정할 수 없는 문명의 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고갱은 허울좋은 백인의 신화에 올라탄 채로 스스로의 욕망을 채웠을 뿐일지도 모른다. 제국주의를 통해 전파된 가치들이 고작 그런 거라면, 별로 새로울 것도 없는 셈이다. 


이를 증명하듯, 영화는 부뒤와 에두아르를 욕망의 교차점에 세운다. 부뒤와 만나기 이전, 에두아르는 이미 집 안의 하녀인 안 마리와 부정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영화의 초반부에서 그는 그녀를 프라이포스 신이 흠모하는 클로에라고 표현하는 등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하여 사랑을 속삭인다. 그러나 다른 한편, 에두아르는 아내인 에마와도 별다른 문제가 없어 보인다. 남몰래 개인적 욕구를 다 채우고 있지만, 겉으로는 부르주아 행세도 제법 잘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속으로 부뒤가 들어온다. 그는 안 마리의 다락방으로 향하는 계단 위에 자면서 본의 아니게 그들의 관계를 가로막는다. 이로 인해 에두아르의 외도도 점차 뜸해지는데, 침대가 익숙하지 않다는 이유로 야만인 부뒤가 에두아르의 정조를 지킨다는 점은 지극히 역설적이다. 좀 더 과장하자면, 에두아르가 문명인으로 남아있을 수 있는 건 부뒤의 활약이 크다. 겉으로 보이는 그의 야만성은 에두아르의 선함과 자비로움을 부각시키며, 심지어 내면 깊숙이 감쳐놓았던 추악한 욕망도 억제하는 효과를 주니 말이다. 그러나 모든 것을 지켜보는 관객의 입장에서 부르주아의 가치가 하찮은 야만인에 의해서 좌지우지되는 광경은 그저 실소 나오는 조롱거리일 뿐이다. 


물론 르누아르는 부뒤도 성인군자로 만들 생각이 없다. 그는 무슨 대단한 도덕심을 갖고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그 때마다 자기 좋을 대로 행동하는 사람이다. 그러니 부뒤가 그들의 불륜을 막은건 순전히 우연이고, 역으로 그는 에두아르의 행태를 보며 무의식적으로 이를 학습한다. 영화 후반부 부뒤는 엠마를 유혹하면서 그 역시 복잡한 불륜 관계의 일원으로 가담하게 된다. 그는 이러한 모방의 행위를 통해 이 부르주아 집안을 거울로 비추며 허상을 깨뜨린다. 마침내 부뒤와 엠마가 애정행각을 나누려고 하는 순간, 벽이 무너지며 방 안에서 똑같은 짓을 하려는 에두아르와 안 마리의 불륜 현장이 발각된다. 이들은 부뒤에게 교양과 매너를 가르치려 했으나, 그가 배워간 것은 부르주아들의 나쁜 습관들 밖에 없다.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서 부뒤가 지키고 있던 버팀목이 사라지자, 기다렸다는 듯이 이 부르주아 집안은 도덕적 해이의 난장판을 벌인다. 이러한 사자대면의 상황은 부르주아와 하층민, 또는 강대국과 약소국의 시민들을 동일선상에 놓는다. 추레했던 모습은 어디 가고 멀끔한 옷에 면도까지 한 부뒤는 그들과 정말 분간이 가질 않는다. 겉모습으로만 선을 긋는 것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그렇다면 행동으로 이들을 구별해야할텐데, 어쩜 하는 짓도 똑같다. 그러니 속된 말로 계급장 떼고 보면 다 야만스럽기는 매한가지인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부뒤는 복권까지 당첨되어 경제적으로도 그들과 동일한 수준이 된다. 따라서 안 마리가 속물 근성을 드러내면서 부뒤에게 붙자 상황은 거짓말처럼 정리된다. 부뒤는 안 마리와 결혼식을 올리고, 에두아르가 주례를 자처한다. 그러나 무슨 변덕이 들었던 것일까. 부르주아의 세계로 완벽히 접어드는 그 순간, 부뒤는 다시 한번 물에 빠진다. 그렇게 하여 그는 마침내 자신을 익사로부터 구조해낸다. | 극장전 | 078 | 한국영상자료원 | 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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