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평 | 영화도 결국 현실의 일부다. 그렇다면 이는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은 1990년 이란 대지진 같은 재난과도 동일선상에 놓이는 것이다. 비극적인 사건 자체를 소재로 하는 대신, 키아로스타미는 직접 그 현장 속으로 들어갔고, 본 경험을 토대로 영화를 만들었다. 우연한 결과로 얻어진 이 다중 구조는 현실을 바라보는 하나의 태도를 제시하며, 살아남은 자들의 마음을 묘한 방식으로 위로한다. | 극장전 | 085 | 서울아트시네마 | 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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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 영화는 타 예술보다 더 직접적으로 현실에 개입한다. 이는 영화 프로덕션 자체가 물리적으로 현실 속에서 이뤄질 수 밖에 없는 매체의 특성에서 기인한다. 상업 영화들의 경우, 막대한 자본과 첨단 기술을 들여 감독이 의도한 대로의 환경을 직접 구축할 수 있지만, 저예산으로 갈수록 이에 대한 통제권은 점점 낮아진다. 그러나 많은 작가들은 오히려 이를 기회 삼아 예술 방법론으로 채택한 후 적극적으로 현실의 우연성을 작품 속으로 끌어들인다. 기획된 각본이 가진 한계를 우발적인 사건과 상황의 변화로 극복하는 것이다. 영화는 그 자체로 고유한 법칙을 가진 소우주지만, 이를 창조한 작가도 결국 한 명의 인간에 불과하다. 그의 지식과 감각은 그저 한정된 범위 내에서 작동한다. 그러므로 그가 현실 앞에 본인의 삶과 영화를 온전히 바쳐야만 기적 같은 순간들을 만들어낼 수 있다. 그것이 얼마나 압도적이고 거대한 현실일지라도 말이다.
이란의 영화 감독 압바스 키아로스타미는 1990년 그의 대표작 <클로즈업>을 공개하고 세계적인 거장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같은 해, 이란 테헤란의 북서부 지역에는 리히터 규모 7.7의 강진이 발생한다. 충격파는 카스피해에 인접한 도시인 라시트를 중심으로 약 150 킬로미터에 이르는 지역을 강타한다. 사망자는 1만명에 달했고, 수많은 마을들이 큰 피해를 입는다. 이 중 하나는 코케르로, 감독이 1987년에 내놓은 전작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의 촬영 장소이자 배경지다. 지진 소식을 들은 그는 11살 난 아들과 함께 바로 코케르로 향한다. 영화 속에 출연했던 아역 배우들의 생사가 걱정된 나머지, 이를 확인하기 위해 무작정 피해 지역으로 달려갔던 것이다. 이후, 그는 독일의 한 강연에서 이 일화를 설명했는데, 관객 중 한 명이 영화로 만들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한다.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는 그렇게 해서 나오게 된 영화다.
키아로스타미의 발걸음이 다급했던 것은 코케르가 단순한 촬영 장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영화를 촬영하면서 그 마을의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함께 지냈으며, 이들의 생활 양식을 그대로 자신의 작업 속으로 편입시켰다. 배우들은 모두 현지에서 채용된 일반인들이었는데, 특히 아이들은 실제로 영화 속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이었다.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는 이들의 꾸밈없는 모습을 그대로 담아내, 이 코케르라는 마을에서 정말로 일어날 법한 이야기로 생생하게 살아난다. 그건 현실 참여적인 그의 촬영 방법론이 만들어낸 리얼리티다. 실재에 가장 근접한 경계선까지 그의 영화를 끌고가 손에 잡힐 것 같은 생동감을 포착해낸 셈이다. 그러나 영화를 촬영할 당시 그는 3년 만에 이 정겨운 마을의 풍경이 폐허로 뒤바뀔지는 몰랐다. 눈 앞에 펼쳐진 세상 그대로를 낙관한 나머지, 현실이 삶 속으로 들어올 수 있는 가장 난폭한 방식을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생각보다도 이 둘 간의 구분은 희미했고, 그마저도 자연의 힘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 사건은 이들을 평등한 관계로 돌려놓는다. 언제든 현실이 삶 속으로 개입할 수 있다면, 반대 경우도 마찬가지다. 키아로스타미가 대지진 발생 직후, 직접 피해 현장으로 들어간 것은 이러한 맥락으로 볼 수 있다. 고속도로조차 봉쇄된 지역을 작은 차로 몰고 다니며 그는 영화 포스터 속의 아이들을 찾아 헤맨다. 그의 여정은 결국 키아로스타미 본인의 삶으로 이 극적인 현실에 대응하기 위한 수단이었을 것이다. 지각 단층의 이동으로 인한 자연 현상을 어찌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것의 기원을 아무리 고민한들, 세상 이치란 인간에게 주어진 이해의 범주를 넘어선다. 불행은 우리가 상상하기 어려운 인과들의 연속을 경로 삼아 찾아온다. 루히르 노인의 말처럼 이건 배고픈 늑대의 소행과도 같아서, 단지 거리가 가까운 이들을 집어삼켰을 뿐, 개인적 감정은 없다. 그럼 의미를 확보하는 일은 운 좋게 살아남은 사람들의 몫이다. 제어 가능한 것은 그저 저마다의 삶이므로, 이들은 이에 충실하고자 한다. 키아로스타미도 다르지 않다. 어째서 신이 이런 벌을 주셨는지 탄식하는 할머니에게, 그는 힘을 내시라 말하고는 다시 길에 나선다. 신의 의중보다 아이들의 행방이 그에게는 더 큰 중대사다.
여행을 함께 하면서, 우리는 그와 유사한 인간 군상을 만난다. 비극적 현장의 한 가운데서 그들은 묵묵히 자기 할 일을 한다. 무너진 집들의 잔해들을 곡괭이로 퍼내고, 끊어진 도로 위를 무거운 가스통이나 모래 푸대를 짊어지고 간다. 혼자서 할 수 있겠냐는 질문에 도와줄 사람들이 모두 죽었는데 별 수 없다고 한 할머니는 답한다. 사람들은 이처럼 담담하게 재난을 받아들인다. 불행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언젠가 마주쳐야 하는 상황이라 인식하면, 그걸 넘어서 그 다음을 바라보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주제 전환이 빠를수록, 삶의 매 순간마다 찾아오는 고통스럽고 슬픈 일들도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 있다. 그래서 어느새 사람들의 관심사는 다른 곳에 가 있다. 어쨌든 볼일은 봐야하니 변기가 필요하고, 집이 무너져 버렸지만 화분에는 물을 줘야 한다. 대지진이 발생한 다음날 결혼식을 올린 신혼부부는 비닐하우스에서 초야를 치른다. 난민 캠프에 모인 사람들은 절망에 빠져있는 것이 아니라 곧 시작할 월드컵 결승전을 볼 생각에 잔뜩 들떠있다. 40년만에 찾아온 대지진일지 몰라도, 월드컵은 4년마다 돌아오기 때문이다. 대지진은 삶을 구성하는 수많은 요소들 중 하나로 격하 및 전체 평준화된다.
키아로스타미가 영화를 만들게 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에게 이 거대한 자연재해는 소재가 아니라, 영화와 동일선상에 서서 어깨를 나란히 하는 무엇이다. 대지진이 마을 사람들 각자의 마음 속에서 밀려난 것처럼, 그도 본인의 관심사에 따라 영화를 찍으면서 자연스럽게 비극을 주변화한다. 그렇다면 반대로, 그가 영화를 만드는 일도 대단한 의미가 있는게 아니라, 그저 현실을 받아들이는 하나의 방식일 뿐이다. 추측하자면, 키아로스타미는 이번 사건으로 받았던 충격을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를 찍으면서 모두 극복했을지도 모른다. 본인의 여정에서 삶을 긍정할 만한 근거들을 찾았을 터, 이제 그가 해야할 건 영화를 매개로 이를 전파하는 일이다. 그건 벽돌을 나르거나 월드컵 내기를 하고 TV 안테나를 설치하는 일들과 별반 차이가 없다. 이들은 저마다 사소하지만 분명한 희망의 조각들을 품고 있다. 그 연속선에서 한 영화 감독의 작업도 공동의 비극을 함께 이겨내는 노력의 일환으로서 기여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는 참사의 현장 속에서도 기어코 눈부신 섬광들을 찾아내는 수많은 삶들에 대한 보고다.
그런데 그게 의도한 바의 전부였다면, 보다 정직한 결과물이 나왔을 것이다. 반대로 영화는 다큐멘터리와 픽션의 아슬아슬한 경계선을 오고 간다. 형식적으로 본 이야기는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의 현실 속의 에필로그처럼 보인다. 하지만 극중에서 등장하는 영화 감독은 키아로스타미 자신이 아니다. 촬영 역시 재난이 발생한 시점으로부터 약 일년의 시간을 사이에 두고 진행되었다. 그러므로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기록했다기 보다는 그것의 영화적인 각색이자 재구성에 더 가깝다. 키아로스타미는 영화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제작자의 현실이 아닌, 그의 현실에 대한 주관적 반영이라고 본인의 생각을 밝힌 적이 있다.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는 그의 시각에 따라 이란 대지진과 코케르, 그리고 이를 둘러싼 현실을 해체한 후 독특한 다중 구조 안으로 재배열시켜 만든 결과물이다. 자연스럽게 우리는 영화가 가진 리얼리티를 의심하게 한다.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의 출연자들이 등장하는 장면들이 대표적이다. 그들은 모두 그 영화에서 특정 역할로 나왔다고 하지만, 확신할 방법은 없다. 이건 실제 인터뷰가 아니기에 그들의 주장 역시 대본에 따른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작가의 편의대로 길거리에서 아무나 섭외해서 대사를 치게 했다고 의혹을 제기하면, 이의 상당수는 유효한 비판일지도 모른다. 이런 방식으로 키아로스타미는 생각보다도 많은 속임수들을 도입하여 실재와 허구를 교란시킨다.
흥미로운 건 영화가 대체로 이에 무심한 태도를 보인다는 점이다. 무엇이 진짜고 가짜인가를 판별함으로서 얻을 수 있는 보상은 크지 않다. 이들이 서로 상반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 점유한 영역을 조금씩 양보하면서 전체로 수렴하는 방식으로 이야기가 짜여져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말하자면 현실과 영화 간에 이루어진 합의다. 영화 감독 본인이 직면한 현실 속에서 평화를 찾았으니, 영화 내부로 침투하는 현실 또한 적대적이지 않은 것이다. 이러한 상호 존중을 기반으로, 키아로스타미는 단지 그때마다 시선이 닿는 곳에 잠시 머무르며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를 찍었다. 이상할 정도로 작중 분위기는 편안하고 여유롭다. 수많은 인명피해를 낳은 자연 재해가 그 중심에 있음에도, 영화가 삶의 의지를 다지는 일종의 로드무비로 다가오는 까닭이다.
그것은 곧 영화의 본질과도 연결된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보다 더 행복하길 원하며, 이를 위해서 다소간의 편법을 적용한다. 그건 낙관주의일 수도 있고, 희망일 수도 있다. 누군가에게는 영화가 그 역할을 대신한다. 사람을 나이들고 추하게 만드는게 무슨 예술이니. 실제보다 아름답게 나와야지. 안그런가? 루히르 노인은 늙은이를 젊게 만들 수 있다면 그게 바로 예술이라고 말한다. 어쩌면 그건 사람들이 영화에 기대하는 가장 순수한 바램일 것이다. 키아로스타미가 영화 포스터를 들고 아이의 행방을 찾는 모습은 실재와 허구가 중첩된다. 코케르에서 살고 있는 아메드는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의 아메드이기도 하다. 그 소년을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들 만큼이나, 영화로 그를 만난 관객들 역시 걱정스러운 심정으로 이 여정에 기꺼이 동참한다.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는 그렇게 현실과 영화의 국경을 넘나들며 수많은 이들의 마음을 한 곳으로 모은다. 우리는 비탈진 언덕길로 향하는 시선을 끝내 거두지 않는다. 그건 도처에 깔린 죽음에도 불구하고, 삶을 지속하고자 하는 자들의 강력한 연대 의식일 것이다. | 극장전 | 085 | 서울아트시네마 | 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