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평 | 셀마는 도무지 자신의 불행과 싸우질 않고, 최악의 결과로 스스로를 내몬다. 그녀와 맞물리는 주변 상황 역시 의아하긴 마찬가지다. 오직 셀마의 망상을 빛낼 도구로서 비극을 활용한다는 점이 라스 폰 트리에의 지독함이며, 안티-뮤지컬이란 예술적 형식을 완성하기 위해 그는 이 여인을 고문하고, 또 고문한다. 악행을 목격할 때, 우리는 그걸 알면서도 동화된다는 사실이 이 영화의 불쾌한 지점이다. | 극장전 | 116 | 미니라지모어 | 8/27
+
비평 | “인생의 습관적 행로를 걷는 와중에도 가끔은 세상의 현실감이 한순간에 사라지곤 한다. 그런 때에 우리는 마치 무도회장의 한복판에 서있는 느낌을 받는다. 음악은 우리에게 들리지 않으므로, 눈 앞에 펼쳐지는 춤사위가 미친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마담 드 스탈, <모라비아 교도의 신앙>
모든 사람들은 음악을 품고 있다. 그건 개인의 고유성으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저마다 다른 리듬과 화성, 그리고 선율로 이루어져 있다. 외부 세계를 최대한 차단하면, 각자의 음악은 더 깊고 특별해질 수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들의 음악을 일정 부분 외부 세계의 주파수와 맞추려고 노력한다. 그러한 과정에서 음악은 조금씩 바뀌게 되지만, 많은 이들이 이를 받아들이면서 산다. <어둠 속의 댄서>의 셀마는 그렇지 않다. 그녀에게 자신의 음악을 지킨다는 문제는 중대사다. 그러므로 현실에 대응하는 방식도 타협하지 않는다. 셀마는 워싱턴 주의 작은 마을에서 공장 노동자로 일하면서 홀로 남자아이를 키우고 있고, 심지어 유전병으로 인해 시력을 잃어가고 있다. 누가봐도 그녀의 삶은 고단하지만, 셀마는 이에 대항하여 본인만의 독특한 방어기재를 구축하였다. 이는 외부적으로는 밝고 따뜻한 심성 그리고 내부적으로는 음악이라는 마음 속 도피처로 구성되어 있다. 삶에서 어떤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셀마는 본 매커니즘을 작동시킨다. 그리고 여러 역경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곧 그녀의 방식을 긍정하는 증거로 채택된다. 영화가 시작하는 시점에 셀마는 이미 이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있는 상태다. <어둠 속의 댄서>는 바로 이 점을 악용하는 영화다.
본격적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면, 라스 폰 트리에는 지독하다 싶을 정도로 셀마에게 고통을 준다. 우선 계속해서 악화되는 그녀의 시력이 있다. 머지않아 셀마는 맹인이 될 예정이지만, 그녀의 걱정은 본인이 아니라 아들인 진도 같은 운명을 겪으리라는 사실에 있다. 때문에 그녀는 진의 수술비를 모으기 위해 야간 근무에 자원한다. 하지만 작업을 하는 도중 그녀의 실수로 인해 공장 프레스 머신이 고장나고, 이로 인해 그녀는 직장에서 해고를 당하게 된다. 수입이 끊긴 상황에서 진의 수술비로 모아둔 돈은 그녀가 믿었던 이웃이자 경찰인 빌이 훔쳐간다. 절망한 셀마는 빌과 몸싸움을 하는 과정에서 권총으로 그를 쏘게 되고, 결국 살인혐의로 체포된다. 이후 제대로 된 변호사를 선임하라는 주변의 권고도 무시한 채, 그녀는 무력한 태도로 재판을 받고 사형을 선고받는다. 영화는 그녀가 교수형을 당하는 순간까지 어떠한 희망의 손길도 건내지 않는다.
<어둠 속의 댄서>가 신파극이라는 비판은 틀리지 않다. 분명 영화는 작위적으로 인물의 불행을 부추기는 방식으로 관객들이 감정 투자를 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특히 셀마의 관점에서 보면 그녀가 처한 상황은 전혀 스스로의 잘못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녀가 겪는 수난의 기원은 모두 외부에 있다고 판단내리기 쉽다. 간단명료한 도덕적 구도를 형성하여 관객들이 별다른 고민없이 편을 선택하도록 하는게 신파극의 주요 방법론이다. 그러나 잘 살펴보면 <어둠 속의 댄서>는 생각보다도 더 음흉하게 설계된 이야기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이는 라스 폰 트리에가 셀마라는 인물을 설정한 방식에서 찾을 수 있다. 일반적 상식 선에서 본다면 그녀에게는 불행의 굴레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기회들이 여러번 있었다. 주변 사람들에게 손을 빌려 진의 수술비를 마련해도 됐고, 재판에서 정당방위로 적극 호소할 수도 있었으며, 유능한 변호사를 선임하여 사형을 면하는 것도 가능했다. 그러나 그녀는 이를 모두 거부한다. 영화는 이를 셀마가 도움을 받지 않으려는 그녀만의 고집스러운 성격에서 비롯된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셀마를 둘러싼 환경 속에는 적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아군도 많다. 그녀를 짝사랑하는 제프가 대표적이다. 그는 밤 늦게 근무장에서 나오는 그녀를 집까지 바래다주겠다고 제안하지만, 셀마는 이를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철길을 따라 한참을 걸어 집에 도착한다. 만약 셀마가 적절하게 주어진 상황을 이용하여 본인의 안위를 챙기는 인물이었다면, <어둠 속의 댄서>는 성립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녀는 그런 인간이 아니므로 언제나 중력처럼 최악의 결과로 빠져든다. 비극은 결국 쌍방과실인 셈이다.
말하자면 영화와 인물은 모두 합심이라도 한 듯이 불행을 받아들인다. 어떠한 장면에도 이에 맞서 싸우는 모습을 볼 수 없다. 상황을 극복하는 것에는 애시당초 아무런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오히려 이렇게 질문해야 한다. 불행을 밀쳐내지 않고 끌어안는 순간에 무엇이 일어나는가. <어둠 속의 댄서>에서 이것은 너무나도 명확하다. 바로 뮤지컬 장면들이다. 외부에서 부정적 자극을 받게 될 때 셀마는 이를 쳐내 자신을 방어하는게 아니라 도리어 내면 세계 속으로 도피하는 방식을 택한다. 그리고 그것은 체코 출신의 이민자로써 처음으로 사랑에 빠졌던 미국 대중문화의 한 하위 장르의 형태를 취한다. 만약 그녀의 상황이 더 여유로웠다면 전혀 다른 음악이 들려왔을 것이다. 그러나 주어진 것은 오로지 그녀를 둘러싼 현실 밖에 없으므로 셀마는 이를 재료삼아 음악을 만든다. 공장 기계들이 내는 금속성 소음과 철도 노동자들의 발소리, 심지어 통풍구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성가마저도 조합하여 그녀의 환상을 가공하는데 쓴다. 가장 초라하고 비참할 수 있는 현실의 구성요소들을 꿈의 길목에 배치한 것이다. 그건 사실 방법론 측면에서 뮤지컬의 본질이다. 영화에서 계속해서 인용되는 <사운드 오브 뮤직>에도 천둥소리를 무서워하는 아이들에게 이를 음악으로 치환하여 받아들이게 하는 장면이 있다. 그러니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뮤지컬이란 결국 현실을 버티는 하나의 방어 수단으로서 음악을 사용하는 것이다.
불운하게도, 라스 폰 트리에가 주목한 것도 바로 이 지점이다. 영화 속의 비극을 끝까지 밀어붙여, 뮤지컬의 한계를 테스트해보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제일 보고 싶어하는 것은 뮤지컬이 결국 현실에게 패배하는 광경이다. 가장 황홀한 추락의 순간을 만들기 위해서는 낙차가 커야하니, 셀마의 망상도 그만큼 아름다워야 한다. 그러므로 영화는 매우 착실하게 단계를 밟으면서 악랄한 해체작업을 전개해 나간다. <어둠 속의 댄서>는 말하자면 안티-뮤지컬이다. 일반적인 장르의 틀에서라면 셀마는 구원받아야 마땅하다. 그녀의 독립적 성격으로 인해 외부의 구원은 거부하더라도, 음악이라는 마음의 안식처를 통한 내부의 구원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가능성 마저 철저하게 짓밟아 뭉개버리는 것이 라스 폰 트리에의 본래 목적이었다. 뮤지컬 장면들은 그리하여 늘 갑작스럽게 끝나 난폭한 방식으로 셀마를 현실로 돌려놓는다. 애초에 환상은 현실을 압도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었다. 그건 늘 철저히 고립된 상태에서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런 인식의 버블 속에서 아무리 춤을 쳐봤자, 음악이 들리지 않는 이들에게는 미친 짓에 불과하다.
강하게 표현하자면 <어둠 속의 댄서>는 뮤지컬의 탈을 쓴 고문 포르노다. 발걸음을 세면서 사형대로 향하는 장면처럼 셀마는 영화가 시작된 순간부터 결말을 향해 가고 있었다. 그리고 중간 중간에 삽입된 뮤지컬 장면들은 관객들에게 구원의 헛된 믿음을 심은 다음 이를 완전히 배신하기 위한 장치로서 기능한다. 기교적인 부분만 놓고 보자면, <어둠 속의 댄서>는 뻔뻔할 정도로 악의가 드러나는 영화다. 관객의 입장에서는 영화가 끝날 때 즈음에는 화가 나거나 당혹스러운 감정이 들어야 맞다. 그러나 우리는 이 뒤틀린 신파극의 논리에 따라 셀마의 비극에 동화되어 눈물을 흘리는 지경까지 이르게 된다. 그것은 어찌보면 피해자가 고통을 받는 모습을 보며 희열을 느끼는 고문 기술자의 심리와도 같다. 공교롭게도 셀마 역시 그녀의 음악으로 가학적 쾌감의 원인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한패라고도 볼 수 있다. 불행에 맞서지 않는다면 이를 일정 부분 즐긴다고 간주해야 한다. 예외는 없다. 이것이 본 영화가 진정으로 불쾌한 지점이다. | 극장전 | 116 | 미니라지모어 | 8/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