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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도현 Mar 14. 2023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


알프레드 히치콕의 영화는 시사점이 없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영화 자체가 시사점이다. 그의 영화에서 나오는 거의 모든 것 - 줄거리, 대사, 사건, 소품과 인물들 - 은 오로지 작품 안에서만 당위성을 찾고 외부와는 연결되지 않는다. 그는 과잉해석이나 오독이 불가능한 가장 순수한 형태의 영화를 만들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때문에 훈련되지 않은 관객들은 그가 만든 미궁 속에서 늘 그랬듯이 의미를 쫓다가 곧 그것이 허상임을 깨닫고 만다. 그러나 의미가 사라진 그 지점에서도 그의 영화는 계속 작동한다. 아니, 오히려 더 활력을 얻는다. 거추장스러운 무게추들을 모두 던져버렸으니, 이제부터가 진짜라고 말하는 듯하다.


많은 사람들이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 (이하 <북북서로>)의 제목을 두고 여러 해석들을 내놓았지만 히치콕은 이를 모두 일축한다. 북북서 - 노스 바이 노스웨스트 (North by Northwest) - 자체가 나침반에도 존재하지 않는 방위다. 이 이야기는 허상을 향해 나아가는 화살표에 대한 것이다. 도착지에 와서 이게 뭘 의미하는지 궁리해봤자 애초에 모든 것을 촉발시킨 계기 자체가 아무것도 아닌 실수다. 광고업계에서 일하고 있는 로저 손힐은 친구들과의 모임 장소에서 전화를 걸기 위해 무심코 일어났다가 정체를 알 수 없는 이들에게 납치 당한다. 카운터의 직원이 그가 일어나는 순간 그를 향해 조지 캐플랜이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그를 납치한 자들은 자신들을 쫓는 정부 요원인 캐플랜으로 손힐을 오인한 것이다. 아무런 관련도 없던 손힐은 한 순간의 오해로 이 첩보전에 휘말리게 되는데, 초반부 그의 모든 행동은 이 누명을 벗고자 하는 몸부림이다. 그는 캐플랜이라는 자만 찾아낸다면 자신의 무죄를 입증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실수를 바로잡고자 하는 심리는 우리 모두에게 있으므로, 제대로 된 동기는 아니지만 영화는 이를 동력삼아 앞으로 전진한다. 그러나 히치콕은 중반부에 이르면 이조차도 사실상 무력화시킨다. 손힐이 추적했던 캐플랜 역시 가상의 인물에 불과했다는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 사건 자체는 다분히 실존주의적이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지명수배 대상이 되며 목숨의 위협까지 받는데, 그 원인은 실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니 말이다. 그는 절망해야 마땅하다. 사실 히치콕은 본 영화를 찍기 불과 몇년 전 <누명 쓴 사나이>라는 실화에 기반한 유사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든 적이 있다. 1953년 뉴욕에서 발생한 매니 발레스테로의 사건을 각색하면서 히치콕은 당사자가 겪었던 정신적 고통에 제대로 집중한다. 본인이 저지르지 않았던 범죄로 기소되어 수습이 불가능할 정도로 일이 꼬이는 이 이야기는 여러모로 <북북서로>와 닮았다. 관객들은 자연스럽게 알리바이가 되어 주인공의 억울함에 동조하고 같이 괴로워하며 오해가 풀리기를 바라게 된다. 그러나 진범이 등장하면서 모든게 해결되는 <누명 쓴 사나이>와 달리, <북북서로>는 아예 그의 존재를 공란 처리한다. 따라서 손힐이 아무리 노력해도 애시당초 답을 구할 수 없는 구조로 되어 있는 것이다. 히치콕은 실화보다도 부조리한 일종의 카프카적인 상황 속으로 손힐을 몰아넣는다.


그러나 손힐은 이상할 정도로 쿨하다. 그는 납치되는 차 안에서도 시니컬한 유머를 던지고, 범죄 조직의 우두머리 앞에서 그의 무능함을 비꼰다. 가까스로 목숨을 구할 때도 태평함을 유지하며 자신의 무고함을 주장하는 재판에서는 말이 너무 많다. 그리고 늘 위트와 아이디어로 승부하여 위기를 벗어난다. 요컨대 손힐은 비극보다는 희극에 어울리는 인물이다. 때문에 그가 도망자 신세임에도 금발의 미녀에게 반하는 건 관객 입장에서 놀랍지 않다. 히로인 이브 캔들은 캐플랜의 정체가 드러나는 즈음에 같이 등장하는데, 손힐은 그녀와 사랑에 빠지면서 기존의 존재론적인 딜레마를 쉽게 잊어버린다. 거기에 그녀가 이중간첩이었다는 설정까지 추가되자, 그는 기꺼이 그녀의 구출 작전에 자원한다. 이 시점이 되면 그는 캐플랜을 둘러싼 음모에 대해서는 무관심해진지 오래다. 오히려 자신을 지금까지 올가미처럼 조여오던 첩보원의 빈 자리로 직접 들어가 연인을 구해낼 생각만으로 머릿속이 가득하다. 중심부가 텅 빈 불행의 근원지로 돌아가서 그 대리인을 자처하다니 이건 차라리 블랙 코미디에 가깝다.


<북북서로>는 이러한 천진난만함 속에서 제 동력을 찾아간다. 히치콕은 인물들의 사정에 큰 관심이 없다. 오로지 그들이 처한 상황이 발생시키는 인과론적인 에너지에 집중을 기울인다. 그는 이 특급 오락을 완성하기 위해서 그저 행동파 주인공이 필요했고, 그를 함정에 빠뜨릴 수 있는 적당한 거짓말이 필요했으며, 이를 그가 알아채려 하자 미인계의 눈속임이 필요했을 뿐이다. 수많은 후대의 영화에 영향을 끼쳤음에도 아직 이 영화가 보여준 극단적 실용주의는 아직 재현되지 않고 있다. 히치콕은 언제나 기능적인 관점에서 영화를 만들어왔지만, <북북서로>는 그 중에서도 극단을 보여주는 거대한 테마파크이자, 넌센스 농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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