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갸아아아아아ㅏㄱ 흐어어엉
바야흐로 여름.
물론 진짜 '여름'은 아직 시작도 안 했지만, 대만은 '봄'이 없으니 지금을 여름이라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3월 말부터 한낮 기온 30도를 자랑하더니 4월에는 갑자기 아열대 기후로 바뀌었다. 아침부터 지붕이 뚫릴듯한 폭우가 30분 내리다가 삽시간에 해가 뜨니, 공기 중 습도는 체감상 100%에 달하는 그런 날씨. 길거리에서 가만히 서 있으면 뒷목과 팔꿈치 안쪽에 금방 땀이 맺힌다. 대만 친구들은 아직 '봄'인데 벌써 힘들어하면 곤란하다길래, 무슨 일이 있어도 7-8월에 대만을 오는 일은 없게끔 해야겠다고 다짐한다.
내가 나고 20년간 자란 곳은 한국에서 가장 덥다는 분지 지대, 대프리카, 였다.
사람들은 내가 더위에 이골이 나서 잘 견딜 수 있을 줄 아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고통의 시간을 남들보다 더 빨리 겪어서 힘듦이 무엇인지 잘 알 뿐 힘든 일을 많이 겪는다고 해서 힘든 일에 익숙해지지는 않듯이, 여전히 습도 높은 더위는 나에게 쥐약이다. 혹시 길 가다가 너무 더워서 울어본 적이 있다면 내 말에 공감을 하시지 않을까. 정말이지 너무나도 더워서 들숨이 내 체온보다 높다고 느낄 때, 버스 정류장은 가야겠고 양산은 썼지만 너무 더워서 승질이 있는 대로 날 때, 나이 상관없이 눈물이 질질 난다. 진짜로. 이 도시의 가공할만한 더위에 대해 전국적인 관심이 집중되자, '대프리카'라는 말도 생기고 도로에 세워둔 빨간 꼬깔콘이 녹아내리는 인터넷 짤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왜 이러시나. 내가 어릴 때부터 매년 여름 녹았는데... 어릴 땐 그 꼬깔콘이 젤리인 줄 알았다. 늘 녹아서 길바닥에 퍼져있길래.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는 동안 여름에 대프리카를 방문한 적은 단 한 번뿐이었다. 그것도 첫 해 첫 학기, 의무감에 내려갔다가 다시는 그 짓을 하지 않기로 했다. 밴쿠버로 이주한 뒤 (**항상 '이주'라고 표현한다, '유학'이 아니라. 진짜 이주(=탈출)하고 싶기 때문에**), 최대한 한국을 가지 않으려고 했지만 사정상 1-2년에 한 번씩은 갈 일이 생겼다. 그래도 절대 여름엔 가지 않았다. 마지노선은 6월. 그것도 벌써 더웠다.
사람은 살면서 입을 조심해야 한다고 했던가. 손쉽게 다짐을 한다든가 장담을 해봤자 좋을 게 없다고.
그래서일까. '나는 여름엔 절대 한국을 가지 않을 거야, 더운데 뭐 하러 가'라고 했다가, 3-4월에도 여차하면 30도는 우습게 찍는 대만에 오고 나니 내 '다짐'이 무색해졌다. 힝.
건물의 외관에 뜨악한 것도 잠시, 방 안에 달려있는 에어컨에 붙어있는 스티커. 생산연도 1990년.
첫날, 에어컨에 붙은 스티커와 건물 외벽에 가득한 이끼, 그리고 방범 역할을 1도 못할 것 같은 방문 쪼가리를 본 내가 뜨악함을 가득 담아 건물 사진을 전송했다. 아빠 왈, 한국에서는 1970년대에 있을법한 기숙사 건물이랬다. 우왕.
2월 중순만 해도, 바닥이 타일인 데다 건물 단열이 1도 안 되어 영상 10-12도의 날씨에도 추위에 덜덜 떨었는데(실내가 더 추워서 밖을 방황했다. 진심 밴쿠버보다 더 춥게 느껴졌다), 3-4월이 되자 습도와 온도가 미친 듯이 높아져서 간 밤에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자다 깨다를 반복하다 아침에는 푹 절여진 배추처럼 늘어져서 겨우 일어났고, 최대한 밖에서 시간을 보낸 후 밤늦게 기숙사에 돌아왔지만, 미친듯한 습도를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 1990년생이지만 그래도 에어컨은 에어컨일테니 틀면 되지 않냐고? 아... 정말이지, 그 에어컨을 틀었다가 듣도보도 못한 기관지 질환에 걸릴 것을 우려해야 할 듯한, 그런 에어컨이었다. 그 90년대 금성 (LG도 아니고 금성) 에어컨 보다도 구형이란 말이다... 에어컨 필터 청소는 할까? 필터 안에 벌레가 사는 거 아닐까? 게다가 아침마다 동네 참새들이 에어컨 실외기 부분에서 앉아서 떠들다 가는데, 거기 새끼라도 까놓은 것은 아닌지, 진짜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래서 5월 초면 밴쿠버로 돌아가니까 에어컨 없이 버텨보겠다는 객기를 부렸다. 진짜 말도 안 되는 객기.
'에어컨을 켜지 않겠다' 에서 '에어컨 필터를 흐린눈으로 바라봐야겠다' 라는 사고 전환이 일어나는 데에 걸린 시간은 불과 24시간. 4월 초 한국을 가기 전까지만 해도 진짜 꾸역꾸역 참아볼 만했는데, 4월 중순이 되어 돌아왔더니 내 인내심에 바닥을 긁는 일이 생겼다. 그것은 바로 다양한 아열대성 벌레님들의 방문.
한국에서 돌아온 다음날이었다. 늘 그렇듯이 더위에 헉헉대며 귀가를 하고 기숙사 방 안에서 손풍기로 땀을 식히는데, 하얗디 하얀 바닥 타일에서 검은깨 같은 벌레가 보였다. 2주 전 개미떼를 소탕한 이후로, 흰 바닥을 광적으로 살피며 지나다니는 버릇이 생겼는데, 설마 다시 개미부대가 달려왔단 말인가, 놀란 가슴을 안고 검은깨 벌레를 살폈다. 처음 보는 생김새였다.
두 마리를 아무렇지 않게 눌러 죽이고 책상 앞에 앉았는데, 내 시선을 끄는 무언가. 또 검은깨 벌레다.
순간, 어제 캐리어를 끌고 4층까지 올라오는 복도(엘베가 없다!!)에서 간간이 보이던 바퀴벌레 시체가 생각났다. 설마, 그 돌아가신 바선생께서 알집을 내 방에 던지고 가신건 아니겠지...???!!!
2월 초, 대만에 도착한 첫날, 나의 대만 정착을 응원하러 바선생께서 친히 내 숙소에 방문하셨다.
아무 생각 없이 우버이츠로 식사를 배달시키고 다음날 처리할 생각으로 쓰레기봉투를 묶어만 놓은 것이 화근이었다. 맛있는 냄새를 풍기던 쓰레기는 그렇게 내 방에서 하룻밤을 보냈고, 다음날 작은 바선생 한 마리가 책상 서랍에서 나에게 인사를 건넸다. 반갑구먼. 나는 대만 바선생이라고 하네.
벌레 좋아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나는 툭툭 나타나는 바퀴, 딱정벌레, 귀뚜라미 류를 정말 혐오한다. 일단 얘들이 어디서 어떻게 다닐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내 정신건강에 좋지 않다. 지난 몇 년 간, 밴쿠버에서 바퀴 안 보고 잘 살았다 싶었는데... 이렇게 만나는구나... 심호흡을 하고 휴지로 붕대를 만들어서 바퀴를 잡아 변기에 던져 아쿠아리움 여행을 보내줬다. 돌아오지 마 제발. 그 이후 한국을 들렀을 때 독먹이약을 잔뜩 챙겨 왔고, 방안 곳곳에 바퀴약을 설치했다. 나중에야 알았다. 바퀴약은 이렇게 설치하는 게 아니라는 걸. 바선생이 오실만한 길목에 설치하고 바선생이 그걸 친애하는 가족/동료들과 나눠 드시게끔 진득하니 기다리는 게 이 먹이약의 원리인데, 나는 바선생을 '피할(?)' 요량으로 온 동네방네 다 갖다 붙여놨던 것이다. 전문 방역업체에서 올린 글을 보고 알았다. "안방이나 침대 근처에는 설치하지 마세요. 바퀴를 침대까지 유인하고 싶은 건 아니시죠?" 침대 밑에 나란히 붙어있던 독먹이젤을 얼른 다시 떼어내어 쓰레기통과 방문 입구, 창문 근처에 붙였다. 바부.
독먹이의 효과가 좋았는지, 2월 초 책상서랍에서 인사를 건네던 바선생을 끝으로 4월 중순까지 내 방은 나름 평화로웠다. 3월 중순 볼펜으로 찍은 점 같은 개미떼가 출몰한 것 외에는.
점같이 작은 개미라면 눈에 보이는 벌레보다 처리하기 쉬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오히려 눈에 잘 안 보이니까 곳곳에 벌레가 있을 것 같아 바닥이며 책상, 침구류 등을 샅샅이 훑는 버릇이 생겼다. 처음엔 세정제용 알코올을 분사하다가, 다음날 과일을 먹기 위해 포장팩을 여는 순간 개미떼들이 일렬종대로 전진해 오는 것을 보고 바로 마트로 달려갔다. 문명의 이기를 누리자, 왜 이러고 사냐.
개미약을 곳곳에 분사, 바퀴약도 곳곳에 설치. 천하무적이 된 것만 같은 마음으로 안심하던 3월이 지나자, 습도 높은 아열대성 기후라는 복병이 나타났다. 우연의 일치인지 날이 습해지기 시작하자마자, 바퀴벌레 유충으로 추정되는 검은깨 벌레가 등장한 것이었다. 돋아나는 닭살을 뒤로하고, 검은깨 벌레 사체를 2-3개 수습하여 구글링에 들어갔다.
바퀴벌레의 종류는 참으로 다양하고도 많았다.
우리가 흔히 실내에서 보는 손가락 한마디 정도의 갈색바퀴는 독일바퀴. 독일바선생들은 나타나면 좀 곤란한데, 그도 그럴 것이 실내에서 번식하고 죽을 때도 알집을 뿌리고 간다는 엄청난 능력의 소유자이시기 때문이다. 뭐 항간에는 바퀴를 터뜨리면 그 즉시 새끼가 부화한다는 둥, 엄청난 괴소문이 떠돌고 나도 이번 일을 겪기 전까지는 바퀴를 터뜨려 죽이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정도는 아니었다. 유수의 방역업체 직원들의 인터넷 조언을 종합한 결과, 독일 바선생도 살충제와 압사에 버티는 재간은 없다고 했다. 그러니 발견 즉시 살충제를 미친 듯이 뿌려 '익사' 시키든, 두꺼운 책으로 눌러 죽이든, 변기에 흘러 보내든, 원하는 방법으로 죽이면 된다고 했다. 문제는, 한 알집 당 30-40마리 정도의 유충이 나오는데, 이들이 성체가 될 때까지 걸리는 시간은 50-60일. 성체가 된 선생들께서 또 자손을 번식시키려고 들면 '기하급수적'이라는 단어로는 모자랄 만큼 가공할만한 번식력을 자랑하기에, 그래서 독일 바선생이 무서운 거라고 했다.
만약 실내에서 어른 손가락 두 마디는 훌쩍 넘을 정도로 덩치 있는 바퀴벌레를 만나거나 비행 능력을 보유한 바퀴를 마주친다면, 미친 듯이 무섭겠지만 조금 안심해도 된다고 했다. 주로 미국바퀴에 해당할 가능성이 높은데, 이 미국 바선생들께서는 실외에서 들어오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실내에서 번식을 잘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그래도 바퀴가 날아다닐 수 있다는 사실은 실로 공포스럽다. 실제로 몇 주전 아침, 길을 가다가 누가 내 왼쪽 어깨 뒤편에서 바람을 일으키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는데, 고개를 돌린 그곳에는 상가 건물 천막에서 바닥으로 착륙을 마친 바선생께서 아침 산책을 하고 계셨다. 흐린 눈을 하고 갈 길을 갔지만, 충격적이었다. 바퀴가 날다니.
며칠 전 밤, 기숙사로 귀가하는 길에서 빠르게 하수구 구멍으로 가는 바선생을 뵈었다. 매우 통통하셨고, 손가락 두 마디는 개뿔, 그냥 손가락 하나 정도의 크기였다. 바선생이 날아오실까 봐, 가방을 여며 매고 중간중간 몸을 털면서 귀가했다.
1시간가량 미친 듯이 구글 서치 능력을 발휘한 결과, 내 방에 나타나는 검은깨 벌레는 독일바선생의 새끼임에 틀림없었다. 모든 설명과 정황이 단 한 곳을 가리킬 때 돋는 소름. 젠장, 망했다.
새끼가 부화했다면 방 어딘가에 알집이 있다는 뜻인데, 바선생이 왜 내 방을 안식처로 간택하셨는지 따져 묻고 싶었다 (음식도 없고, 쓰레기도 맨날 버리는데!!!). 하지만 이미 늦은 일. 바선생이 가족계획을 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곳으로 내 방의 환경을 바꾸는 수밖에.
당장 에어컨 카드를 샀다. 이곳은 에어컨을 따로 틀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에어컨 카드라는 것을 별도로 사서 카드 투입구에 넣어야 에어컨으로 가는 전기가 공급된다. 그 외의 다른 전기는 다 일반 계량기에 집계되는데, 에어컨에 쓰이는 전기만 따로 관리(?)하는 구조이다. 학교 기숙사라서 그런지, 대만 전체적으로 이런 구조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학교 기숙사는 모두 이런 시스템인 것으로 알고 있다.
바선생과의 결전이 더 중요했기에, 에어컨 필터에 보이는 무수히 많은 세월의 흔적에는 흐린 눈을 하기로 했다. 한국에서 가져온 K94 마스크가 참으로 큰 도움이 되었다. 창문과 방문을 열고 에어컨을 30분 정도 돌리면 그래도 먼지 정도는 날아가지 않을까 하는 바람으로 땀을 삐질삐질 흘려가며 그러고 있었다. 1990년생 에어컨에게 대단한 기능을 바란 것은 아니지만 온도 조절 기능도 없어서 on/off만 가능했다. 자기 혼자 19도로 설정해 놓고 열심히 일하는 에어컨에게 많은 것을 바랄 수 없어서, 2월에 입던 잠옷을 꺼내 입었다. 사람도 어릴 때 영양결핍에 걸리면 발육에 지대한 악영향을 미친다는데, 갓 부화하신 바선생 새끼들에게 내 방이 시베리아 벌판같이 느껴지길 바랐다.
그로부터 꼬박 1주일.
내가 저녁에 귀가하여 불을 켜면 꼭 5-6마리의 새끼 바선생들이 전우조를 이뤄 슬금슬금 나타났다. 이곳을 탐사하기 위해 무리 지어 나온 것인지, 아니면 어두운 방 안에서 놀다가 사람이 불을 켜니 미처 도망가지 못한 것인지. 여하간 그들은 그렇게 명을 달리하였다. 3일째는 독먹이약 옆에서 운명을 다한 새끼 바선생들을 보며 내심 가슴을 쓸어내렸다. 생명의 불꽃이 지는 것에 감사해야 하다니, 안타까웠지만 내 정신 건강의 불꽃이 다 하기 전에 이 전투에서 승리를 쟁취하겠다 다짐했다.
하루 5-6마리씩 살육을 일삼고, 독먹이 생화학 전투에서 전사한 시체 수를 종합해 보니, 한 알집에서 나온다는 40마리에 거의 근접해 가는 것 같았다. 귀가할 때 즈음에는 '오늘은 몇 마리나 잡을 수 있을까'라는 묘한 목표의식이 생기기도 했다. 그렇지만, 불을 켜면 더 득실거릴까 밤에 헤드램프를 켜놓고 안대를 끼고 잤더니, 매일 아침 찌뿌둥한 몸과 퀭한 눈은 덤으로 따라왔다.
대만 곤충기 5-6일째, 쓰레기통 비닐을 교체하다가 그냥 갑자기 쓰레기통 전체를 한번 씻고 싶었다.
세상에나, 쓰레기통 바닥에는 어미 바선생께서 명을 다 한 채 뒤집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쓰레기통 안에도 독먹이를 붙여놨었는데, 아마도 거기서 먹고 어두컴컴한 곳에서 앉아 계시다 가신 모양이다. 거기에서 나온 새끼 바선생 들을 내가 마주쳤던 것이 아닐까. 가시려면 곱게 가시지 자손번식에 대한 미련을 못 버리다니, 에잉... 놀란 가슴을 부여잡고 어미 바선생은 수장으로 보내드렸다.
그 이후에도 다양한 곤충들을 방 안에서 마주칠 수 있었다.
지네도 아닌 것이, 다지류 애벌레(?) 같은 곤충.
다지류 벌레이긴 한데 등에 거대한 짐짝 같은 것을 이고 가는 듯한 벌레, 등등, 내가 곤충학자라면 쾌재를 불렀을지도 모른다.
(궁금해서 사진은 다 찍었지만, 보는 분들의 정신 건강을 위해 사진은 올리지 않겠습니다).
섣부른 결론 같아 조심스럽지만, 이 글을 쓰는 시점을 기준으로 나름 바선생과의 전투에서 승기를 잡았다고 말해도 될 것 같다. 바선생과의 결전 2일 차, 급 현타가 와서 전투 의지를 상실할 뻔했던 것을 고려하면 고무적인 결과다.
날은 덥고 + 하루는 길었고 + 마침 그날이 에어컨을 틀기 시작한 날이었고 + 땀을 흘려가며 에어컨 먼지를 닦네 마네 하느라 몸이 힘들었고 + 겨우 우버 이츠로 저녁을 주문해서 한 입 떠 넣으려던 순간이었다. 새끼 바선생이 자기도 식사에 동참하겠다고 어디선가 기어 나오는데, 왜였을까, 정말 서러워지고 말았다.
불현듯, 내가 떠난 자리를 또 혼자 조용히 느끼고 있을 엄마아빠 생각에 마음이 울렸던 걸까. 한국에서 대만으로 돌아온 지 이틀째였으니, 타이밍을 고려하면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또 바른 소리 한답시고 뱉은 말에 엄마가 상처 입진 않았을까. 병원에서 갑자기 추가 검사를 하라고 한 탓에, 가족 모두가 결과를 기다리며 4-5일 정도 마음을 졸였더랬다. 자식이 기쁨이 되면 좋겠는데, 나는 아직도 엄마아빠를 걱정인형으로 만들고야 마는 그런 존재 아니었을까. 덥고 습한 대만 날씨에 많이 지쳤던 것일까. 아니면, 나보다도 훨씬 나이가 많은 건물에서 지내는 것이 지쳤던 것일까. 3개월이면 길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생각만큼 인터뷰며 연구가 진척되지 않아서 마음이 조급해져서였을까.
바선생과의 전투는 이제 겨우 2일 차인데 벌써 마음 약해지면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짝꿍과 보이스톡을 하다 말고 입에는 밥 한술 떠 넣은 채 으앙 울고 말았다. 꼴사납게.
그래서인지 바선생이 더 이상 보이지 않는 요 며칠에 의미 부여를 하고 싶어졌다 (앞으로도 보이지 않길). 내 복잡한 마음을 다 떠안고 명을 다 하거나, 혹 살아남은 패잔병이 있더라도 다시는 이 방에 오지 않길. 그래서 나중에 대만에서 있었던 시간을 돌아볼 때, 이젠 바퀴벌레 유충을 식별할 수 있는 능력도 기르게 되었다고 안주거리 삼아 말하고 말 정도의 일이 되길.
지나가면 다 아무 일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