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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파물해 Sep 04. 2022

개천에서 용이 나려다가

고군분투했던 B

B는 말이 없는 여자아이였다. 단순히 말이 없는 수준을 넘어서, 누군가 부르면 “네?” 하며 한두 걸음 뒤로 물러서거나, 물러설 데가 없으면 몸을 움츠리면서 물러서고 싶은 마음을 표현했다. 소심함이라는 단어를 인격화한다면 B일 것이라고 종종 생각했다. 아마 ○○면 고등학교가 아닌 다른 곳이라면 나는 B의 존재에 대해서 인식조차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는 ○○면이다. 한 학년에 한 반씩 전교생 백 명이 안 되는, 길게는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10년 이상 같은 반을 할 수밖에 없는 ○○면 고등학교에서는 아무리 B라도 숨어 있을 수 없다. 그렇기에 아이들 뿐 아니라 교사들도 B의 사정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B는 어렸을 때부터 할머니, 할아버지, 아버지와 함께 살았다. B의 어머니는 B가 어린 시절 돌아가셨다고 했다. B를 집에 데려다줄 일이 있었는데 그때 보니 B는 ○○면의 집 중에서도 허름한 집에 살고 있었다. 새마을운동 때 지붕 슬레이트를 개조한 후 한 번도 수리한 적이 없는 것 같은 집이었다


 ○○면 고등학교에는 B처럼 부모 중 한쪽, 혹은 부모 모두가 부재해 ○○면으로 내려와서 조부모와 사는 아이들이 여럿 있었다. 그래서 나는 B의 사정을 다른 아이들보다 특별히 더 안타깝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러던 중 모두의 뇌리에 B의 사정이 각인된 일이 있었다. 어느 날 교무실로 B의 어머니라는 분이 B를 꼭 만나게 해 달라면서 어떤 남성과 찾아온 것이다. 교무실의 교사들은 당황했다. 담임선생님이 자초지종을 물어보니 B의 어머니는 사실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오래전 집을 나가 재혼을 한 것이었다. 재혼한 남자가 지금 학교에 함께 찾아온 분이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B가 보고 싶은 마음에 B의 아버지,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B를 만나게 해 달라고 연락했지만 거절당하셨다고 한다. B는 엄마가 죽은 줄로만 알고 있으니 괜한 충격받게 하지 말고 그만 포기하라는 답만 들었던 것이다. B의 어머니는 포기하지 않고 B를 만나기 위해서 학교로 찾아왔다.


학교 입장으로서는 난감한 일이었다. 아버지 쪽에서 거부한 만남을 학교 쪽에서 성사시키면 그 뒷감당을 하기 힘들 것이다. 그저 학교에서는 해 드릴 것이 없으니 일단 돌아가시라고 하는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어머니는 학교 건물에서는 나갔지만 하교 시간에 교문 앞에서 기다리시다가 결국 B를 만났다. 나를 비롯한 몇몇 교사들이 창 밖으로 이 광경을 지켜보았다. B는 눈물범벅이 되어 자신을 안으려 하는 어머니 앞에서 여느 때보다 더 많이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드라마에서나 볼 법한 그날의 광경을 ○○면의 모든 구성원들이 보았다. 그리고 그 일에 대해 B에게 아무도 묻지 못했다.  


 그러다 B는 고3이 되었고, 입시 철이 다가왔다. B의 담임선생님이 나에게 B의 입시 준비를 도와 달라는 부탁을 했다. B가 전통 있는 지역 거점대학교의 문화재보존학과를 입학사정관 전형으로 지원하는데 역사 교사인 내가 자기소개서 검토 및 면접 준비를 맡아 주면 어떻겠냐는 것이었다. 나는 그 뒤로 몇 주간 B와 매일 만났다. 여러 문화적 인프라가 부족한 ○○면이었지만, 학생 수가 적어 교사들이 일대일로 붙어 지도할 수 있다는 점은 장점이었다. 그러면서도 반신반의하긴 했다. B가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인 것은 알았지만 지나치게 상향 지원했다고 생각했다. 만약 합격한다면 최근 2~3년 사이 ○○면의 졸업생 중 가장 우수한 입시 결과일 것이다. ○○면 대부분의 학생들은 수시 준비에 어려움이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의 경험이 도시 아이들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부모의 배경, 도시와 농촌 거주자에 따른 주요 대학 입학생 비율 차이는 점점 커지고 있다.) 입학사정관이 원하는 글쓰기, 말하기 등 다양한 경험을 갖춘 아이는 OO면에는 거의 없었다. B도 당연히 그럴 것이라 생각했다. 무엇보다 B는 사람을 보면 뒷걸음치는 아이였다. 입학사정관 전형에서 제일 중요한 면접 때 과연 제대로 입이나 뗄 수 있을까?


 나는 일단 B가 써 온 자기소개서를 보면서 면접 준비를 함께 구상하려 했다. 별 기대 없이 자기소개서를 보는 순간 깜짝 놀랐다. 문장이 정갈했고, 핵심이 명확했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성장 과정을 문화재보존학의 특징에 녹아낸 점이 놀라웠다.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사는 집을 소개하며 옛 한옥 형태인 이 집에서 각종 골동품들을 어렸을 때부터 보면서 문화재에 대한 관심을 키웠다는 글의 첫머리에서, 언젠가 B의 집을 보면서 안타깝다고만 생각했던 나의 천박한 인식을 반성했다. 내가 불행의 테두리 안에서만 보았던 그 아이의 집은 꿈이 자라나는 보물창고였다. 그리고 B는 그것으로 자기를 소개할 줄 아는 현명한 아이였다. 그 누구의 도움도 없이 내면의 진실로 쓴 B의 자기소개서는 내가 교직 생활을 하면서 본 그 어떤 아이의 자기소개서보다 감동이었다.


 알고 보니 B는 꿈을 위해 철저히 준비한 아이였다. ○○면에는 구한말 활약했던 역사 인물의 생가가 있었다. 생가라고 하지만 거의 버려진 느낌이었고 ○○면 사람들을 제외하면 잘 모르는 곳이었다. 알고 보니 B는 시에서 모집하는 문화재 지킴이 활동을 신청해 그 생가의 청소를 담당하고 있었다. 자기소개서를 보기 전까지는 담임 선생님을 포함하여 누구도 모르고 있었다. B는 그 누구의 조언 없이도 스스로 꿈을 위해 각종 정보를 찾아 노력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저 소극적인 아이라고만 생각했던 B는 꿈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면접 연습을 하면서는 더욱 깜짝 놀랄 만한 일의 연속이었다. 사람 눈도 못 마주치던 B가 자신의 전공과 관련된 질문에 청산유수로 대답하기 시작했다. 그것도 내 눈을 똑바로 보고 말이다. 언제 이렇게 준비가 되어 있었을까? 지금 생각해 보니 내 교직 인생에서 누군가의 조력 없이 순전히 스스로의 노력으로 이 정도의 입시 준비 실력을 보여 준 아이는 거의 없었다. B에게 매일매일 놀라며 몇 주 간의 면접 준비 기간을 보냈다.


 B는 모두의 응원을 받으며 면접에 응했고, 마침내 그렇게 원했던 대학의 문화재보존학과에 합격했다. 이것은 우리 학교의 그해 입시 최고 성과였다. B가 졸업하고 나서도 학교는 B의 사례를 자주 써먹었다. ○○면 고등학교 바로 옆에 붙어있는 ○○면 중학교 학생들은 고등학교 진학은 근처 읍으로 하고 싶어 했다. 전교생 100명이 안 되는 ○○면 고등학교 입장에서는 ○○면 중학교 학생들을 읍내의 학교에 뺏기지 않는 것에 학교 존폐가 걸려 있었다. 학교에서는 홍보 과정에서 B의 입시 성공과 그 과정에서 역사 교사인 나의 조력을 자주 강조했다. 학생수가 적은 ○○면 고등학교이기 때문에 교사가 이렇게 일대일로 학생을 케어할 수 있었다고 집중 홍보한 것이다. 사실 나의 역할이라기보다는 B가 스스로 준비된 아이였다는 점이 컸지만, 나도 은근히 입을 다물고 학교의 홍보 기조에 동조하고 있었다.


 나에게 B는 그저 뿌듯한 기억 중 하나로 자리 잡고 있었다. 그렇게 5년 이상의 세월이 흘렀다. 나는 OO면을 떠나 도시의 큰 학교에 근무하고 있었다. 그리고 서서히 B를 잊어갔다. 잊고 있던 B를 다시 떠올리게 된 일이 발생했다.


갑자기 나의 SNS 계정에 B의 SNS 계정이 추천 계정으로 떴다. 잘 지내고 있나 하는 호기심에 B의 SNS 계정을 살펴보다 의아해졌다. B의 피드에는 이상한, 아니 괴상한 글들이 가득 차 있었다. ‘다들듁죽어꺼저져’ 예를 들어 이런 식이었다.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힘든 글이었는데 자세히 읽어보면 ‘다들 죽어’라는 뜻이었다. 이런 식의 이해하기 힘들지만 굉장히 부정적인 글들이 장문으로 하루에도 몇 개씩 올라왔다. 처음에는 B의 계정이 해킹당한 것이라 생각하고 넘어갔다. 그런데 어느 날 B의 사진도 올라오기 시작했다. 주로 혼자 거울을 보고 찍은 사진이었는데, 모텔 같은 곳에서 남성과 찍은 사진도 있었다. 그리고 사진과 함께 매우 부정적인 글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누군가를 저주한다거나, 성매매를 하고 있다거나 하는 식의 글들이었다. 믿기 힘들었지만 사진까지 보니 B가 직접 올린 글이 분명했다.

  

당시 OO면 고등학교에서 함께 근무했던 동료들끼리 계속 연락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사실을 B의 담임이었던 영우와도 공유했다. 영우는 OO면에서 B를 포함한 해당 학년 16명의 아이들을 3년간 연속해서 담임을 맡았기에 그 아이들과 남다른 친밀감을 가지고 계속해서 연락하고 있었다. 영우는 내 말을 듣자마자 B와 고등학교 시절 유일한 절친이었던 정미와 연락을 하여 B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정미가 B의 대학 생활에 대해 해 준 말은 나로서는 납득하기 힘든 이야기들이었다.


 B는 막상 대학에 진학한 후 적응에 어려움을 겪었다 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좁은 면에서 12년간 같은 친구만 보고 자란 B가 도시의 종합 대학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새로 만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더구나 B 성격에 말이다. 그런데 여기에 더 안 좋은 일이 있었다. B가 대학을 가자마자 B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이다. 이후 B는 더 말수가 없어졌고, 그러던 중 B의 과 선배 언니가 B를 도와준다고 함께 테니스 동아리에 들어가 여러 사람을 소개해 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곳에서도 B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힘들어했는데, 그 이유에 대해 B는 정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고등학교 때 역사 선생님이 우리 대학교에 아는 사람 많다고 했었어. 와보니 정말 역사 선생님이 아는 사람들이 우리 동아리에 있더라. 그리고 역사 선생님이 그들을 시켜서 날 왕따 시키고 있어.” 당시 정미는 반신반의했지만, 이 말을 기억하고 있다가 5년이 지나 담임교사 영우에게 전달해 준 것이다. 이제 영우가 내게 이 말이 사실이냐고 물었다.

 

  나는 기가 찼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B가 정미에게 했던 것도 황당했지만, 이 말을 영우 또한 내게 묻는 것도 난감했다. 사실이 아니라는 것은 변명할 필요도 없지만, 내가 잊고 살았던 B가 대학 새내기였던 시절에 자신의 불행에 대해 나를 연관시켜 설명했다는 점이 놀라웠다. 정말 그렇게 생각했던 걸까? 내가 B를 잊고 살아갔던 동안 B는 어떤 세월을 보내고 있었을까? 정미는 이런 말도 덧붙였다고 했다. 수시 면접을 나와 함께 준비했던 고등학교 시절 마지막 기간이 B에게는 강렬한 추억이어서 잔상이 많이 남았던 것 같다고. 그리고 B는 대학에 가서 조금씩 이상해지기 시작했다고. 그리고 자신 또한 연락을 끊었는데 몇 년이 지나 보니 그 대학에서 유명한 아이가 되어 있었다고. 이상 행동을 하는 학생으로 말이다.


  내가 기억하는 B는 원하는 대학에 합격한 학생이자 OO면 고등학교의 입시 홍보에서 항상 언급하는 우리의 자랑이었다. B에 대한 내 머릿속 드라마는 해피 엔딩으로 끝났는데, 원치 않는 속편이 시작되고 있었다.


그러다 얼마 뒤 나에게 B로부터 연락이 왔다. 고등학생 때도 개인번호로 연락한 적은 없었기 때문에 나에게 온 B의 첫 연락이었다. 자신을 소개하며 잘 지냈냐고 묻는 B에게 묻고 싶은 것은 많았지만 잘 지냈다며 힘내라는 통상적인 대답을 했다. 이에 돌아온 B의 대답은 날카로웠다. “힘내라는 말은 욕이에요. 학생한테 욕 하는 거라고요. 차라리 지랄 미친년이라고 해요.” 당황했다. 뭐라고 B에게 덧붙이기가 힘들었다. 그때부터 B로부터 문자가 쏟아져 왔다. 내가 SNS 계정에서 보았던 형태의 글이었다. 자신이 경찰한테 성폭행당하고 있다는 내용도 있었고, OO면 모두가 자기를 학대하고 있다는 얘기도 있었다. 누군가 자신의 핸드폰을 도청하고 녹음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했다. 혹시나 해서 나중에 OO면 아이들에게 연락을 취해 확인해 봤지만 모두 사실이 아니었다. 나는 문자 폭탄을 받으며 몇 마디 대꾸하고 위로해 주는 척을 했지만 점점 걷잡을 수가 없었다. 결국 나는 답하는 것을 포기했다. 그리고 그날 밤 내내 B로부터 문자가 왔다.


 얼마 뒤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B의 사촌 언니였다. B를 병원에 입원시키고 오는 길이라 했다. B의 핸드폰 통화 기록을 보니 고등학교 선생님 중에 나와 연락한 흔적이 많아 연락한 것이다. 의사가 B의 증상이 심각하여 십 대 시절부터 증상이 있었을 것이라 했다며, 나에게 고등학교 시절의 B에 대해 물었다. B가 고등학교 때 조현병이었다고? 단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한 적이 없었고, 의심한 사람도 없었는데 말이다.


누구보다 열심이었던 B는 왜 조현병에 걸리게 된 걸까. 10대 시절 감당하기 힘든 일들을 감당해 내던 B였다. 그런 B도 한계에 맞닥드렸다는 것에 뭐라 말하기 어려운 감정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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