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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산일기 Dec 13. 2015

겉보리 서말이면 처가살이 안 한다?

新 처가살이 풍속도


대표엄마? 대표 민폐 딸!


커밍아웃으로 시작해야겠다. 나는 ‘대한민국 대표 엄마’가 아니라, ‘대한민국 대표 민폐 딸’이다. 올해로 서른하고도 일곱, 예전 같았으면 제 자식도 출가시킬 나이에 여태 부모 그늘을 벗어나지 못하고 기대어 산다. 이는 내 휴대폰 통화목록에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사람이 친정 엄마인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엄마, 솔이 미술학원에 네 시까지 데려다주세요.",  "엄마, 오늘 진이가 몸이 안 좋은데 어린이집 마치면 병원에 데리고 가주셔야해요.”,  "엄마, 내일 오전에 녹화가 잡혔네. 오늘 밤 애들은 엄마 집에서 재워야 할 거 같아요." 엄마와의 통화 내용은 나이든 부모의 안부 대신 대부분 우리 아이들에 대한 부탁으로 채워진다.

2007년, 우리 부부는 결혼 한지 3개월 만에 아이가 생겼다. 적극적으로 피임을 한 것도 아니지만, 딱히 계획한 것도 아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해본 임신 테스트에서 두 줄을 확인하자마자 나는 이내 낯설고 두려운 감정에 사로잡혔다. '엄마가 된다고? 내가!' 결혼을 하면 응당 엄마가 되리라는 생각은 했었지만 지금은 너무 이른 것만 같았다. 나는 너무 놀라고 당황스러운 마음에 그만 울어버렸다. 만일 뱃속 생명에게 인지능력이 있었다면 평생을 서운하고도 남았을 일이었다. 남편도 내 감정과 별반 다르지 않은 듯 했다. 영화나 드라마 속의 주인공처럼 아내의 임신 사실에 감동해 부인을 얼싸안고 빙빙 도는 일 따위는 없었으니 말이다. 그저 담담한 말투로, 병원에 가서 좀 더 확실히 알아보자며 놀란 나를 다독일 따름이었다.

그렇게 나는 ‘임산부 앵커’가 되었다. 당시만 해도 TV뉴스에서 배가 부른 앵커를 보는 일은 드물던 때였다. 김주하앵커가 만삭의 몸으로 뉴스를 진행하다 출산일에 다다라 ‘눈물의 클로징멘트’를 해서 화제가 된 것도 그보다 몇 년 뒤의 일이었으니 말이다.

나는 부푼 배를 뉴스 데스크 아래 감춘 채 매일 두 차례 뉴스를 진행했다. 출산 무렵이 다가오자 회사에서는 내가 아이를 낳고 오는 동안 앵커자리를 보전해주겠노라 약속했다. 만삭이 되도록 뉴스를 진행한 것도 드문 일이었지만, 출산을 위해 자리를 비운 여자 앵커를 다른 이로 교체하지 않고 기다려 준 회사의 배려도 당시로서는 무척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는 5년 뒤, 내가 둘째를 낳을 때에도 똑같이 행해졌고, 덕분에 나는 현재까지 국회방송 의정뉴스를 10년이 넘도록 진행하고 있는 ‘최장수 앵커’가 되었다.


시집살이만 힘든가?

친정살이도 쉽지 않아


아이를 낳고 정확히 한 달 뒤 자리로 돌아왔으나 이전과 똑같이 일하기란 역시 무리였다. 임신과 출산이야 생물학적으로 어쩔 도리 없는 여성의 숙명이라 해도 육아까지 여자 몫으로 남겨진 것은 백 년 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없다. 어디 그것뿐인가? 식구들이 먹을 음식을 만드는 것도, 입을 옷을 세탁하는 것도, 사는 곳을 청소하는 것도 모두 엄마와 아내의 책임이 아닌가? 요즘엔 거기에 더해 사회활동을 하며 가계를 보태는 역할까지 하고 있으니, 어째 갈수록 양성평등은커녕 여자만 살기 힘든 세상이 되어가는 게 아닌가 싶다.

그렇게 고민만 하고 있을 당시, 구세주가 되어준 것이 바로 엄마였다. 딸의 커리어도, 첫 손녀의 안위도, 둘 중 무엇 하나 소홀히 할 수 없다 여기신 엄마는 우리 세 식구를 친정으로 불러들이셨다. 아마도 엄마는 하나 뿐인 딸인 내가 사회인과 엄마, 아내 이 모든 역할을 짊어지게 된 것이 안쓰러우셨을 게다. 게다가 당시 남편은 대학병원 전공의 1년차로, 병원에서 먹고 자는 일이 허다했을 때였다. 며칠 만에 겨우, 그것도 파김치가 되어 집에 온 남편에게 가사와 육아 분담을 주장 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그런 연유로 엄마는 우리 식구가 자립해도 좋을 만큼의 여유가 생길 동안 당신이 가사와 육아를 맡아주시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애초 길어봤자 2,3년 정도 계획했던 친정살이는 둘째 출산으로 예상보다 훨씬 더 길어졌다. 게다가 둘째가 태어난 이듬해, 나는 하던 일에 더해 책까지 쓰겠다며 일을 벌였다. 마침 남편은 4년간의 전공의과정을 마치고 학교에 남겠다는 목표로 펠로우(임상강사)를 시작할 무렵이었다. 우리 부부가 처음 친정에 발을 들일 때보다 오히려 더 바빠진 셈이다. 어쩔 수 없이 수년째 계속된 엄마의 희생으로 우리 가정은 더없이 평안한 것처럼 보였으나 사실 보이는 게 전부는 아니었다. 남들은 “엄마가 아이도 봐주시고, 집안일도 해주시니 너는 대체 무슨 복을 타고났느냐”며 질투어린 시선을 보내기도 했지만 친정살이도 시집살이와는 또 다른, 나름의 스트레스가 존재했다.


처가살이는 아내를 위한 것?


우리가 친정에 사는 동안 내 주변 사람(특히 남성)들은 “남편 성격이 무척 좋은가보다”며 뼈있는 말을 건넸다. 언뜻 칭찬처럼 들리지만, 처가살이 하는 남편에 대한 은근한 동정이 배인 듯 느껴진 건 내 기분 탓일까? 하지만 정작 그런 기우와 달리, 남편은 처가살이에 큰 불만이 없어보였다. 실제로 아이의 출산, 육아문제로 고민하는 지인들에게 “처가에 들어가는 것이 최고”라며 적극 추천하고 나설 정도였으니 말이다. 시부모님도 일하는 딸의 가족들과 함께 사시는 터라 우리 상황에 대해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계셨기에 그 또한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인가, 우리는 사소한 일로 다툼을 벌였고 남편은 문득 처가에 살고 있는 상황에 불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그는 끝내 “여기에 들어와 사는 것은 오직 너 편하자고 한 일”이라며 모든 화살을 나에게 돌렸다. 그 말은 곧, ‘아이 키우고 집안 일 하는 것은 본래 온전히 여자인 내 몫인데, 그 편의를 봐 주기 위해서 자신이 희생하고 있는 것’ 이라는 의미였다. 나는 그것이 다른 사람도 아닌, 남편의 입에서 나온 말이란 게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여권 신장의 중요성과 남녀평등에 대해 줄기차게 주창해왔던 남편조차도 아이보고 밥하는 일은 여자의 몫이라 여기는, ‘전형적인 대한민국 남자’였던 것이다.

 며느리의 시집살이가 어려운 것처럼, 사위의 처가살이도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장인, 장모님이 잘 해준다 한들 내 부모와 같을까.

하지만 그런 남편의 마음은 이해할 수 있지만 친정엄마의 고생에 비할 바는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그 누구보다 젊고 멋쟁이였던 엄마는 우리 아이들 보시느라 몇 년 새 눈에 띄게 늙으셨다. 부모님이라고 사위와 사는 것이 편했겠나. 오죽하면 ‘사위는 백년손님’이라하지 않나. 나는 이때껏 엄마가 사위에게 차려내는 밥상에 밑반찬, 김치 하나, 반찬통 채 꺼내놓는 것을 못 보았다. 서운한 것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남편은 바쁘다는 것을 핑계로 육아의 책임을 엄마에게 미루는 것만 같았다. 부모님께 죄송한 마음이 커질수록 함께 남편에 대한 서운함도 함께 커지는 것 같았다.



현명한 친정살이를 위한 팁


친정에서 살면서 가장 힘들었던 건 바로 이 점이었다. 맞벌이가 늘고, ‘新 처가살이 시대’를 맞아 고부갈등 못지않게 장서 갈등도 늘었다고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아직까지 사위는 며느리만큼 편한 존재가 아니다. 때문에 직접적인 장서 간의 갈등보다는 처가살이로 인한 부부 다툼이 더 큰 문제인 듯하다.

얼마 전 한 지인도 내게 비슷한 일로 고민을 토로해 왔다. 일 년여 전부터 친정어머님이 손녀의 육아를 도맡고 계시는데, 그로 인해 부부관계에 갈등이 찾아왔다는 것이다. 친구는 딸의 육아로 고생하시는 친정 엄마의 노고를 남편이 제대로 알아주지 못하는 것이 가장 큰 불만인 듯 했다. 그리고 그것이 부부간 잦은 다툼의 원인이 된다며 조언을 구해왔다. 비슷한 상황을 겪은 바 있는 일종의 인생 선배로서, 감히 ‘현명한 친정살이를 위한 몇 가지 팁’을 전한다면 다음과 같다.


먼저 아내들은 남편의 입장을 배려하도록 노력해야한다. 만일 여러분이 시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다고 입장을 바꾸어보면 조금 더 이해가 편할 것이다. 무조건 남편의 편을 들어주는 것도 방법이다. 만일 어떠한 사안에 남편과 부모님의 의견이 갈린다면(설사 부모님의 생각이 옳다는 생각이 들더라도) 일단 남편 의견부터 동조해주어야 한다. 친정 식구들 속에 남편이 혼자 손님이 된 느낌이 들지 않도록 배려해주는 것이다.

남편들은 ‘처가살이가 아내만을 위한 것’이라는 생각을 바꾸어야한다. 아이를 키우는 것은 부부 공동의 역할이다. 특히나 맞벌이의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앞서 보다 현실적인 공감을 위해 우리 부부의 갈등 한 토막을 공개하기는 했지만, 사실 내 남편은 더없이 좋은 사위이다. 친정에 살 당시, 남편은 바쁜 와중에도 틈만 나면 가족 여행을 계획하곤 했는데 대부분 우리 부모님도 함께였다. 부모님께 아이들만 맡기고 우리 부부끼리 유럽으로 며칠씩 배낭여행을 다녀오기도 했지만, 그런 뒤에는 부모님과 함께 가까운 곳이라도 다녀오는 것으로 감사의 마음을 대신했다. 친정에서 독립해 나온 요즘에도 남편은 회식 등의 자리에서 맛있는 음식이라도 먹게 되면, “다음번에는 꼭 어머님, 아버님을 모시고 함께 오자”며 문자 메시지를 보내온다. 또한 부모님의 생일은 물론이고 처남의 취업 등 처가에 기념할 만한 날에는 반드시 나서서 가족 모임을 주선하곤 한다. 남편은 또 이따금씩 친정 엄마께 문자메시지를 보내기도 하는데, 나는 남편들에게 이 방법을 적극 추천한다. 간지럽거나 거창한 내용이 아니어도 좋다. 그저 진심을 담은 간단한 몇 마디의 말이면 족하다. 갑작스러운 문자 인사가 부담스럽다면 생일이나 어버이날처럼 특별한 날에 시도해 보면 어떨까? 자고로 며느리에게서 받는 문자 열통보다 사위에게서 받는 간결한 안부문자 한 통이 훨씬 더 감동스러운 법이다.

마지막으로 친정이든 시댁이든, 부모님께 육아의 도움을 받고 있는 부부들에게 반드시 권하고 싶은 것은 대리 육아에 대한 적절한 보상을 꼭 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의 경우, 우리가 당시 신혼 초라는 이유로 부모님께서 수고비 받는 것을 적극적으로 사양하셨기에 그저 자식인 것을 핑계로 눙치고 말았지만 이는 지금까지도 몹시 후회되는 일로 남아있다. 만일 부모님께서 경제적인 여유가 있어 설사 다시 되돌려 받게 된다 하더라도 일단은 수고에 대한 감사의 표시는 반드시 하는 것이 좋겠다.

혹시 ‘장가 간다’는 말에서 장가(丈家)가 ‘장인(장모)집’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아시는지. 본래 우리나라는 처가살이의 전통이 깊은 나라다. 우리나라는 고구려 시대부터 죽 처가살이의 풍습이 있었으나 조선 중기 유교가 도입되면서 중국의 친영제(親迎制)를 따라 여성이 시집으로 들어가 사는 형태로 바뀌게 되었다고 한다. 우리가 잘 아는 신사임당의 아들 율곡이이도 외가인 오죽헌에서 낳고 자랐다. 신사임당이 만일 17세기 이후에 태어나 시집살이로 맘 편한 날이 없었다면 우리는 그녀가 그린 ‘초중도’를 볼 수 없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겉보리 서 말만 있으면 처가살이를 안 한다’는 말은 이미 올드패션이 된 지 오래다. 혹시 현재 처가에 살면서 서로 갈등을 겪고 있는 부부가 있다면 이 글을 계기로 보다 더 서로를 이해하고 배려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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