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공부 독학자의 기쁨
“있을 때 잘하라”는 말은 인생 어느 것에도 다 통용되는 명언이지만, 가장 따끔하게 내 발등을 콱 찍어 누를 때는 역시 돈이 없을 때가 아닐까 한다. 그리고 이렇게 속단하는 어리석은 자의 뒤통수를 사정없이 휘갈기는 상대가 누군지 뒤를 휙 돌아보면 그의 이마빡에는 어김없이 이 두 글자가 적혀 있다. ‘건강’.
그러니 이 공부 기록은 기본적으로 내 건강을 잘 돌본다, 혹은 운 좋게도 내 건강에 아직까지 별 이상 신호가 감지되지 않은 상태임을 전제하며 시작해야겠다. 몸과 마음이 그럭저럭 버틸 만한 상태가 아닐 때라면 애초에 돈 공부도 이래저래 원활하게 흘러가지 못하니까.
오늘은 약 4-5년 전쯤 런던으로 돌아간다. 그때 나는 몇 년 한국에서 회사 생활을 경험해 봤고, 그 덕분에 카드값과 월세를 운 좋게 한 번도 밀리지 않고 갚았고, 나름대로 인생에 불만이 가득했지만 적어도 돈 때문에 힘들진 않았다. 나는 애초에 돈 그릇이 간장 종지만한 인간이었으니까, 책 말고는 모든 소비가 피곤해서 차라리 편했다. 간장 종지를 탈탈 털어서 방울방울 모인 돈으로 맞바꾸는 소비의 기쁨은 ‘탈탈 터는’ 피곤함으로 진작에 상쇄되어 전부 날아갔으니까.
런던에서는 그나마 해 본 ‘회사 생활’이라는 경험을 써 먹을 기력도 남지 않았다. 이따금 힘이 나면 사람이 많이 모여서 내가 숨어들 수 있는 대기업 구직 행사에 구경을 가거나 동네 상점에 멸종 직전인 종이 이력서를 넣기도 했지만, 이쪽에도 저쪽에도 적절한 전략을 세워 어필하기에는 기력이 영 달렸다.
당시 나는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제대로 된 생산력을 갖추지 못한 구성원이었다. 히스로 공항 입국 심사 때 이민국 직원이 외부인에게 지낼 숙소 여부와 돌아갈 비행편, 직업 등을 묻는 건 순전히 여기에 연유한다. 이 사람이 우리나라에 와서 돈을 펑펑 쓰고 내수 경제에 활기를 보탤 힘이 있는지를 확인하는 동시에, 활기는커녕 우리 생태계를 교란하거나(범법 등을 동원해서) 빌붙을 위험은 없는지를 판단하는 과정이 바로 입국 심사라고 할 수 있다. 내 입국 심사 시간이 길었던 건 어쩌면 그 직원이 일찌감치 내 미미한 생산력을 날카롭게 감지한 탓일지도 모르겠다.
거기다 나는 내 생산력이 따져지는 이 구조부터도 전혀 몰랐다. 그래서 모든 게 야속하기만 했다. 내게 친절하지 않은 런던과, 돈도 많으면서 나를 돕지 않는 부자들과(?), 기타 등등의 모든 게. 그리고 익숙하게 무기력과 슬픔에 잠겼다. 어릴 적 영화나 드라마에서 자주 보던 슬픔에 잠긴 주인공의 아름다운 모습을 학습한 탓인지, 그 시간이 때론 달콤했다. 깨어나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깨어나면 당장 월세 갚을 고민, 밥 먹을 돈 고민, 연고 하나 없는 이 낯선 도시에서 멀쩡한 척 살아갈 고민까지 줄줄이 밀려 있었으니까.
그때 내가 빌붙은 건 가족이었다. 돈이 넘쳐나는 가족이 있어서 생각없이 빌붙을 수 있었다면 아마 아직까지도 나는 런던에서의 마음 상태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소위 ‘돈 공부’라는 걸 할 결심도 딱히 하지 않았겠지. 우리는 그냥 다 같이 근근이 살아가는 형편이었는데, 다만 내가 더 죽는 소리를 하니까 어쩔 수 없이 다들 자신의 소중한 종지를 탈탈 털어 내게 부어 주었다. 그때 나는 밑빠진 종지였고, 우리 가족은 가엾은 두꺼비였다.
급한 불이 꺼지면, 아니, 급한 구멍만 막으면 모든 게 원상태로 돌아갔다. 마음이 편안해지고, 그럼 기억 상실이라도 찾아온 듯 구멍 같은 건 다 잊었다. 그러면 다시 구멍이 터지고 두꺼비가 나타나 안간힘을 다하고 나는 가만히 있거나 이따금 구멍 한 번을 막으면 큰일이라도 해낸 듯 의기양양해졌다.
이런 상태를 ‘희생양이 된 듯 군다’고 표현한다는 걸 배운 건 한참 나중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