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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브라보 Jul 01. 2016

곡성: 개안과 미끼의 가교로 삶/죽음/종교를 논하다

영화 <곡성>  신화로 무명 일광 외지인 종구 효진의 존재를 파헤쳐 본다

김기덕 감독의 <피에타>에서 강도에게 역할 빼앗기고 나홍진 감독의 <곡성>에서 악마의 모습이 된 인간의 수난 시대의 투시로써의 신의 수난 시대  - 삶과 죽음 그리고 신의 혈투


***영화를 본 후 읽어주세요~~ 좀 길어요~~ 밑줄 친 부분은 타 웹사이트에서 가져온 것이며 각주를 대신하여 링크를 걸었음을 밝힙니다. 


나홍진 감독의 곡성을 본 후, 생각해서 만든 영화라는 것이 느껴졌고 내가 본 곡성은 감독이 인터뷰 한 바 있는 신들의 공성전이기에 그것에 관해서 써 보고자 한다. 


몇 겹의 플롯으로 짜인 영화를 구상했다. 주된 이야기는 치열하고 치밀하게 침입을 방어하고자 하는 어느 가장에 대한 이야기다. 2시간 내내 전력을 다해 방어하는데 들어오려고 하는 존재가 우리 편인지 남의 편인지 모르는 상황이 가장 무섭다. 또 다른 이야기는 높은 존재들끼리 벌이는 공성전이다. 막판에는 두 가지 이야기가 서로 교차하며 난잡해지게 만들고 싶은 욕망도 있었다.


영화 <곡성>은 수미쌍관법(首尾雙關法)의 구조인 영화의 도입부와 도출부의 예수, 마고 신화, 개안(마음의 눈을 뜨는 심청이와 심봉사 이야기)설화, 연오랑세오녀의 설화 (延烏郎細烏女說話), 일본 태양 여신 신화, 한국의 굿 등이 어우러진 영화이다. 김기덕 감독의 영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속 두꺼비(개구리)는 아주 중요한 단서가 되고 이는 한국 문화와 석가, 그리고 미륵의 계보를 잇는 역할을 하는 반면 나홍진 감독의 <곡성> 속 까마귀는 북아메리카, 켈트족, 그리스 로마, 즉 전 세계의 인류와 계보를 잇게 함과 동시에 예수는 누구인가, 우리가 믿는 것은 무엇인가, 또 인류의 구원을 질문하는 영화로 본고는 본다. 다시 말하자면, <곡성>의 까마귀는 태양신을 상징하고 <봄...>의 개구리는 달을 상징하며 태양신은 양을 상징하고 개구리는 음을 상징한다. 두 영화의 다른 점은, <곡성>은 혼돈(카오스) 속 복잡한 패턴을 보여준 반면 <봄...>은 시공간을 초월한 우주의 법칙을 보여준다. 


영화 <곡성>의 첫 장면은 누가복음 24장 37-39절로 시작한다. 


그들은 놀라고, 무서움에 사로잡혀서, 유령을 보고 있는 줄로 생각하였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너희는 당황하느냐?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을 품느냐?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너희가 보다시피, 

나는 살과 뼈가 있다."


영화 <곡성>의 마지막 장면의 전 장면은 가톨릭 부제(副祭)가 다시 살아 난 외지인의 정체를 묻는 장면이며 외지인의 겉모습은 점차 악마의 모습으로 변한다. 이 마지막 부분은 감독도 이야기했듯이 누가복음을 읊고 있는 자가 예수냐 아니냐 혹은 악마냐 아니냐라는 것 보다, 우리가 믿고 있는 것의 실채가 무엇인지 반문하는 장면이다. 지렁이는 하나지만 두 개의 낚시 바늘이 있다(*참고로 전남 곡성의 가정역 자전거 다리에는 딸(심청이)을 기다리는 아비 동상이 있고 백제의 견훤은 지렁이 아들에서 후백제 대왕(용)이 되었다는 것이 역사적 기록이다). 예수로 보면 한 개의 낚시 바늘에 꿰이는 것이고, 악마로 보면 또 다른 낚시 바늘에 꿰이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낚싯바늘에 꿰인 미끼인 지렁이만 빼서 먹어야 하는가라고 생각하면 <곡성>의 중구가 된다. 그는 지렁이를 먹은 그의 딸 효진이를 삼킨, 즉, 미끼를 삼킨 자다. 그럼 어찌해야 하는가? 영화 <곡성>을 보고 사람의 인지기능을 잘 이용해 영화 속 화두만 풀면 된다. 지렁이를 왜 먹냐고... <황해>를 이야기하던 감독이 '종교는 무엇인가' 그리고 결국 '구원'이라는 주제를 이야기하려 하니 감독을 장려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쓴다. 그리고, 여러 번 박장대소를 한 값을 지불하기 위해.. 오랜만에 이렇게 여러 번 웃어봤다. 장르가 코미디인 줄...  그리고 생각했다 유머 코드가 김기덕 감독의 것과 비슷하다. 그렇다고 <곡성>이 우스운 이야기라는 것은 아니다. 이 영화는 관객의 인지 레벨을 테스트하고 있다. 

출처: http://senior.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7/10/2008071065014.html


영화 <곡성>의 공간과 무명이 말하는 할미의 존재


영화 곡성에서 무명이 말하는 할미의 존재는 마고 신화를 바탕으로 한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마고 신화는 창세 기록을 담고 있고 태초에 인류의 시조인 인간의 조상을 탄생시킨 것으로 신라 시대 박제상이 쓴 징심록 제 1 지 부도지에 나온다고 한다. 마고 신화의 창세 신화는 아래와 같다. 


마고 신화는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하고 뜻깊은 창세 기록을 담고 있다. 신라시대 박제상(363~419)이 쓴 『징심록』제 1지「부도지」첫머리에 나오는데 대강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마고성에 사는 마고가 태초에 인류의 시조인 인조(人祖)를 탄생시켰다. 그 인조들은 천인(天人)으로서 조화롭고 이상적인 삶을 살았다. 그런데 ‘오미의 화’(백소씨족의 지소 씨가 포도를 먹고 다섯 가지 맛五味을 알게 된 사건)를 계기로 인조들이 존재계의 질서를 바로잡는 자재율(自在律) 기능을 상실하게 되면서 존재계의 질서가 와해됐다.  

이에 천인들의 장자인 황궁씨가 대표로 복본(復本)의 서약을 한다. 인조들은 마고성의 동·서·남·북문을 통해 사방으로 분거했다. 북문으로 나온 황궁씨의 후손들은 항상 정성과 믿음으로 언젠가는 마고성으로 복본 하겠다는 마음으로 늘 수행에 힘쓰는 삶을 살았다는 내용이다.

한국 선도는 마고성 출성 이후를 현생 인류사의 시작으로 본다. '복본'의 '본(本)'은 '마고성에서 사는 인조들의 근본 상태'라는 의미로, ‘복본’이란 마고성의 원상을 회복하고 천성을 되찾아 조화로운 근본 상태를 회복하는 것을 말한다.

황궁씨의 후손인 환인-환웅-단군 등의 한국인 선조들은 가는 곳마다 중앙에 천부단(적석 제단, 천제단)을 쌓아 천제를 지내는 등 수행하는 삶을 살면서 마고성 복본을 잊지 않고자 하였다. 그러나 단군조선 폐관 이후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선도의 수행력이 약해지면서 마고성으로 복본 하려는 정신이 점차 사라지고, 마고성의 마고는 마고할미 설화의 형태로 변이 전승되기에 이르렀다.


할미는 ‘한+어미’의 합성어이다. ‘한’은 ‘크다·많다·위대하다·성스럽다’ 등의 의미를 지닌 순수한 우리말이다. 그러므로 ‘한어 미’는 ‘위대한 어머니’, 곧 ‘성모’, ‘신모’를 뜻하며, ‘마고할미’는 ‘마고 성모’, ‘마고 신모’의 의미가 되겠다. 설화 속 마고할미의 가장 주된 행위는 돌을 가져다 항상 성을 쌓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비록 설화의 형태로 전승되어 왔지만 천부단(적석 제단)을 쌓는 전통이 고스란히 설화 속에 흔적으로 담겨 있는 것이다.  


지금도 우리나라는 마고할미 이야기가 전국적으로 분포 전승되고 있다. 이는 우리 한국인들이 지니고 있는 마고성 복본에 대한 염원의 흔적이라고 생각된다. 천제단을 쌓아 천제를 지낸 오랜 전통은 지금도 산 정상의 곳곳마다 적석 제단을 쌓는 관습으로 남아 전한다. 


영화 <곡성> 역시 곡하는 소리인 곡성 (哭聲)과 성을 쌓는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원래 지명의 이름인 전남 곡성(谷城)을 함의하고 있다고 가정한다. 그리하여, 본고는 곡성(哭聲)은 복본에 대한 염원 혹은 원형을 찾아가기 위한 곡성(哭聲)과 그러한 원형을 지키려는 마고할미의 목소리를 무명을 통해 전한 원형의 곡성(哭聲)을 지키기 위한 곡성(哭聲)으로 본다. 


지렁이와 두 개의 낚시 바늘, 그리고 개안(開眼) 설화의 지렁이라는 미끼와 효진이


영화의 시작 장면은 외지인이 한 개의 지렁이를 두 개의 낚시 바늘에 꿰는 데 있다. 왜 한 개의 지렁이를 두 개의 낚시 바늘에 꿰어서 미끼를 강에 던지냔 말이다. 이미 일어난 사건의 단서 없이 떠도는 낭설을 기반으로 사건을 분석하면 우리는 또 다른 종구가 되어있고 영화 속 주인공을  통해 감독이 말하자 하는 의도를 찾는다면 지렁이를 안 먹고 개안을 할 수 있다.  '개안 설화'는 달 동물로 상징하는 지렁이를 모티브로 삼는 것에 있다.


이 설화는 쫓겨난 여인 발복형 설화의 유형에 개안 단락이 첨가된 것이다. 지렁이 고기를 먹고 눈 뜬 시어머니형 개안 설화는, 가난한 며느리가 남편 출타 중 장님인 시어머니에게 드릴 것이 없어 지렁이를 잡아 조리해 드렸는데, 아들이 오자 시어머니는 아들에게 봉양을 잘한 며느리를 칭찬하며 며느리가 해 준 고기를 보였더니, 아들이 그것은 지렁이라고 소리치자 장님 어머니가 그 말에 놀라서 눈을 떴다는 내용이다.

지렁이를 먹고 눈을 뜬 것은 지렁이가 약용으로 쓰이는 동물인 때문이기도 하지만, 지렁이가 ‘달동 물(lunar­animal)’로 생생력(生生力)을 가진 것으로 상징되었기 때문이다.

개안 설화는 그 밑바탕에 효가 뒷받침되어 있어, 효행에 따른 이적으로 개안이 일어날 수 있는 기틀이 마련되어 있으며, 개안은 생사를 모르거나 죽은 줄로만 알았던 자식을 만남에 따른 인간적 경이나, 징그러운 지렁이를 자기가 먹었다는 놀라움이 계기가 되어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심청전>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이 개안 설화는 밝음과 어둠처럼 극한적인 상황일지라도, 그것이 변하지 않고 항구적으로 지속되는 것이 아니고 서로 교체되어 순환될 수 있다고 믿는 민간의 순환 사고(循環思考)를 바탕으로 하여 형상화된 것이다.


주인공 남자 이름 종구는 마지막을 나타내며 음행 오행에서 숫자 구(9)는 인간이 모든 일을 다 펼친 최대(마지막)의 상태이며 주인공 종구의 딸의 이름은 효진이다. 진실된 효를 상징하는 효진이는 지렁이인 미끼를 물어 아버지인 종구에게 삼키도록 하는 역할을 한다. 왜? 뭐시 중헌 지도 모르면서 캐묻고 지랄 허는 아비의 개안(開眼)을 촉진하는 계기를 마련하려고... 왜? 심봉사 이야기로 아직 개안이 안 되었다고 감독은 생각했나 보다. 심봉사의 개안도 심청이의 희생으로 이루어진다. 마치 <곡성>의 아버지 중구도 그의 딸 효진의 희생으로 개안의 기회를 부여받듯이.


누가 누구누구를 낚고 있는가? 


일단 감독이 관객과 투자자들을 꿰고 있다. 둘 다 성공으로 보인다. 외지인은 효진이와 종구를 포함한 곡성 인과 잡신인 일광을 포함한 신(무명과 예수 혹은 악마)을 낚는다. 외지인의 낭설을 통해 효진이와 종구를 낚는데 감독은 학익진과 같은 방법으로 사방을 조여가며 효진이와 종구 낚기를 전개한다. 먼저, 마을 전체를 외지인과 곡성 인간의 요물스런 소문을 퍼트린다. 그 사이 곡성에서 일어나는 살인 사건의 원인으로 외지인이 관련 있을 것이 이라는 또 다른 소문의 소문은 퍼지고, 종구는 동료 경찰인 오성복을 통해 이 이야기를 듣게 된다. 웃어넘겼던 오성복이 들려주는 외지인의 소문은 시나브로 종구의 무의식 세계를 점령하고 종구는 성복과 함께 본 나체의 여인의 환영으로 그의 꿈속 세계에 나타난다. 일단, 황당한 외지인과 동네의 불길한 일들을 엮어 종구라는 인물의 두뇌에 집어넣기 성공이다. 


종구의 의식 속에 외지인과 불길한 일의 상관관계를 보여주는 데는 '무명'도 직접 신발 벗고 뛴다. 왜? 무명은 음과 양이 갈라지지 않은 오묘한 카오스 세계이다. 카오스가 혼돈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현대 과학에서 카오스는 복잡하고 역동적인 패턴이 숨겨져 있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외지인과 무당 일광의 활개는 음양의 갈라지게 하여 '복본', 즉,  '마고성에서 사는 인조(사람들의 조상)들의 근본 상태'라는 의미인, 마고성의 원상을 회복하고 천성을 되찾아 조화로운 근본 상태(원형 상태)의 회복을 저지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무명'은 외지인에게 살을 날려 그의 기도가 비 완성으로 끝나도록 종용하면도 '종구'에게는 너의 죄가, '남을 의심하고, 남을 죽 일락 허고, 그리고 죽였다'는 죄명을 씌우는 것이다. 즉, 남을 벌하거나 제지하는 것은 신인 자신, 즉 무명이 해야 할 일이고, 사람은 남을 의심하고, 남에게 나쁜 마음을 갖거나, 남을 해하려는 분별을 갖지 말라라는 무명의 충고이다. 왜? 그 누구도 완벽한 인간은 없기 때문이고, 완벽하지 않기에 구원받아야 하고, 구원받기 위해 정진할 뿐이기 때문이다. 


무명은 '종구'가 영화 <곡성>에서 두 번째 본 불난 집의 살인 사건 속으로 안내하고 왜 그들이 죽었는지 (아주머니는 거부했지만 할머니의 권유로 굿을 해, 아주머니가 할머니와 남편을 칼로 찔러 죽이고 자신은 나무에 목을 매달아 죽는다) 그리고 마고 할머니의 말을 전한다. "할매가 그러는디 그 왜놈이 귀신이랴, 아줌니 피를 말려 죽이려 했댜." 그 후, 종구는 완벽하게 곡성 마을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과 (악마) 외지인의 상관관계를 형성하여 그의 꿈속에 투영시킨다. 즉, 동료 오성복에게 들은 외지인과 악마의 관계, 그리고 악마인 외지인과 곡성인의 살인사건 관계를 온전히 받아들인 것이다. 


효진이는 아부지 종구와 종구 어머니(효진이 할머니)를 통해 무명을 낚는다. 악몽을 꾼 후, 효진이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아내와 함께 효진이의 방을 찾은 종구는 닭과 고양이의 싸움 소리를 효진이 방 안에서 듣는다. 공간이동이 가능한 새(i.e., 해를 상징하는 까마귀)와 닭은 영물(靈物)로 여겨, 천상의 안내자 혹은  하늘의 사자로 여겨졌다 한다. 닭이라는 영물은 한민족을 상징하는 새로 인도에서 고구려를 계귀국(鷄貴國)이라 칭했다는 기록과 삼국유사의 신라의 이칭, 즉 다른 표현으로 '닭을 섬기는 나라'라는 기록과 혁거세와 김알지 탄생신화에서 볼 수 있다. 또한, 닭은 여명, 빛의 도래를 예고하는 태양의 새이며 닭의 울음은 시보의 역할을 하고, 미래를 예언하는 예지 역할을 하며, 닭의 알은 생명의 재생과 부활을 의미한다. 


고양이는 일본 민속 설화에 등장하는 고양이가 변화한 요괴이다. 그 이름도 유명한 바케네코(일본어: 化け猫, 둔갑 고양이)가 바로 그것인데 설화에 따르면 고양이가 13년 이상을 살고 무게가 3.75그램이 넘고, 꼬리가 길게 되면 바케네코가 될 수 있는 조건을 충족하고, 그 후 초자연적이고 불사가 의한 힘을 얻게 된다 한다. 또한 무엇이 되었든 크기에 상관없이 먹을 수 있는 능력을 갖는다 한다. 여기에서 영화 속에서 귀신에 홀린 효진이가 목 먹던 생선을 먹어 치우고 할머니와 어머니를 살해하기 전 여러 음식을 한꺼번에 먹어 치우던 행동이 바로 이 바케네코의 요괴가 씌워서 그런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그리하여, 효진이의 방 지붕 위에서 들렸던 닭과 고양이의 한 판은, 김득신의 파적도(破寂圖), 즉 정적을 깬 고양이를 연상케 하는  고양이(외지인-일광)와 닭(무명-종구)의 소동은, 김득신의 그림에서 처럼 병아리(효진)를 잡아 물고 도망가는 상황에서 닭의 비명소리 (무명 혹은 종구의 곡성)를 예견하는  전조현상으로 보인다.


종구의 딸 효진이의 그림은 종구의 딸 효진이의 그림이 그녀 꿈속의 이야기를 노트에 그린 것인지.. 동네에서 떠 도는 이야기를 그린 것인지... 동네에서 떠도는 낭설을 듣고 자신의 아빠 종구처럼 꿈에 나온 이미지를 그림으로 형상화하였는지, 아빠와 엄마의 차 안의 섹스 신에서 느낀 것을 표현한 것인지 우리는 판단할 수 없다. 이를 판단하는 즉시, 우리의 지적 레벨은 영화 <곡성> 속 건강원 코믹한 이야기를 신비하고 진실처럼 인지하고 전달하는 아재와 같아진다. 


설화적으로 이야기하자면, 해를 상징하는 닭과 까마귀의 대결 혹은 고양이와 닭의 대결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종구가 가톨릭 부제와 함께 다시 찾아간 외지인의 집에서 외지인이 닭발을 먹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닭이 발이 없다면 땅에서 걷지도 하늘을 날지도 못하는 불구의 상태가 되어 버린다. 또한, 외지인은 까마귀와 친근한데 이는 신라의 연오랑세오녀의 설화 (延烏郎細烏女說話)와 일본 태양 여신 신화와 연관이 있다. 이야기는 차후에 하고 다시 종구를 따라가 보자.


우리 건강원  아재의 에피소드를 통해 외지인의 정체(?) 굳히기로 종구와 종구 동료 오성복 낚기가 시작된다. 우리 건강원 아재의 두 눈으로 보았다는 외지인의 악마설은 가히 가관이다. 머리를 22 바늘 꼬매고, 텅 빈 냉장고를 보여주며 자신의 썰이 진실이라고 애타게 부르짖는다. 일본인의 정체를 확인하고자 하는 종구는 - 영화 마지막 가톨릭 부제에게 한 말이 종구에게 해당된다: 종구는 외지인의 정체를 알기 위해서 간 것이 아니고 그가 갖고 있는 외지인에 대한 생각, 즉 외지인이 악마이고 마을에서 일어나는 살인 사건의 주범이 바로 외지인이다라는 것을 확인하고 그의 정체를 밝히고자 찾아가는 것이다 - 그의 의심을 의심하기보다, 그의 의심을 진실로 탈바꿈할 증거를 찾기 위해 우리 건강원 아재와 같이 산에 가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후로 일어나는 사건, 즉 말라비틀어진 고라니 시체와 벼락 맞은 건강원 아재, 그리고 연이어 보는 302호의 응급환자의 죽음이 그의 의심을 더욱 확고하게 하고 동료 오성복은 술집 작부와 연관을 확장시키는 것을 굳히는 것으로 귀결된다. 


효진이가 말하는 어떤 아재가 자꾸 들어올락혀라는 꿈 이야기와 갑자기 못 먹던 물고기 요리를 먹는 효진이를 보며 효진이를 통한 할머니 낚기는 곧 무명을 불러들이는 가교로 작동을 하며, 종구는 동료 오성복과 오성복이 끌어들인 가톨릭 양이삼 부제와 같이 외지인의 집을 방문한다. 필자는 부제의 이름 양이삼이 두 개로 나뉜 것 두 개였던 것이 음과 양으로 나뉘고 이는 또 3개로 나뉜다는 것으로 해석한다. 종구의 이 과정은, 원래는 무명이었던 어떤 것이 두 개의 선과 악으로 나뉘고 이는 또 나와 타자를 구분하지만 이 역시 혼재되어있으며 무영에서 빛과 그림자로 나뉘는 세 개로 갈라진다고 보았다. 


종구가 방문한 외지인의 집은  종구와 종구 일당에게는 생소한 오컬트적  환경에 외지인에 대한 그의 공포감과 의문 감은 증폭되는데 필자는 이를 맥거핀으로 본다. 영화의 줄거리에는 영향을 주지 않지만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을 의도로써 공포와 의문을 불러일으키는 영화 구성상의 속임수를 맥거핀 효과 [MagGuffin effect]라 부른다. 오컬트적인 요소는 맥거핀 효과를 부르기에 충분하다. 단지, 외지인의 집을 지키고 있던 흑구(검정개)는 천구로써 저승과 이승 그리고 이승과 저승을 안내하는 개이나, 원래는 백구가 이 역할을 담당하는데 외지인의 집은 흑구(검정개)가 이일을 감당하고 있다는 점이 특이점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일광의 역할을 반추할 수 있다. 원래는 백구가 이승과 저승 그리고 저승과 이승으로 안내자 역할을 한다. 하지만, 영화 <곡성>에서는 곡성인을 이승과 저승으로 안내하는 자는 일광이다. 그는 산자를 '살을 날린다'라는 명분으로 산 자, 즉 효진이를 죽이려 하는 자다. 즉, 그는 효진이를 이승에서 저승으로 안내하려던 자였다. 그래서, 일광의 역할 중 하나(그의 역할은 몇 겹으로 쌓여있다)는 한국인을 상징하는 닭, 특히, 그들의 삶을 상징하는 백계, 백 염소, 마을을 지키는 장승을 제물로 바치려고 했던 것이고 무명은 이러한 구분, 즉, 삶과 죽음의 구분이 없는 완전한 세계를 꿈꿨고 그것을 방어하기에 온 힘을 다한 것이다. 


민간신앙에서는 저승과 이승은 불이 [不二], 즉 둘이 아니다. 이승과 저승을 나눠보는 이분법 체계는 불교나 기독교의 세계관이라 할 수 있다. 민간신앙과 무속신앙에서는 공간적 구분이 없고 죽은 영혼은 이승이 아닌 다른 곳이라 하며 현세 삶을 중시하는 철학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공간적 개념은 영화 <곡성>에서 잘 보인다. 이것을 카오스, 즉 혼란이라는 말은 어불성설이다. 요즘 과학의 발달로 이분법적인 사고는 천대를 받는 시대가 왔다. 오히려 이런 민간신앙 사상이 복잡하고 역동적인 삶과 죽음을 보여주는 진정한 카오스 안에 패턴들을 숨겨 놓고 있는 것이며 이러한 사고는 더욱 과학적이다. 


민간신앙에서는 저승을 이승과는 다른 곳이라고 구분하고는 있으나 현세를 중심으로 하므로 뚜렷한 내세관이 확립되어 있지 않다. 이 때문에 저승의 위치나 경계가 모호하며, 지옥과 극락이 분명하게 구분되어 있지도 않다. 또 저승에 간 이후의 영혼이 어떻게 되는가에 대한 뚜렷한 도달점이 없다. 그저 영혼이 이승에의 모든 미련을 끊고 저승으로 무사히 가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나라의 무속 및 민간 설화의 저승은 뚜렷하게 구분된 공간적 개념이 있기보다는 다소 막연하고 모호하며 불확실한 모습을 띠고 있다. 저승이 어느 방향에 얼마만큼의 거리를 두고 어떤 형태로 구성되어 있는지에 대해 명확한 구분과 인식이 없다. 그저 죽은 영혼들이 가는 세계로서 이승이 아닌 어떤 곳이라고만 인식한다. 그것은 아마도 우리 민족이 사후세계보다는 현생의 삶에 더 의미를 두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흔히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라는 말들을 한다. 이 말만큼 우리 민족의 죽음관을 분명하게 드러내 주는 말도 없다. 저승이 아무리 좋아도, 또 이승의 삶이 아무리 고단해도 저승보다는 낫다는 것이다.
이런 현생 중심의 사고가 지배적이었으므로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구체적인 형상화가 두드러지지 못하다. 불교의 영향으로 저승 관념이 다소 강화되었으나 고등 종교에서 형상화된 저승에 비하면 민간신앙에서 드러나는 저승은 지극히 소박하고 단순하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우리 민족은 현세의 삶을 중시한다. 따라서 저승은 가기 싫은 곳이며 되도록 가지 않으면 좋은 곳으로 인식한다. 그래서 설화에서는 영혼을 잡아간다는 저승차사에게 뇌물을 주면서까지 이승의 삶을 연장하려고 한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장자풀이>의 사마 장자이다. 사마 장자는 자신의 악행으로 죽을 위기에 처하자 저승사자들에게 음식을 대접하고, 뇌물을 주어 죽음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뇌물을 받은 저승사자들은 사마 장자 대신에 다른 사람이나 말을 잡아간다. 다른 설화에서는 뇌물을 받은 저승사자가 저승의 명부를 고쳐서 수명을 연장해 주기도 하는데, 그 대표적 인물이 삼천갑자를 살았다는 동방삭이다. 

저승은 죽은 영혼만이 갈 수 있으며 산 사람은 절대로 갈 수 없다. 즉 이승과 저승은 오고 갈 수 있는 공간이 아니다. 저승에 갔다가 되돌아온 영혼이 육체가 사라져버려서 되살아날 수 없었다는 것은 저승과 이승의 단절을 잘 보여준다. 육신이 있어야 이승에서 살 수 있지만, 저승은 육신이 없어야 갈 수 있는 영육 분리의 공간이다. <차사본풀이>에서 이승의 사령으로 저승을 다녀온 강림이도 저승에 들어갈 때는 육신을 벗어두고 영혼만 들어갔다가 나온다. 


그런데, 뭐시 중헌지도 모르는 아빠 종구는 자꾸 딸 효진이에게 죽은 후의 세계에 대해서 물어보고 그 세계를 염탐하는 사이 그와 그의 가족의  삶의 시간은 목숨을 다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섬뜩한 점은, 종구의 가족은 살아있는 자들이라고 한다면 종구 가족 이외의 인물은 죽은 자들을 이용한 삶에서 죽음의 경계로 안내하는 덫으로 곡성인들이 존재한다고 볼 수 도있는 것에 있다. 또한 곡성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허무는 무명과 살아있는 자를 죽음으로 안내하는 일광과 죽은 자를 또 다른 죽음(영화 속에서는 그 존재가 무엇인지 보여주지 않는다. 죽음에서 또 다른 죽음으로 탄생한 박재상 )으로 안내하는 외지인의 공성전이라 볼 수 있다. 


영화 <곡성>에서 말하는 죽음은 신체의 죽음뿐만이 아니다. 의심해야 할 때 믿고, 믿어야 할 때 의심하는 모순적인 인간의 의식형태에서 죽었으되 살아있는 무명과 살아있되 의식이 죽어 바른 판단이나, 합리적인 의심을 하지 않는 산 인간들을 보여주고 영화 속 나타나는 두드러기를 포함하여 나타나는 증상들은 나홍진 감독의 인터뷰에 의하면 신병을 최대한으로 종합해 보니 좀비의 형태가 되었다는 것에서도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즉, 중요한 생각의 줄기를 놓치고 맥거핀 같은 것에 놀아나는 사람들의 의식 상태도 곡성에서 말하는 '절대 현혹되지 말라'라는 말에 위반되는 행동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이 영화에서 할매는 중의적으로 사용되는데, '무명'이 언급하는 '할매'는 마고 할매로 추정되고 그녀는 인조를 탄생시킨 할매로서 존재한다면, 곡성 마을의 할매들은 '일광'을 마을에 불러들이는 인조(종구와 그의 가족들)를 말살하는 할매로서 존재한다.


종구는 외지인의 집에서 일본 전통 예능인 (能)의 가면 중 여신의 가면을 본다.  (能)의 세계관은 인간 존재의 무상과 각 개인이 극락에 이를 때까지 치러야 할 싸움에 대한 설교이며 이는 선불교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한다는데 있다. 그러면 외지인의 집에 있는 조류도감과 춘화는 무엇인가? 이 부분을 이해는 연오랑세오녀 설화 (延烏郎細烏女說話)가 필요하다.  이 설화는 연오(延烏)와 세오(細烏)가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자 일월이 빛을 잃었다가 세오의 비단으로 제사를 지내자 다시 빛을 회복하게 되었다는 설화이다. 여기에서 오는 까마귀를 나타내며 까마귀는 태양을 상징한다. 본래 ≪수이전 殊異傳≫에 전하던 것인데, 고려 때 ≪삼국유사≫에 채록되었다. 이 설화는 단순한 연오·세오 부부의 이동 설화가 아니고 고대의 태양 신화의 한 원형으로 여겨지고 연오(延烏)와 세오()에서 오는 태양의 새를 상징하는 까마귀이다. 거리는 다음과 같다.

신라 제8대 아달라왕 4년(157) 동해변에 연오랑·세오녀 부부가 살았다. 하루는 연오가 바닷가에서 해조(海藻)를 따고 있던 중 갑자기 바위가 연오를 싣고 일본 땅으로 건너갔다. 그 나라 사람들이 연오를 보고 비상한 사람으로 여겨 왕으로 삼았다. 세오는 남편 연오가 돌아오지 않자 찾아 나섰다가 남편이 벗어 둔 신을 보고 그 바위에 오르니 바위가 또 세오를 일본으로 실어 갔다. 그 나라 사람들이 놀라 이 사실을 왕께 아뢰니 부부가 서로 만나 세오를 귀비로 삼았다.


이 시기를 역사는 '신라일월무광'이라고 하였다. 

“해와 달이 빛을 잃었다 [日月無光;일월 무광]”고 했다.  일관(日官)이 아뢰기를 일월의 정기가 일본으로 건너가 버려 괴변이 생겼다고 하였다. 이에 국왕은 사자를 일본에 보내어 이들 부부를 찾게 되었다.

연오는 그들의 이동이 하늘의 시킴임을 말하고 세오가 짠 세초(細綃:생사로 가늘게 짠 천)로 하늘에 제사하면 다시 일월이 밝아질 것이라고 하였다. 이에 사자가 가지고 돌아온 그 비단을 모셔 놓고 제사를 드렸더니 해와 달이 옛날같이 다시 밝아졌다. 비단을 창고에 모셔 국보로 삼고 그 창고를 귀비고(貴妃庫)라 하였으며, 하늘에 제사 지내던 곳을 영일현(迎日縣) 또는 도기야(都祈野)라 하였. 세오가 보내준 색 비단으로 영일에서 제사를 지내자 “해와 달이 전과 같았다[日月如舊;일월여구]“고 한 사건의 정황을 한 마디로 줄인 것이다. 더욱더 절묘한 것은 明자를 파자하면 바로 日月이 나와 ”日月을 바로잡다 [正]“는 뜻이 되어 연 오세오 설화의 의미 그대로다. 따라서 ‘정명국=신라’․‘함달파=아달라’가 된다. 유사에서 연 오세오 설화와 연관지은 것도 탈해의 모가 세오녀(비미호)의 적녀국 왕녀라 한 것과 연결되는 것이다.     


연오랑세오녀 설화 (延烏郎細烏女說話)는 까마귀는 해와 달을 상징하고 까마귀는 삼국사기에서 고구려(삼족오:세 발 까마귀)를 상징하고  백제, 신라, 일본 태양 여신 신화 모두를 잇는 상징물인 것이다. 여기에 <곡성> 속 까마귀의 상징성과  왜 외지인이 조류도감을 갖고 있었는지... 해와 달은 해, 즉 연오가 일본으로 가면서 달과 이별을 하고, 세오가 연오를 따라가며 다시 만났고, 그리하여 신라는 일월 무광이 되었고 그 사이는 한국은 무명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기에서 무명은 카오스로써 복잡하고 역동적인 패턴이 숨어있어 오히려 역설적으로 희망적이라고도 볼 수 있다. 영화 <곡성>에서는 한국에 일월이 빛을 잃었으니 '무명'이고, '일광'은 대신 일본에 빛이 있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세오가 짠 세초(細綃:생사로 가늘게 짠 천)를 <곡성>의 효진을 통한 생사를 가로지르는 종구의 행동일까?


종구는 마지막 단서인 일본인의 성교 장면이 담긴 우키요에(판화집)를 발견하고도 그것에 현혹된다. 

'우키요'(浮世)라는 말 자체를 풀이하면 '떠다니는 세상의 그림', 즉 현세의 이모저모를 그려낸 그림이라는 뜻이며, 지금의 도쿄에 해당하는 에도, 오사카, 교토 등지의 마을의 중심의 이곳저곳에 퍼져있던 현대풍의 새로운 문화들을 일컫는 말이었다. 이 말의 유래는, 똑같은 발음의 다른 말인 '우키요'(憂き世) - 즉 '근심 어린 세상'이라는 말이며, 불교의 극락정토와 대비되는 생로병사가 전개되는, 꺼리고 멀리해야 할 근심스럽고 걱정스러운 세상이라는 개념이다. 또한, 무사들이 무기를 놓아두는 곳에 춘화를 함께 넣어 놓으면 무기를 꺼내던 무사가 그것을 보고 웃게 되어 불필요한 싸움을 하지 않게 된다고 해서 춘화를 와라이에(笑繪)라고 부른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에도시대에 들어와 유행한 풍속화인 우키요에(浮世繪)는 반이상이 춘화였는데 이로 인해 춘화도 주술적인 용도에서 상업적인 용도가 파생되었다. 우키요에는 육필과 판화의 두 가지 양식이 있으나 서민층에게 널리 퍼진 것은 판화였다. 우키요에 그림 가운데 남녀 성행위를 묘사한 그림은 춘화라고 합니다. 춘화 역시 풍요와 생산을 가져다준다는 주술적인 이유로 많은 인기를 누렸다.  이와 같이, 종구는 뭐시 중헌지도 모르고 자신의 그릇된 의심을 의심하지 아니하고 자신의 의심이 옳다는 것을 확인하러 외지인이 머무는 곳에 갔기 때문이다. 


참고로, 우키요에는 메이지[明治] 시대(1868~1912)에 들어서면서 사진·제판·기계 인쇄 등의 유입으로 쇠퇴하였으나, 당시 유럽인들에게 애호되어 프랑스 화단에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우키요에는 19세기 중반부터 서양 미술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유럽 인상파 미술의 발달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반 고흐, 마네도 우키요에의 팬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19세기 중반 프랑스 미술은 일본 미술의 영향이 두드러졌다. 유럽 예술가들은 일본의 회화·조각·판화를 연구하면서 동양의 독특한 요소들을 그들의 작품에 응용했다. 마네의 대표작 중 하나인 <거리의 가수 La Chanteuse des rues>에서 일본 판화의 영향을 볼 수 있다. 이 작품에서 종 모양으로 둥글게 한 드레스를 평편하게 이차원적으로 채색하고 가장자리를 밝은 색으로 칠해 여인의 모습이 어두운 배경으로부터 두드러지게 보이게 한 효과는 일본 판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요소다. 이외에 반 고흐의 작품 '귀에 붕대를 감은 자화상'과 '탕기 영감의 초상', 에곤 실레의 그림에도 일본 판화의 영향을 찾아볼 수 있다.


민간에서는 악귀를 물리치는 도구로 사용하는 체가 외지인 집 방문 옆에 걸려있다. 섣달 그믐날 하늘에서 ‘야광귀’란 귀신이 내려와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사람들의 신을 신어보고 발에 맞으면 신고 간다고 한다. 이때 신발을 도적맞은 사람은 그해 1년 동안 액운에 시달리고 재수가 없다고 하여 생긴 풍속이지만 한국 조상들은 야광귀를 막기 위하여 기둥이나 마당에 높은 장간(長竿)을 세워 체를 걸어두면 야광귀가 하늘에서 내려와 체를 발견하곤 체의 눈이 많으므로 몇 개나 되나 헤아리다 자꾸 헷갈려서 밤새 체만 헤아리다 닭이 울면 미처 신발을 훔쳐가지 못하고 돌아간다고 했다. 해학이 있는 귀신 퇴치법이다. 하지만 그 시절 새 신발을 훔쳐가는 도둑이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그 신발 도둑이 바로 야광귀로 나타난 것이 아닌가 한다. 또한, 그의 집 안에는 복조리도 걸려있다. 복조리를 거는 풍속은 쌀을 일 듯 복을 인다는 상징성과, 조리의 무수한 눈이 나쁜 기운을 감시한다고 한다. 돌을 골라내 오복(五福)의 하나인 치아를 보호한다는 실용적 의미 등이 녹아 있다고 한다. 그래서 복조리는 값도 안 깎았고, 아무 집 마당에나 던져두고 나중에 조리 값을 받으러 가도 싫은 소리를 듣는 예가 드물었다. 그의 집안에 걸려있는 빗자루는 나쁜 액과 질병을 담아 없애는 제의용 도구로, 거리제를 지낼 때 액운이 낀 사람의 오쟁이를 만들어 개울이나 마을 밖으로 던져 한 해의 액운을 미리 막거나 떨쳐버리는 데 사용한다.


다시 정리하자면, 외지인의 집에서 발견한 노면의 노(能)의 세계관은 인간 존재의 무상과 각 개인이 극락에 이를 때까지 치러야 할 싸움에 대한 설교이며 이는 선불교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한다연오랑세오녀 설화 (延烏郎細烏女說話)는 해와 달을 상징하고 연오랑과 세오녀의 오는 까마귀를 의미하고 까마귀는 삼국사기에서 고구려(삼족오:세 발 까마귀)를 상징하고  백제, 신라, 일본 태양 여신 신화 모두를 잇는 상징물인 것이다. 여기에 <곡성> 속 까마귀의 상징성과  왜 외지인이 조류도감을 갖고 있었는지.. 춘화가 한 종류인 '우키요'(憂き世) - 즉 '근심 어린 세상'이라는 말이며, 불교의 극락정토와 대비되는 생로병사가 전개되는, 꺼리고 멀리해야 할 근심스럽고 걱정스러운 세상이라는 개념이다. 또한, 풍요와 생산 악귀를 물리치는 체와 빗자루, 그리고 복을 인다는 복조리를 집에 걸어놓았는지, 또한 저승과 이승 혹은 저승과 저승을 잇는 흑구가 왜 그 집을 지키고 있었는지는 일본 설화인 태양 여신 신화의 부모 이야기를 알면 외지인과 일광의 관계가 더욱 명확 해 진다. 


외지인과 일광의 관계: 이자나기와 아자나미의 관계


일본 신화에 따르면 이자나기는 신세 7대(神世七代)의 가장 마지막 신으로서 누이이자 아내인 이자나미와 함께 태어났다. 이자나미와의 사이에서 일본 열도를 형성한 많은 자식들을 낳았다.  그러나 이자나미가 불의 신가쿠즈치(軻遇突智, 가쿠즈치노카미迦具土神)를 낳다가 음부가 불에 데어 죽자 이자나기는 "한갓 이 아이 때문에 배우자를 잃었다"며 가쿠즈치를 칼로 베어버렸고, 가쿠즈치의 피와 사체에서 다시 신이 태어났다그녀를 요미노쿠니(黄泉国, 지하 세계)에서 구출하려고 이자나기는 지하로 내려갔지만, 자신의 맨 얼굴을 들여다보아서는 안 된다는 이자나미와의 약속을 어기고 이자나기는 이자나미의 얼굴을 보았다. 이자나미의 몸은 이미 부패해 구더기가 끓고 있었고 온몸에 야쿠사노이카즈치가미(팔뢰신八雷神)가 달라붙어 있었다. 그 구더기들은 팔뢰신(八雷神)의 화생(化生)이었다. 이자나기는 그만 두려워서 달아났고, 이자나미는 귀신들을 거느리고 이자나기를 쫓았다. 이자나기는 이자나미가 보낸 야쿠사노이카즈치가미며 요모쓰시코메(黄泉醜女)를 머리에 꽂고 있던 빗이며 죽순, 요미노쿠니 경계에서 자라고 있던 복숭아나무의 가지를 집어던지면서 따돌리고, 요미노쿠니와 지상의 경계인 요모쓰히라사카(黄泉比良坂)의 지상 쪽 입구에 큰 돌을 가져다 막아버리고 이자나미에게 완전한 이별을 고했다.

이자나미는 이자나기를 향해 「이런 짓을 한다면 너의 땅에 살고 있는 인간을 하루에 천 명씩 죽이겠다」고 외쳤고, 이자나기는 이에 「네가 그렇게 한다면 나는 하루에 천 오백 개씩 산실(産屋)을 짓겠다(즉 그 숫자만큼 다시 태어나게 하겠다)」고 대답했다(이것은 지상의 인간이 태어나면 죽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하는 신화이다). 이자나기와 이자나미의 이야기는 그리스 신화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의 신화와 유사한 면이 보인다.

이후 이자나기는 요미노쿠니의 부정을 제거하기 위해 지쿠시(筑紫)의 히나타(日向)의 기쓰노오도(橘の小戸)의 아와키하라(阿波岐原, 檍原)라는 곳(이곳은 오늘날 에다 신사가 세워져 있는 자리로 알려져 있다) 옆에서 목욕재계를 행했는데, 이때 그의 왼쪽 눈에서는 태양의 여신 아마테라스를, 오른쪽 눈에서는 의 신 츠쿠요미를, 그리고 코로는 폭풍의 신 스사노를 낳았다.


나홍석 감독의 상상력이 더해져 이자나기는 일광으로 그리고 누이이자 아내인 이자나미는 한국의 개안 설화와 혼합되어 딸인 효진과 외지인으로 <곡성>에 재탄생한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 즉, "이런 짓을 한다면 너의 땅에 살고 있는 인간을 하루에 천 명씩 죽이겠다"는 이자나미는 일광으로 그리고 "네가 그렇게 한다면 나는 하루에 천 오백 개씩 산실을 짓겠다"라는 이자나기는 외지인으로 표현된 것은 아닌지 추측해 본다.  무명의 입장에서 신들의 장난을 그만두고 볼 수만은 없었으리라. 그리하여 산실을 짓는 외지인마저 그녀에게는 둘이 한 패라고 생각이 되어지는 것이다. 또한 무명의 입장에서 이자나기가 왼쪽 눈에 태양의 여신 아마테라스, 오른쪽 눈에서 달의 신 츠쿠요미, 그리고 폭풍의 신 스사노를 곡성에서 낳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왜 종구가 외지인에게 3일 이내로 떠나지 않으면 개처럼 죽을 것이라는 협박에도 외지인은 대꾸하지 않았다. 왜? 이미 죽었으니까.


일광과 무명의 외지인 흔들기와 외지인에 관한 소문 퍼트리기


이자나기의 환생이신 일광의  거짓말은 효진이의 살을 날린다고 한 것에 있다. 그는 효진이를 향하여 돈을 받고 제물들과 그의 무복이 모두 백색이며 마치 마을 사람들을 도와줄 것처럼 행동하지만 실상은 그들을 향해 살을 쏜 것에 있다. 무명의 거짓말은 외지인인 일본 놈이 피를 말려 죽이려 한다는데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외지인 일본인은 한국인인 이자나기의 환생인 일광이 사람을 죽일 때마다 산실을 짓는 이자나미이다. 그 둘은 콤비가 맞으나 엄밀히 따지자면 정확한 표현은 아니다. 일광은 백색 제물, 특히 한민족과 관련이 깊은 닭, 백닭을 바쳐 사람을 죽이려 하는 자고, 외지인은 일광이 죽인 사람의 산실을 마련하기 위해 흑닭을 바치는 일을 한다. 하지만, 일월, 무명, 그리고 외지인 중에서 남에 대한 험담을 하지 아니한 자는 오직 외지인뿐이다. 외지인은 그가 곡성에 여행 온 목적을 말하지 아니했다. 그는 산 사람이 아님은 확실하다 그가 사는 집은 흑천 구가 지키고 있지 않나. 또한, 한국의 경우 시베리아 샤머니즘에서의 이승과 저승의 교류 및 명계(冥界:사람이 죽은 뒤에 간다는 영혼의 세계) 여행 (글쓴이: 이것도 중의적인 표현인 것이 감독은 조개껍질은 기독교에서 순례자, 즉, 여행자를 상징한다는 것을 외지인이 사용하는 조개로 만든 밥상을 사용한다는 점, 외지인이 이 곳에 무엇을 하러 왔냐고 물었을 때 '여행'이라고 답한 점 등..)이라는 독특한 신앙이 고대로부터 민간신앙의 기저에 깔려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는데, 이는 중국 등과 다른 한국만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근대 이후 기독교가 유입되면서 신앙에 바탕한 천당(천국)-지옥설이 광범하게 유포되어 더욱 복합적인 저승관을 형성하고 있는 것은 우리나라의 복합 종교상황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고 하겠다.  계세적 세계관, 무당이나 저승사자를 매개로 한 저승과의 교류관, 불교의 전생적 세계관, 기독교의 천당-지옥관 등 우리의 저승관은 역사적으로나 현재에 있어서나 매우 복합적이 다한다.


하지만 그가 선하고 악하다고 할만한 단서는 영화 속에서 존재하지 않고 그에 대한 악의적 이야기는 타인의 입에서 나오는 소문이거나 그들의 상상 혹은 꿈에 존재하는 두려움과 공포 그 자체였다. 그들의 두려움과 공포라는 것이 외지인을 핑계 삼아 나타난 현상들 뿐이었다. 그럼 외지인은 월광이었을까? 일광이 생명을 죽이는 역할을 하였다면 외지인은 죽은 생명을 살리는 역할을 하였을 수 있다는 추측이 또다시 나온다. 다시 한 번, 왜 외지인은 그가 곡성에 여행 온 목적을 말하지 아니하였을까? 그는 이미 곡성인들이 자신에 관해 악의적인 소문을 퍼트린다는 것을 잘 알고 있고, 그 소문은 시초는 어쩌면 무명과 일광에게서 나온 것일 수 도 있다. 그리하여 일광과 무명은 외지인에게 칼을 겨눈 것이다. 무명과 일광은 자신들의 신적 영역을 지키기려고...공성전~~


일광과 외지인의 무명 흔들기 


일광이 무명의 곡성을 외지인을 미끼 삼아 구렁이 담 넘듯이 은근슬쩍 성을 넘어왔고 그 자신이 이자나기의 환생이며 사람을 죽이는 역할을 하며 실상을 사람을 살리는 역할로 오인되었다면, 외지인은 곡성에서 이자나기의 화신인 일광을 맞받아치는  일을 하러 온 듯하다.  곡성에 사는 이들을 죽이고 그들의 산실을 마련하는 일은 무명에게는 공포 그 자체이며 마고 할머니가 만들어 놓은 질서 체계를 무너뜨리는 일 것이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막아야 했다. 외지인이 마지막에 한 일은 혹시 일본 전설에서  이자나기가 요미노쿠니의 부정을 제거하기 위해 지쿠시(筑紫)의 히나타(日向)의 기쓰노오도(橘の小戸)의 아와키하라(阿波岐原, 檍原)라는 곳(이곳은 오늘날 에다 신사가 세워져 있는 자리로 알려져 있다) 옆에서 목욕재계를 행한 수 그의 왼쪽 눈에서는 태양의 여신 아마테라스를, 오른쪽 눈에서는 의 신 츠쿠요미를, 그리고 코로는 폭풍의 신 스사노를 낳았다  는 것으로 보아 외지인 역시 박춘배를 통해 예행연습을 한 것은 아닌지 생각한다. 


여기에서 왜 처음 장면이 외지인이 두 개의 낚시 고리에 한 개의 지렁이를 꽂아 강물에 미끼를 던지는지 이해가 된다. 일광의 전신인 이자나미의 살생은 외지인의 전신인 이자나기에 의해서 시작된 일이기 때문이고, 지렁이는 한국의 개안 설화와 연관되었기 때문이다. 즉, 외지인이 일광과 곡성인/신을 낚으며 영화는 시작하고 일광은 외지인과 곡성인/신을 반대로 낚아 죄여 온 것이다. 다시 말해서, 외지인과 일광의 낚는 대상은 곡성 인과 무명이다.


일광이 처음 종구의 집에 들어와서 효진이를 살피고, 효진이는 일광의 눈을 피한다. 전생에 둘은 엄마와 엄마에 의해 죽임을 당한 가쿠즈치이자 아버지의 개안을 위한 희생물로 <곡성>에 환생했다. 일광과 외지인은 전생에 부부관계이고 그들의 계보는 외지인의 자녀이자 일본의 태양의 여신인 아마테라스를 상징하는 까마귀와 연관되어있다. 장독대의 간장독에 숨겨져 있는 까마귀를 보고 일광은 진상스러운 놈이라고 단정하고 원래 목표인 효진에게 살을 날리면서 오히려 효진이의 아버지인 종구에게 돈 1000만 원을 요구한다. 


그 후, 농사짓는 박춘배라는 사람이 그의 부인을 죽이고 나중에는 외지인에 의해 죽은 후 좀비 비슷하게 환생 후 종국과 그의 일당과의 한 판을 벌인 후 다시 즉사한다. 일본의 '신도'와 한국의 '제사'는 벼농사와 까마귀와 관련 있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와 같다. 


일본에서 ‘신도’라는 호칭은 기원 6세기에 토속종교를 당시 일본에 도입되던 불교와 구별하기 위해 생겨났다. ‘일본인의 종교’는 불교가 도입되기 전부터 존재하였지만, 관습과 ‘관례’로 이루어져 거의 의식되지 않은 종교였다.

‘고단샤 일본 백과사전’에 따르면 신도는 논에 벼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 생겨났다고 한다. 

이와 같은 숭배에 더하여, 죽은 사람의 몸을 떠난 영혼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그들을 달래기 위한 의례들이 생겨났다. 나중에는 조상의 영을 숭배하는 것으로 발전하였다.

전남에서는 지금도 상원에 보리밥을 나물들과 함께 그릇에 담아서 볏짚 가리나 담 위에 얹어 까마귀를 대접한다. 까마귀가 와서 먹는 일은 보기 어렵고 옛 관습대로 농사를 위해서 까마귀밥을 차린다고 한다. 전북에서도 약밥을 까마귀나 까치가 먹으라고 밖에 내놓은 것을 까마귀 제사 지낸다고 한다. 충북에서도 같은 보고가 있다. 제주도에서는 조상 제사 때에 으레 까마귀가 찾아오는 것으로 알고, 정식으로 모셔야 될 사람이 모셔지지 못한 제사를 “까마귀 모른 식개(제사)”라고 하는 속담도 있다. 까마귀는 후대에는 불길한 새가 되었지만, 한국에서도 상대(商代)에는 태양의 상징이기도 한 영조(靈鳥)였다. 『삼국유사』 이래의 오기일의 까마귀 제사, 까마귀밥들은 그러한 상대의 까마귀 모습의 한 잔영이다. 한반도에서도 영조(靈鳥)였던 까마귀가 후대에 불길한 새가 된 이유와, 연오와 세오의 일본 행도 관련이 있지 않나 추론한다. 


야마다 오토바이를 타고 나이키를 입는 중구와 훈도시(일본 전통 속옷)를 착용하고, 때로는 한복을, 때로는 나이키를, 때로는 양장을, 때로는 무복을 입는 일광은 왜 주 무기로 칼을 사용하는가? 그리고 곡성의 사람들은 왜 서로서로를 칼로 시해하는가? 일광이 굿을 할 때 주로 사용하는 제기는 칼이다. 


동아시아의 역사학자 존 카터 코벨(John Carter Covell·1910∼1996)은 초기에 신라 지역에서 건너간 이주민을 이끈 스사노오노 같은 무속적인 지도자는, 그보다 늦은 시기 경주 천마총을 만든 사람들과 같은 일파임라고 추정한단다. 스사노오노를 상징하는 신칼은 그가 머리를 베어 죽인 용의 꼬리에서 뽑아낸 것이라 한다. 이 칼은 ‘오로 시노 가라스키’, 다시 말해 ‘한국의 용검(龍劍)’이라고 불리고 이 칼은 일본 왕권을 상징하는 삼종 신기(三種神器)의 하나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코벨 박사는 일본 왕권의 상징으로, 이를 소유한 사람이 왕이 된다는 삼종 신기(三種神器)는 4세기부터 전해 내려왔고 그러한 전통은 전적으로 무속신앙과 연관이 있다 한다 (글쓴이 - 하지만 존 카터 코벨 박사는 연관성을 인과로 해석한다는 비판을 많이 받으니 연관이 있다는 것으로 고쳐 쓴 것임을 밝힌다).  

그중 하나인 동경(銅鏡)은 처음엔 중국에서 제작됐는데 이것은 신통력을 지닌 것이라 하여 죽은 자의 가슴에 놓인 채 사후세계를 위해 부장 되었다. 동경의 번쩍이는 기능은 고대 농경사회에서 일반화한 태양숭배와 통했다. 6세기 초 신라 금관에 달려 있는 조그맣고 둥근 금판도 태양을 뜻한다.

삼종 신기의 둘째 물건인 칼은 왕권의 상징으로 일찍이 신라에서 이즈모로 이주한 한국인의 권세와 관련이 있다고 코벨 박사는 주장한다. 이 특별한 칼은 맹렬남 바람신 스사노오노가 머리 8개 달린 용을 쳐부수고 얻어냈다. 

셋째 신기는 곡옥 또는 곡옥목걸이다. 곡옥은 일본에서 나지 않고 한반도 북부에서 나는 연옥이나 경옥을 깎아 만들었다. 고대에는 다른 신기보다 이 곡옥(일본에서 마가 타마라고 부른다)이 진정한 왕권의 상징이었다고 한다.  경주 고분에는 이런 곡옥이 수십 개씩 장식된 금관이 많이 부장 됐다. 곡옥은 태아나 올챙이와 비슷한 모습이다. 물고기는 아시아 전체에서 부의 상징이다. 그 위에 한국 무속에서 호랑이는 산신의 전령으로 중요한 존재이며 벽사(辟邪·요사스러운 귀신을 물리침)용으로 지니는 호랑이 발톱은 곡옥과 생김새가 같다. 그러나 곡옥이라 해서 모두 똑같은 것은 아니며 그중에는 곰의 발톱도 있다. 단군은 웅녀(곰 토템 부족의 여인)의 아들이며 아이누족은 곰을 신으로 받든다. 홋카이도의 아이누족은 지금도 곰 축제를 연다. 곡옥은 일본에서보다 한국에서 더 많이 발굴된 것으로 존 카터 코벨 박사는 말한다.


이러한 코벨 박사의 주장을 일광이라는 인물에게 적용해 보면, 위에서 언급했듯이 초기 신라 지역에서 이주한 무속인 지도자인 일광, 곡성인, 외지인은 모두 한 뿌리이다. 하지만 마고 할매가 탄생시킨 인류의 조상 중 일월을 상징하는 이들이 일본으로 건너갓다는 사건은 일광과 외지인과 계보가 겹치며, 사람을 죽이는 이자나미의 화신인 무광 역시 결국 마고 할매의 창조물이지만 인류의 원형을 찾지 못하고 외지인과 갈라져서 피 튀기는 싸움을 한반도 곡성에서 한다는 말이다. 그의 특이점은 그가 굿을 할 때 흰 백색의 한민족을 상징하는 닭 4마리의 목을 자르고, 마을을 지키는 색시 장승 가슴에 쇠침 4개를 그리고 두 눈에 각각 1개씩을 총 2 개를 박아 심고, 성경에서 최후 심판 때 심판받는 죄인의 상징인 흰 염소를 마지막 제물로 받치려고 하다가 효진의 괴로움과 요청으로 종구는 일광이 주관하고 관장하는 굿 의식을 멈추게 한다. 일광은 백 염소를 한 번 칼로 가격하였지만 죽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성경에서 염소는 심판받는 죄인의 상징으로 넓은 의미로 악마의 세력을 상징한다는 점에서  영화 <곡성>에서 악인은 일광인 것이다. 물론 그의 마지막 장면에서도 이것은 극명하게 드러나지만... 멈춰진 굿 판에 백 염소와 같이 우둑허니 서 있는 야릇한 얼굴 표정의 일광의 연기는 압권이다. 


반면에 저승세계에 살고 있고 이자나기의 현신이라 추정되는 신라 무속인 지도자와 연관 있는 외지인은

타이고라는 작은북 하나와 검정 닭을 매달아 놓고 이미 죽은 박재상의 사진에 굿을 한다. 비록 그의 굿이 무명에 의해 제지당했지만, 죽은 박제상을 좀비로나마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외지인에게는 있다. 


흥미로운 점은, 마을에서 행한 굿판이 더 잔인하고 스케일이 크지만 영화 <곡성> 속 마을 사람들은 외지인의 굿판을 더욱 공포스럽게 느끼는 것 같다. 생각해 보면 무명이 걸치고 있던 박재상 옷, 술집 작부의 카디건, 그리고 효진이의 머리핀은 외지인의 저승에서의 굿 목록에 올려져 있지 않나 하는 추측을 해 본다. 그리하여 무명은 필사적으로 외지인을 마을에서 몰아내려 한 것은 아닐까? 혹은 외지인이 그 셋을 통하여 일본 신화에서 그의 왼쪽 눈에서는 태양의 여신 아마테라스를, 오른쪽 눈에서는 의 신 츠쿠요미를, 그리고 코로는 폭풍의 신 스사노를 낳았다 했다. 그는 태양의 여신, 달의 신, 그리고 폭풍의 신을 곡성 안에서 재현하려 했을 수 있다. 왜 박재상이고 이 이름을 세 번이나 강조해서 불렀을까? 그 시작이 박씨이고 재상이다. 혹여 재상은 재상(宰相)을 의미하는 것인가? 외지인과 박재상은 영화상에서 죽었으되 내부자의 외부자인 일광은 살아있다는 것을 명심하여야 한다. 그의 겉 옷은 한복이나 그는 훈도시를 착용하고 있다. 옷 속 깊숙한 곳에. 비록 그가 촛불 하나의 꺼짐과 죽음을 알리는 까마귀를 피해 달아나지만, 부활을 알리는 나비 때를 맞이함으로써 다시 곡성으로 돌아와 그의 임무를 완수하려 했고 그는 아직도 살아있다. 하지만, 아직 무명은 마을 안에 편재하고, 효진이도 살아있고, 효진이의 아버지는 그 자신이 예수가 되어야 함을 깨달았다. 그 자신이 해결할 것이다. 그는 말했다. 효진아, 효진아, 효진아~, 효진아, 효진아, 효진아~~~, 효진아~~ 괜찮애...  아빠가 다 해결할껴, 아빠가~~


마지막으로, 경찰 종구는 가톨릭 부제인 양이삼과 동료 오성복을 낚는다. 가톨릭 부제는 처음 외지인의 집을 종구와 양이삼과 함께 방문하였을 때, 불법 가택 침입과 수사를 비난하였다. 그때,  왜 하필 가톨릭 부제가 천구(검정개)에게 물렸을까? 그리고 부제는 왜 외지인의 시선을 피하는 것일까? 삶과 죽음을 기록한 외지인의 집 사진들... 명부전의 명부전의 의미는 무엇일까? 부제는 이미 한 종교에 몸을 담고 있는 사람이다. 그는 죽은 후 또다시 살아난 박재상에게 얼굴 한 부분을 뜯긴다. 병원에 있는 동안, 그는 외지인과 악마, 그리고 괴물을 연상한다. 또한, 외지인의 실체를 찾아 동굴에 들어갈 때 그는 묵주와 함께 낫을 들고 간다. 여기에도 각 각 물건에 중의성을 갖는다. 묵주를 돌리며 기도하는 사도신경은  전능하신 천주 성부 천지의 창조주를 저는 믿나이다.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님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 마리아께 잉태되어 나시고 본시오 빌라도 통치 아래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저승에 가시어 사흗날에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하늘에 올라 전능하신 천주 성부 오른편에 앉으시며 그리로부터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믿나이다. 성령을 믿으며 거룩하고 보편 된 교회와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으며 죄의 용서와 육신의 부활을 믿으며 영원한 삶을 믿나이다. 아멘.이다. 그리고 <곡성>의 마지막 동굴 속 대화 내용은, "내가 누군지 내 입으로 아무리 말해봤자 네 생각은 변하지 않을 거야. 넌 내가 악마라는 의심을 확인하러 온 거야."라는 말에 부제는, "만약에 네가 지금 악마가 아니라고 솔직히 정체를 밝힌다면 그냥 돌아가겠다." 그러자 "누가 널 그냥 보내 주겠대? 여길 내려가고 말고는 니 의지가 아니다"이다. 이는 묵주기도 할 때 읊는 사도신경의 답이다.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그리하여 그 동굴에서 내려가고 말고는 부제의 의지가 아닌 것이다. 부제는 종구와 마찬가지로 심판을 받아야 한다. 왜? 마음에 의심이 일어났기 때문에... 또한, 우리는 부제를 죽음의 신으로 볼 수도 있다. 죽음의 신 또는 사신 (死神) 은 인간을 비롯한 생물의 죽음을 인도하거나 관리하는 신으로, 저승사자라고도 한다. 가장 대표적인 형태인 낫과 검은 망토, 후드를 걸친 해골의 모습을 한 서양의 사신은 15세기부터 등장하여 현재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으며, 성경에서 유래된 "죽음의 천사"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사신에게는 자의적으로 사람의 목숨을 빼앗을 권한이 없으며, 그저 임종을 맞이한 자의 영혼을 육신으로부터 단절시키고 저승으로 인도하는 역할만을 수행한다고도 한다. 그가 부제임과 동시에 죽음의 천사라는 의미도 기저에 깔려 있을 수 있다. 왜 하필 낫을 들고 갔냐 이 말이다. 또한, 왜 외지인의 집에서 외지인의 눈을 피했는지... 동굴 속 존재도 악마 혹은 예수 일 수 있는 민간의 순환적 사고(循環思考)와 혼돈의 카오스 상태이나 복잡한 패턴이 있는 그런 상황을 연출하였다. 여기에서 패턴은 분명하다. 부제가 살아 있는 자건 죽은 자건 그는 의심을 하였다. 그리하여 동굴 속에서 나가냐 나가지 못 하냐는 그의 의지를 벗어난 것이다. 또한, 종구의 마지막 말 효진아,  아빠 옆자리 꼭 올껴,  아빠가 다 해결할껴, 아빠가~~ 라는 말은 꼭 자신이 천주 성부이며 효진이가 천주 성부 오른편에 앉을 것을 심판하는 마지막 말로 교차하여  비록 일광에게 속았으나 속지 않은 것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누가 무명이 놓은 덫을 파괴할 수 있는가?


두려움과 공포에 사로잡힌 인간은 바른 판단을 할 수 없다. 두려움과 공포에 사로 잡히면 의심하여야 할 때 믿고, 믿어야 할 때 의심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빠진다. 두려움과 공포는 자연의 상태인 무명, 즉, 자연스럽고 복잡하고 역동적인 패턴이 있는 현의 상태를 비 자연스럽게 음/양 혹은 빛과 어둠으로 가르고, 악마와 천사로 가르는 이분법적인 사고에 젖어들게 한다. 우리가 효진이가 집어삼킨 지렁이의 의미를 조금이라도 깨닫는 다면 무명이 덫 놓은 용의 입과 닮은 금어초(Snapdragon)를 집집마다 걸어 놓은 수고로움을 조금이라도 덜어줄 수 있을 것이다. 비록 무명이 일광과 악마를 물리치는 덫을 놓을 수는 있으나, 이 덫을 허무는 자는 오직 살아있는 사람, 즉 종구이다. 금어초가 시들면 해골 모양으로 말라버리지만  언젠가는 용의 입 모양으로 각자 마음에 걸려 있는 무명의 금어초를 꽃피우길 기대해 본다. 무명도, 일광도, 외지인, 종교인도 아닌, 오직 바른 지식과 바른 판단을 하는 사람만이 지렁이에서 용으로 거듭날 것이며, 마음의 금어초를 용으로 꽃 피울 수 있다. 


하늘에서 무명의 곡소리가 들린다. 김기덕 감독의 <봄...>으로 덜 낚였어, 애들이 못 알아 들었다. 2 중대로 나홍석 네가 해봐! 그리하여 무명은 김기덕 감독과 나홍석 감독을 낚았다. 하하하... 아마도 3중대로 다시 9월 발표될 김기덕의 <그물>로 낚임을 완성 짓지 않을까 예측해 본다. 


<김기덕 감독 영화 리뷰 모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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