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에서 저는 공부를 잘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으로 배운 것을 오래 기억하고 깊이 이해하는 힘을 꼽았습니다. 그런데 ‘기억력이 좋다’고 하면 많은 사람이 먼저 떠올리는 모습이 있습니다.
마치 사진을 찍듯 머릿속에 모든 것을 그대로 저장하는 능력 말입니다. 한 번 본 것은 절대 잊지 않고, 컴퓨터의 스크린샷처럼 그대로 펼쳐지는 기억. 놀라운 기억력을 가진 사람을 소개하는 TV 프로그램에서도 이런 장면을 종종 볼 수 있지요. 그래서 우리는 “나도 저런 능력을 갖고 싶다”라고 생각하곤 합니다.
하지만 뇌과학의 관점에서 보면 이런 방식의 기억은 현실과 거리가 멉니다.
한 번 어제 저녁에 무엇을 먹었는지 떠올려보세요. 혹시 외식을 했다면 어느 식당에 갔는지도 생각해보세요. 머릿속에 어제 본 식탁의 모습이 사진처럼 그대로 펼쳐지나요? 아마 그렇지 않을 겁니다.
대부분은 저녁 식사와 관련된 맥락부터 떠올립니다. 예를 들어 저는 어제 TV 드라마를 보며 치킨을 먹었는데, 광고에서 본 모습이 먹음직스러워 주문했던 기억이 납니다.
작년 이맘때쯤으로 거슬러 가 볼까요. 여자친구와 1주년을 기념해 근사한 곳에서 식사했지만, 처음에는 정확히 어떤 식당이었는지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대신 식사 전 꽃을 사러 꽃집에 들렀던 일이 먼저 생각났고, 그 기억을 따라가니 프랑스 요리 전문 레스토랑이었음을 천천히 떠올릴 수 있었습니다.
공부도 마찬가지입니다. 저 역시 의대 수석을 해봤지만, 책에서 본 내용을 페이지 그대로 기억하지는 못합니다. 대신 공부한 개념과 이미지가 퍼즐 조각처럼 머릿속에 남아 있다가 필요할 때마다 조합될 뿐입니다. 이 퍼즐 조각들은 고정된 틀이 없어서 기억을 꺼낼 때마다 새롭게 조립되고, 그래서 매번 조금씩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이제 아시겠지요. 기억은 한 번에 통째로 재생되지 않습니다. 조각난 단서를 하나씩 찾고 이어 붙이는 과정, 바로 퍼즐을 맞추듯 재구성하는 방식으로 떠오릅니다.
이 점이 바로 기억에 오래 남는 공부법의 핵심입니다. 공부한 내용이 사진처럼 떠올라야 한다는 생각은 버리세요.
해부학 교과서 128쪽의 내용을 통째로 외운 사람조차 그 페이지를 사진처럼 머릿속에 한눈에 펼쳐놓을 수는 없습니다. 가능해 보이는 경우라면 대부분 과장되었거나 특이 사례일 가능성이 큽니다.
기억은 사진이 아니라 퍼즐입니다. 교과서를 통째로 외운다 해도 결국은 그림과 표 같은 수많은 조각을 연결해 재구성하는 과정일 뿐입니다.
이 퍼즐 비유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일깨워 줍니다. 무작정 여러 번 읽는 단순 반복이 왜 비효율적인지, 그리고 어떻게 해야 더 효율적으로 공부할 수 있는지를 알려 주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뇌과학을 새롭게 공부해 보고 싶다고 합시다. 두 가지 방법이 있을 겁니다.
1.뇌과학 입문서를 한 권 정해 20번 읽기
2.뇌과학을 주제로 한 책 20권을 한 번씩 읽기
어떤 방식이 지식을 더 깊이 이해하고 오래 기억하는 데 도움이 될까요? 당연히 후자입니다. 그 이유는 세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1. 다양한 설명과 예시를 접할 수 있다.
비슷한 주제라도 표현 방식과 사례가 조금씩 달라 같은 개념을 여러 각도에서 바라보게 되고, 자연스럽게 깊이 이해하게 됩니다.
2. 연결 고리가 많아진다.
한 권을 반복해 읽으면 그 책 안의 이야기만 반복되지만, 여러 책을 읽으면 서로 다른 내용이 엮이며 기억을 지탱하는 네트워크가 더 촘촘해집니다.
3. 스스로 정리하고 비교하는 과정이 생긴다.
책마다 강조점이 다르기 때문에 “이 부분은 공통이고, 이 부분은 서로 다르구나” 하며 자연스럽게 비교·정리하게 되고, 그 자체가 기억을 단단히 고정시킵니다.
퍼즐로 비유하자면, 한 권을 여러 번 읽는 것은 퍼즐을 단 한 조합의 세트만 가지고 계속 조립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공부하면 퍼즐의 한 조각만 잃어버려도 복구가 어렵습니다. 기억도 그만큼 휘발되기 쉽지요. 반면 여러 책을 읽으면 서로 다른 세트의 조각을 풍부하게 갖게 되므로 한 세트가 사라져도 다른 조각을 이용해 기억을 다시 조립할 수 있습니다. 더 단단하고, 깊이 있는 기억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영어 단어 advocate를 외운다고 해봅시다.
‘advocate = 지지하다’를 계속 되뇌는 것은 뇌과학 책 한 권을 20번 읽는 것과 같습니다.
반면 이렇게 학습하면 다릅니다.
사전 정의: to publicly support or suggest an idea, development, or way of doing something
“Advocate는 무언가를 지지하거나 제안하는 의미를 갖고 있구나!”
예문:
•She advocates taking a more long-term view.
•He advocates the return of capital punishment.
•We will continue to advocate for a regional, cooperative approach to the construction project.
‘사전 정의에서처럼, Advocate는 무언가를 지지하거나 제안하는 맥락에서 쓰이는군.’
이처럼 다양한 맥락 속에서 단어를 익히면 ‘지지하다’라는 한국어 뜻이 바로 떠오르지 않더라도 예문과 상황을 통해 단어의 의미를 쉽게 복원할 수 있습니다. 즉, 퍼즐 조각을 많이 확보한 학습이 되는 것입니다.
앞선 뇌과학 공부도 마찬가지입니다. 책 한 권으로만 공부하는 것보다 여러 책을 한 번씩 읽는 것이, 책으로만 공부하는 것보다 강의·논문 등 여러 학습 매체를 활용하는 것이 기억에 오래 남고 훨씬 재미있습니다. 기억은 사진이 아닌 퍼즐입니다. 퍼즐 조각을 늘리는 공부를 해야 합니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너무 오래 걸리잖아요. 그냥 같은 걸 여러 번 보는 게 더 빠르지 않을까요?”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아마 대부분 시험장에서 한 번쯤 이런 경험이 있을 겁니다. 분명 열심히 외웠는데 막상 문제를 보면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시험이 끝난 뒤 교과서를 다시 펼치면 희한하게도 갑자기 모든 내용이 기억나죠. 교과서라는 단서가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단서가 사라지는 순간, 기억은 고립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반복해서 보게 되고, 결국 더 많은 시간을 들이고도 다시 잊어버립니다. 그때마다 ‘아직 덜 외웠어’라고 생각하며 다시 교과서를 펼치게 되지요.
이처럼 단순 반복 암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 한계가 더욱 두드러지는 경우가 있는데, 바로 공부해야 할 내용의 범위가 많을 때입니다. A, B, C, D, E처럼 서로 완전히 다른 주제로 나뉜다면 단순 반복이 그럭저럭 효과를 낼 수 있습니다. 특히 객관식 시험처럼 선지에서 정답이 분명히 구분되는 경우가 그렇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주로 걱정하는 시험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공부해야 할 내용이 훨씬 복잡합니다. A라는 주제만 해도 그 안에 A1, A2, A3, A4가 있고, A와 B 사이에는 복잡한 인과관계가 숨어 있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의대에서 배우는 혈관염은 혈관에 생기는 염증 질환을 의미하는데, 그 종류가 침범하는 혈관의 크기(대혈관·중혈관·소혈관)와 원인, 증상에 따라 무려 스물아홉 가지 이상으로 분류됩니다. 과연 이 모든 내용을 사진처럼 기억해 시험 문제를 정확히 맞출 수 있을까요? 아마 여덟 번째 혈관염을 공부할 즈음에는 앞서 배운 일곱 가지가 머릿속에서 서로 뒤섞여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공부해야 할까요? 앞서 말씀드렸듯이 기억은 퍼즐입니다. 우리는 기억을 조합할 수 있는 퍼즐 조각을 늘려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더해, 각 기억에 해당하는 퍼즐 세트가 뒤섞이지 않도록 명확히 분류하고 구조화하는 방법을 익혀야 합니다. 이제부터는 퍼즐 조각을 늘리고 정리하는 구체적인 방법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