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홀러의 묵직한 짐보따리 이야기

프롤로그

by 위니 더 조이

마이너스 31도, 체감 온도 마이너스 39도. 오늘 캐나다 위니펙의 날씨다, 실화냐.


날씨가 끔찍하게 추울수록 아이러니하게도 위니펙의 하늘은 맑고 청량하다. 오일 파스텔로 칠한 것처럼 푸른 하늘에, 깃털처럼 가벼운 흰 구름이 동동 떠 있다.


줄줄이 서 있는 뾰족한 지붕 위로 눈이 생크림처럼 쌓여 있고 맨 땅은 역시나 눈에 뒤덮여 보이지 않는다. 며칠 전 블리자드 경고가 떴을 땐 창문이 떨어질 것처럼 흔들리더니 다행히 오늘 바람은 잠잠하네.


이런 날씨에 밖에 나간다면 숨을 쉴 때마다 콧구멍에 고드름이 맺힐 것이다. 농담 아니고 정말이다. 들숨에 코털이 바짝 얼어붙고 날숨에 얼어붙은 코털이 녹는 게 실시간으로 느껴진다. 스키 바지를 바지 위에 입지 않으면 냉장고에 있는 냉동육의 심정을 절로 이해하게 된다. 털 달린 부츠는 필수다.


결심했다. 오늘은 밖에 나가지 않을 것이다.


6일 만에 갖는 쉬는 날이다. 10시까지 늘어지게 늦잠을 자고 일어났다. 오늘 같은 날 세수는 사치다. 대충 눈곱만 떼고 커튼을 열어재꼈다. 방 안으로 환하게 들어오는 햇살이 나쁘지 않다. 잠시 지난밤의 개꿈을 회상했다. 일하고 있는 호텔의 인도인 매니저가 한국어 교정을 시키는 이상한 꿈이었다. 이제 꿈도 글로벌로 꾸다니, 위니펙 사람 다 된 기분이다.


오늘의 계획은 집 청소였다. 근데 일단 냄비에 물을 부었다. 어제 퇴근 후 밥을 안 먹고 잤더니(백만 년에 한 번 있는 일이다) 배가 몹시 고팠다. 중국 식자재 마트에서 산 마라탕 육수용 블록을 넣어 팔팔 끓이고는, 냉장고를 열어 눈에 보이는 재료들을 다 때려 넣었다. 방울 양배추, 부추, 소시지, 바사 생선, 대패 삼겹살, 푸주, 우동 사리. 냉장고 비우기에 마라탕만 한 게 없다. 곧 집구석구석 마라탕 냄새가 퍼지기 시작했다. 한 입 먹는 순간, ‘크’ 감탄이 절로 나왔다. 맵고 짠 게 역시 최고로 맛있다.


다시 눕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방청소를 더는 미룰 수 없을 것 같았다. 수면 양말이 바닥 여기저기 널려 있고, 이불은 크루아상처럼 돌돌 말려 있었다. 베개와 룸메 ‘캐구’에게 빌린 전기 이불이 한구석에 처박혀 있고, 동료 ‘캐롤’이 준 스탠드 조명은 책상이 아닌 매트리스 머리맡에 있었다. 문고리에 걸어 뒀던 산타클로스 인형이 불쌍하게 바닥에 엎어져 있고.


책상이 가장 심각했다. 로션. 핸드크림과 면봉, 일기장, 테무에서 산 스티커, 머리끈 따위의 잡동사니가 널려 있고, 읽어본답시고 구매한 원서들이 방치되어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다. 책상의 한구석을 차지한 미니 화장품 냉장고는 언제 열어 봤던가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손목이 쑤실 때마다 붙이는 파스, 한국에 부치려고 샀지만 결국 쓰지 못한 크리스마스 카드, 넷플릭스 보면서 심심할 때마다 야금야금 입에 털어 넣었던 시리얼이 든 통 등.


눈에 보이는 것뿐이랴. 벽장 안에는 매일 출석 도장을 찍는 새컨드핸즈 숍에서 산 가방이며 바지, 티셔츠, 원피스, 치마 등이 한가득이다. 그것뿐이면 좋겠다만, 폼롤러, 프로젝터, 그만둔 취미인 뜨개실과 바늘, 물감, 토끼 인형과 곰 인형, 고장 난 전기요, 공부한답시고 산 영어 교재, 누군가에게 받은 매니큐어 세트……. 헉헉, 숨이 찬다, 차. 심지어 부엌과 화장실 그리고 가구들은 언급도 못했다.


이상하다. 1년 7개월 전, 이곳에 올 때는 이민가방 하나에 캐리어 2개 그리고 배낭 하나에 정말 필요한 것들만 넣고 왔는데. 티끌을 너무 모았더니 어느 순간 짐을 산처럼 이고 살고 있었다. 큰일이다. 영주권 따기가 하늘의 별따기가 되면서, 돌아갈지도 모르는데 이렇게 짐이 늘어버리다니.


버리려고도 했다. 중고 상점에 기부하려고도 했다. 근데 또 어떻게 버려? 위니펙의 추억이 가득 담겨 있는데. 일단 챙겨, 일단 둬. 혹시 몰라, 여기에 필요할지, 저기에 필요할지. 이걸 보면 위니펙에 처음 도착했던 날이 생각나고, 저걸 보면 위니펙이 몹시 푸르렀던 여름날이 생각난다.


물건을 하나하나 볼 때마다 책을 한 장 한 장을 넘기는 느낌이다. 나는 물건을 이고 사는 게 아니라 이야기를, 아니 그냥 위니펙을 이고 사는지도 모르겠다.


언제 홀라당 이 많은 것들을 두고 돌아갈지도 모른다. 그러니 일단은 하나씩 품에 끼고 살며 가끔 들여다보기로 한다. 그러다가 때가 되면 후련하게 보내주기로 한다.


자, 이제 미루기 그만. 정말 청소를 시작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