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왜 내 얼굴은 물들지 않았을까
내 생애 세 번째로 치른 수능이 끝나고 며칠 지나지 않은 11월 어느 날,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혹시 수학학원에서 알바할 생각 있어? 내가 다녔던 곳인데…"
한 가지 조건이 있었다. 바로 다음 날부터 아르바이트를 시작해야 한다는 것. 잠시 고민에 잠겼다. 또다시 큰 일을 치러낸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아르바이트람. 아냐, 미리 생활비라도 벌어두는 게 낫지. 타지생활하려면. 길지 않은 갈등을 끝내고 나는 친구에게 문자를 보냈다.
내일 몇 시에 가면 돼? 학원 위치는?
학원은 자전거를 타고 가면 집에서 15분 정도 걸리는 곳에 있었다. 아침형 인간은 죽어도 못 될 내게 느지막한 출근 시간도 매력적이었고, 굳이 거절할 이유도 없었다. 어차피 집에 틀어박혀 있어봐야 좀만 쑤실 것 같았다. 내 확답을 들은 친구는 선생님께 잘 말씀드려놓겠다며 갈무리했다.
이튿날 오후 5시 30분, 나는 학원 문 앞에 서서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다. 지금도 크게 달라진 건 없지만 워낙 소심하고 걱정이 많아서, 훅하고 지나갈 첫 인사까지도 정해놓고 난 다음에야 긴장을 풀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안녕하…"
내가 혹시 늦을까봐 걱정되셨던지, 선생님께선 나를 연결해준 친구와 통화를 하고 계셨던 모양이었다. 그 당시 염색에 맛을 들여 새빨갰던 내 머리는 통성명 없이도 내가 그 알바생이란 사실을 말해주었고, 나는 들어가자마자 파란색 색연필을 들고 오른쪽 구석에 앉게 되었다.
"안녕! 지금은 좀 바쁘니까, 우리 이따 얘기하자잉? 다 매기면 고 위에 아들 이름 보고 부르면 된다! 알겠제?"
시원, 화통한 선생님께서는 첫 인사를 잠시 미룬 채 내게 프린트 묶음을 건네주셨고, 나는 상황을 보아하니 속도가 생명인 타이밍 같아 서둘러 색연필을 움직였다. 제일 위에 올려져 있던 프린트를 다 매긴 후 프린트의 주인 이름을 불러주어야 하는데, 아뿔싸, 이 지렁이들은 뭔가.
규민…? 규찬…?
어떻게 '민'과 '찬'이 겹쳐보일 수가 있을까 황당하면서도, 얼른 이름을 부르고 주인을 찾아줘야 다음 프린트를 매기기 시작할 텐데, 조급해졌다. 일단 찍자. 그리고 크게 외쳤다.
"규찬이!!!!"
"……"
그리고 규찬이는 나타나지 않았다. 내 목소리가 작았나?
"규찬이!!!!!!!!"
"규찬이가 여 어딨나? 아이고, 규민인갑다. 규민아!!! 글씨 쫌 예쁘게 써라!!! 누나가 몬 알아본다!"
규찬이, 아니 규민이는 비실비실 웃으며 프린트를 받으러 나에게 다가왔고, 다른 아이들, 심지어 선생님도 웃음을 참지 못해 잠시 학원 전체가 들썩거렸다. 평소라면 얼굴이 머리색만큼 새빨개졌어야 할 나인데, 어쩐지, 그냥, 좋았다. 작은 해프닝 하나로 구김살 없이 웃는 아이들, 아직 인사도 채 못 나눴지만 벌써 정감가는 선생님. 아담한 학원의 그 분위기.
방학마다 파란 색연필을 손에 쥘 3년이 '규찬이'로 시작된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