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좋든 싫든, 어디서 어떻게 주입됐는지도 모르는 선입견들을 몇 가지씩 달고 살기 마련이다. 어릴 적 내가 그 속에 갇혀 있다 겨우 깨고 나온 편협한 고정관념은 대개 이런 것들이었다.
모든 부모님은 자식에게 자기희생적이다
장애가 있는 사람들은 늘 긍정적이며 심성이 곱다
부자들은 욕심이 많고 이기적이다
물론 자라오면서 이런저런 사람을 만나고 다양한 일을 겪는 만큼 근거 없는 이 명제들이 진실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됐고, 그렇다고 정반대의 말들이 항상 진실일 수 없다는 것도 안다. 개개인의 인격에 부모의 역할, 장애, 재력 같은 요소들이 얹어질 뿐. 이분법과 일반화는 얼마나 편리하며 위험한가. 하지만 얼마나 더 많은 맹신들이 아직도 남아 내 시선을 굴절시키고 있는지, 앞으로 얼마나 더 깨우쳐야 세상을 맨눈으로 볼 수 있을는지, 잘은 모르겠다.
시내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 자전거로 30분이면 주파할 수 있는 작은 도시. 고향은 아니지만 나는 그곳에서 쭉 자랐고, 파란 색연필을 쓰는 학원도 물론 그곳에 있었다. '규찬이'로 첫 단추를 꿴 소도시의 아담한 학원. 나는 아마 나도 모르는 사이에 '소도시의 아담한 학원'에 어울리는 적당한 이미지를 그렸던 것 같다.
당시 학원을 다니던 학생들 중에 유한이라는 초등학교 6학년 남자아이가 있었다. 평소에 튀는 말이나 행동을 하는 아이도 아니었고, 활달하기보다는 조용한 편이었다. 그런데 하루는 출근하자마자 피부에 와 닿는 학원의 공기가 심상치 않았다. 알고 보니 유한이 때문이었다. 글쎄, 이렇게 이야기하는 게 맞을까? 아무래도 조금 바꿔 쓰는 게 맞겠다. 유한이 때문이라기보다, 유한이 아버님 때문이었다.
그날 유한이는 꾸지람을 받아들일 기분이 영 아니었던지 혼을 내는 선생님께 불량한 태도로 따박따박 말대답을 한 것 같았다. 유한이와 선생님 사이에 한바탕 폭풍이 지나간 뒤에 선생님은 그 폭풍에 대해 부모님과 긴히 이야기를 주고받고 싶어 하셨지만 선생님과의 통화에서 아버님이 남기셨다는 한 마디는, 적잖은 충격파를 몰고 왔다.
제가 드린 학원비에 인성교육비까지 포함된 건 아니지 않습니까?
선생님은 분노의 화염에 휩싸였다. 수십 년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이런 일은 처음이라며, 하루 내내 그 불길을 가라앉히지 못하셨다. 그 옆에 앉아 있는 나는 차마 선생님께 해드릴 수 있는 말을 찾지 못했다. 학원비에 인성교육비까지 포함된 건 아니지 않느냐고? 여기다 대고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인성교육 미포함 교육비'치고는 그 비용이 갑자기 비싸게 느껴지셨던 모양인지 유한이 아버님은 그 다음 날부터 아들을 학원에 보내지 않으셨다.
"공부나 잘 가르치면 됐지, 제 자식 인성교육에는 왜 참견이신지?"라는 식의 항의는 아주 큰 대도시에서나 가끔 있을 법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세상 어디든 별의별 사람들이 한 데 모여 사는 건데, 대도시·소도시 가려 생각한 내 편견이었다. 차라리 말투까지 드셌다면 그 충격이 덜했을까? 짐짓 점잖은 말투로 인성교육비를 운운하시니, 곱씹어볼수록 점입가경이었다.
학원이 아닌 학교에서 일어난 일이었어도 그렇게 전개될 일이었는지, 가끔 생각해본다. 아이들이 '사회화'를 겪고 체화해나가는 조직과 사회집단에 학교는 포함되고 학원은 포함되지 않나? 학원은 지식과 문제 푸는 기술을 사고파는 시장이니 그 이상은 학원의 몫이 아니라고 치부하면 되나? 아이와 함께 동네 재래시장에 가서 콩나물 한 봉지를 사더라도 그렇진 않을 텐데. 안녕하세요 해야지, 감사합니다 잘 먹겠습니다 해야지. 아이가 콩나물 사는 법을 보고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과정에서 다른 사람들과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를 보고 배우는 것 역시,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결론을 낸다면 내가 고리타분한 걸까. 아니, 난 내가 고리타분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언젠가 다시 "제가 드린 학원비에 인성교육비까지 포함된 건 아니지 않습니까?" 같은 말을 만나게 된다면, 그래서 이렇게 되묻고 싶다.
학원은 지식과 기술만을 팔고, 콩나물 장수는 콩나물만 팔아야 한다고요? 그렇군요. 그러면 인성교육은 어디 가서 얼마 주고 사면 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