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공부를 잘해야 할 필요는 없다
확실히, '타고나는 재능'이란 게 있다. 당연히 공부도 그렇다. 높은 성적을 내는 데 필요한 성향, 습관, 두뇌 같은 요소들을 애초에 타고난 친구들과 똑같은 의무교육을 따라갈 때, 그래서 유독 어려움을 겪는 친구들이 있다. 누구나 100미터를 10초 안에 주파해야 할 필요는 없듯, 누구나 해돋이의 인상을 캔버스에 담아낼 수 있어야 할 필요는 없듯, 누구나 공부를 잘해야 할 필요는 없다. 다만 중요한 건 단 한 번만이라도 100미터를 죽을힘을 다해 뛰어보는 경험, 내가 보고 느낀 바를 있는 그대로 백지 위에 옮겨보려는 경험, 어렵게만 느껴지던 한 과목을 파고들어보는 경험, 그 경험들이다. 나는 누구나 똑같이 받는 교육의 의의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떠오르는 한 친구가 있다. 사실 그 친구의 이야기를 쓰기 위해 앞서 재능, 그리고 교육에 대한 내 생각을 주절거린 것이다. 그 친구는 웃는 입매가 아주 예뻤다. 생각할 때마다 그 웃는 입매가 떠오르는 걸 보면 그 친구는 늘 그렇게 웃는 상이었나보다. 항상 그 친구의 진도 책이며 프린트를 매기면 그 위에 파란 소나기가 죽죽 내렸는데도 말이지.
그 친구의 이름은 세은이었다. 중학교 3학년이었고, 학원을 다니기 시작한 건 2학년과 3학년 사이의 겨울방학 즈음이었던 것 같다. 방학 기간에 학원 수업은 보통 이렇게 이루어졌다. 4~50분 정도 되는 한 학년 공통 수업이 끝나면 수업을 들었던 아이들이 강의실에서 쏟아져 나와 그날 배운 내용의 문제들을 풀고, 나에게 채점을 받고, 오답을 고치고. 그 사이에 그다음 학년 공통 수업이 강의실에선 이루어지고, 또 한 무리의 아이들이 나와서 자리를 채우고, 또 다음 학년 아이들의 수업이 시작되고……. 그렇게 몇 타임의 수업이 끝나도록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오답을 고쳐도 끝내 집에 가지 못한 아이들은 10시까지 남아 할 수 있는 데까지 다 마무리를 하고 가야만 했다. 세은이는 밤늦게까지 남아 있는 단골 멤버였다.
수학 공부가 등산이라면 세은이는 기초 체력부터 뒷받침되지 않았다. 흔들리는 기본 연산에 16의 제곱근과 제곱근 16의 차이, 인수분해 공식, 이차방정식의 근의 공식 같은 것들을 끼얹으려니 잘 될 리가 만무했다. 선생님의 수업을 한번 듣는 것으로 완벽한 이해를 기대할 수도 없었다. 그래도 세은이는 포기하지 않고 우선 문제를 풀어서 가져왔다. 내가 매겨서 돌려주면 또 고쳐서 가져왔다. 또, 또, 또……. 고쳐진 것이 없는 책을 그대로 돌려주기가 괜히 미안해서 세은이를 보고 있으면 세은이는 괜찮아요, 하고 웃으며 책을 가져갔다. 세은이뿐만 아니라 모든 학생들이 풀어서 가져오는 문제들을 채점하느라 많은 시간을 쏟을 순 없었지만 그래도 틈날 때마다 세은이를 오래 봐줄 수 있도록 노력했다. 세은이가 모르겠다고 질문할 때면 다른 아이들에게 잠깐 양해를 구하고서라도 최대한 천천히, 자세히, 모를 만한 부분들을 짚어주려 애를 썼다.
절로 나오는 한숨을 숨기는 때도 있었다. 방금 전에 가르쳐준 문제와 뭐가 다른 건지 나로서는 알 수가 없는 문제를 또 들고 와서 모르겠다고 할 때, 그런 문제를 다시 설명해주었는데 오히려 아까보다 더 미궁에 빠진 표정으로 나를 바라볼 때, 아주 잠깐은, 정말 막막했다. 아무리 그래도 제일 답답하고 속상한 건 자기 자신일 텐데 나까지 그런 티를 내면 안 되지, 싶어 세 번, 네 번, 열 번도 더 똑같은 이야기를 새롭게 되풀이했다.
차츰 시간이 흘러 학원에 아이들이 입고 오던 사복은 교복으로 바뀌고, 꽃도 피고, 곧 중간고사 기간도 찾아왔다. 그때까지도 세은이의 프린트들은 변덕스레 맑았다, 흐렸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안 그래도 세은이네 학교는 시험문제를 어렵게 내는 편이어서 선생님과 나는 종종 걱정이 담긴 몇 마디를 몰래 나누곤 했다.
"세은이, 실망하면 우짜노. 뭐 그래도… 본인이 이겨내야겠지. 그제?"
이겨낼 것도 없이, 세은이는 100점을 맞아왔다. 세은이 어머님께서는 학원으로 찾아오셔서 감사하다고 연거푸 인사를 하셨다. 선생님은 '세은이는 네가 가르친 거나 다름없다'며 나를 치켜세우셨다. 세은이의 점수와, 어머님의 선연한 기쁨과, 선생님의 한 마디까지 곁들여져서 나도 참 어찌나 뿌듯했던지. 그리고 그 후 세은이는 점점 학원 빠지는 날이 잦아지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학원을 그만두었다. 잘 나가다가 갑자기 이게 무슨 전갠가 싶으시겠지만, 그렇게 이 이야기는 끝이 난다. 세은이는 학원을 그만두었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나로서는 쉽게 짐작할 수도 없는 절망과 속상함을 그 친구는 몇 번이나 삼키고 눌러담았을까. 내가 숨겼던 한숨들은 너무 가벼워서 차마 그에 비할 바도 못될 것이다. 그 100점은 세은이가 스스로를 몇 개월동안 담금질하며 일구어낸 값진 경험이었다. 에베레스트나 다름 없었을 스무 개의 시험 문제들. 세은이가 홀로 기를 쓰며 몇 번의 등정을 하는 동안 나는 그곳에 있지 않았다. 그래서 가끔 세은이를 이렇게 생각할 때마다, 세은이가 오롯이 혼자서 빚어낸 결과에 내 뿌듯함을 얹어도 괜찮은 건지 의문이 든다. 그런 마음일 정도로 옆에서 본 세은이의 노력은 눈물겨웠다.
이젠 대입을 바라보고 있을 세은이가 지금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지 모르겠다. 분명 세은이도 타고난 무언가가 있을 것이고, 그래서 세은이가 잘 할 수 있는, 좋아하는 일을 찾아 나름의 꿈을 꾸고 있었으면 좋겠다. 그저 그때의 기억이 앞으로 세은이가 무엇을 하든 간에 작은 버팀목으로 남아있길 바라본다. 나에게도 세은이의 그 경험이, 그때 그 최선이, 노력이, 강렬한 인상으로 오랫동안 이렇게 남아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