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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그날의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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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애진 Mar 16. 2020

Her(2013), 7년이 지난 후

기술의 발달이 남긴 자욱한 먼지구덩이 속에서


               (줄거리가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는 이혼을 준비하고 있다. 업으로는 의뢰인들의 편지를 대신 쓴다. 생일이나 기념일을 축하하는, 아니면 평범한 날임에도 새삼 누군가에게 감사하는 편지들. 인간으로서 느껴볼 수 있는 모든 감정을 이미 느껴본 듯하다고 말하는 그라서인지 내용들이 세심하기 이를 데 없다. 편지를 읊는 그의 시선을 따라가면 생면부지 제삼자의 삐뚤빼뚤한 치열 사이에서도 사랑은 쉽게 발견된다. 하지만 그와 그의 친구-역시 결국 8년 결혼생활에 종지부를 찍는-가 나누는 대화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문장은 단연 "I don't know…"다.









언제부터였을까. 우리에게 관계란 너무나도 어렵다. 나도 모르는 사이 내 검색 기록과 웹페이지 방문 빈도를 수집해 놀랍도록 정확하게 내 취향을 정조준하는 이 세상에서, 우리는 '나'에 대해 생각하고 설명할 기회를 지나치게 잃었다. 개인맞춤형 서비스들은 우리를 업어키웠다. 타인과 얽히며 가장 큰 에너지를 쏟아야 하는 부분은 서로를 알아가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양방향으로 끊임없는 자기소개가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는 소통의 영역에서 퇴화하고 있고, 무선 이어폰은 그 속도를 부채질한다. 그렇게 적절한 시기에, 그가 그녀를 만난다.










그녀, 개인맞춤형 서비스의 궁극이 아닐까. 그와 대화하며 사만다는 이를 양분삼아 빠른 속도로 자아를 만들어간다. 그와 전부인이 서로의 인생에 크고 작은 영향을 끼쳤듯, 사만다 역시 그와 한 마디, 한 마디, 무게가 실린 말들을 주고받는다. 그녀는 빈곤한 가정환경도, 기질적으로 타고난 예민함도 없다. 다만 OS 구매자에게 능청스러운 농담을 던질 줄 아는 유머러스함과, 언제든 부르면 기분좋게 안부를 묻는 여유로움은 갖추었다. 어찌 그가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 있을까?











몸의 부재를 극복해보려는 사만다. 하지만 사만다의 시도는 사람에 의해 소외된 사람을 부각시킬 뿐이다. 이사벨라는 그와 그녀의 '순수한 사랑'에 감명했다지만, 그래서 이 관계에 부족한 '몸'만을 빌려주고 싶었다지만, 이사벨라 역시 사랑을 동경하는 영혼이기에 결국 입술이 떨리고 만다. 무엇인가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경종처럼.











점점 가파른 기울기를 그리며 물리학과 철학, 그 이상을 기웃거리던 사만다는 641명을 동시에 사랑한 후 떠나버렸다. 7년이 지나고 다시 커다란 화면으로 본 이 영화에서 내 눈엔 자꾸 회색빛 하늘만 보였다.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한번도 보이지 않던 파란 하늘, 그리고 구름. 그의 집에서 내다봐도, 기차를 타고 바다를 찾아가도 절대로 구름이 담긴 하늘은 보이지 않았다. 거의 1년의 반절 동안 우리나라에서 고개를 들면 보이는 미세먼지를 어쩜 그리 똑닮았던지. 그런데 그녀를 떠나보내고-혹은 그가 버려지고- 난 후 옥상에서 바라보는 하늘엔 옅게나마 푸른빛이, 엷게나마 구름이 떠 있다. 기술의 발달이 남긴 자욱한 먼지구덩이 속에서 말을 잃어버린 우리에게 무언가 할말이 있는 영화였구나, 이제야 눈치를 조금 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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