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나 난리법석이었던지. 그날 그 교실. 발표가 하고 싶어 약이 바싹 오른 초등학생 무리가 난동에 가까운 몸짓을 구사하던 틈바구니 속에서 나는 불현듯 예견했다. 이 장면의 일부가 되어서는 절대 눈에 띌 수 없겠구나. 거의 모두가 일어나 있었으니 얌전히 앉아 있어야만 도드라질 것이다. 대다수가 양팔을 휘젓고 있었으므로 한쪽 팔만 곧게 들어올리고 있어야 차별화된다. 그렇게 나는 엉덩이 두 쪽을 모두 의자에 붙인 채 왼팔만 왼쪽 귀에 착 붙여올려 선생님의 시선을 가져왔고, 선생님은 그런 나를 호명했다.
비슷한 결의 선택이었겠다. 주사를 좋아하노라, 두렵지 않노라 공표한 순간들. 주변 친구들 역시 적당히 달라보이는 것에 눈길을 한 번 더 두기 마련이었고 나는 그게 좋았다. 수용할 만한 다름은 곧 흥미를 끄는 특이함이었으니까. 내 입장에서 주사의 따끔함은 실로 오두방정까지 떨 만한 무언가는 아니었기에, 또한 잠깐을 참아내고 나면 따라오는 효용도 분명 있었기에, 나는 주사를 나의 취향에 편입시켰다. 한의원에서 맞는 침도 마찬가지였다. 보통 악 소리를 동반하는 퀘스트를 점잖게 수행해내고 얻는 뿌듯함도 한몫했다.
주사 혹은 침술을 향한 애정 고백은 사람들에게서 특정 스펙트럼 안쪽을 벗어나지 않는 반응을 이끌어내곤 했는데, 간만이었던 내 공표에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인 사람이 있었다. 최근에 찾은 한의원의 한의사였다. 초진을 위해 침을 놓을 만한 자리를 찾기 전 한의사는 내게 물었다.
- 침 맞는 거 무섭지 않아요?
- 저 침 잘 맞아요!
그의 첫 대답은 침묵이었다. 그 침묵에 나는 혹시 내 대답이 어떤 이유에서건 한의사의 심기를 거스른 건 아닌지 의아했다. 하지만 오히려 그는 오랜 만성 통증에 질려버린 내 상태를 잘 헤아려주었고, 전혀 불쾌해보이지 않았다. 다만 세 번째 진료 중간에 그는 다시 내게 두 번이나 연거푸 똑같이 물었다.
- 침 맞는 거 안 무서워요?
- 네, 괜찮습니다.
- 침 놓는 거 무섭지 않으시다고요?
- 네네.
그의 두 번째 대답은 한숨이었다. 같은 질문 세 번. 그리고 침묵과 한숨. 비언어적인 두 가지 반응으로 내게 어떤 운을 띄우려는 건가. 오리무중이라 느낀 그 순간 네 번째 똑같은 질문을 되풀이하는 주체는 내가 되었다.
- 정말 침을 무서워하지 않나?
글쎄. 아무래도 아니지 않나. 내가 좋아하기 시작했던 건 흥미 끌기와 뿌듯함이었다. 이어서 좋아한 건 주사나 침술의 효과였다. 그 자체를 좋아한다는 말은 교묘한 거짓이었구나. 틀렸구나. 통증을 덜어주는 효과를 누릴 수만 있다면 상대적으로 잠깐일 뿐인 따끔함 정도는 감내할 수 있다는 대답이 맞는 거구나.
네 번째, 다섯 번째 진료를 받으러 가면 한의사가 다시 물어올지 모르겠다. 넌지시 던지는 듯 꽂는 듯한 그 말투와 목소리로. 그럼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다. 여전히 무섭지 않다고? 좋아한다고? 아니면 그게 아니었다고 구구절절? 아마 내가 어떤 대답을 하든 크게 중요치 않을 것 같다. 뭉치고 굳은 내 여러 근육을 찾아가는 그 손끝에, 힘을 빼보려 해도 완전히 사라지진 않는 내 긴장감이 느껴질 수밖에 없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