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스럽고 담백하게, 우리의 속도로 100년이 가는 브랜드를 꿈꾸며
브랜드 언박싱(brand unboxing)은 브랜드를 만드는 사람들의 다양한 관점과 생각을 기록하는 인터뷰 프로젝트입니다. 우리 주위에 숨겨진 브랜드가 빛나는 과정을 탐구합니다.
Interviewer’s Comment: 블랙 & 화이트를 중심으로 간결하며 여성스러운 옷을 만드는 브랜드 유노이아의 첫인상은 우아함과 시크함이었다. 그러나 파고들수록 드러난 것은 담백하고 절제된 디자인의 한 켠으로 고객과 따뜻하게 소통하는 유노이아의 다정함이었다. 대구에서 시작해 어느새 9년 차에 접어든 브랜드 유노이아는 고유의 아름다움과 속도를 지키며 건강하게 성장하고 있다. 아무리 세상이 빠르게 흘러도 조급해하지 않는 배경에는 자기만의 단단한 철학과 100년을 바라보며 일을 하는 장기적인 관점이 있었다. 수수하지만 아름답게, 여유롭지만 뚜렷하게 자기만의 아카이브를 쌓아가고 있는 브랜드 유노이아의 이야기를 언박싱해보자.
융: 안녕하세요. 브랜드 언박싱 독자들을 위해 브랜드 소개 부탁 드립니다.
권희진: 안녕하세요. 대구에서 시작한 9년 차 브랜드 유노이아 대표 권희진입니다. 유노이아는 담백한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브랜드로 디자인 기획부터 제품 생산, 출고 전 과정을 대구에 위치한 한 공장과 긴밀하게 소통하며 원스톱으로 진행하고 있어요. 대구는 우리나라 섬유·패션 산업의 발전을 함께해온 도시예요. 그만큼 패션 제조와 관련한 기술자 분들이 많거든요. 덕분에 유노이아 제품이 퀄리티가 좋다고 알음알음 알려지기도 했어요. 고객과 깊은 관계를 지향하는 브랜드 성향상 이렇게 인터뷰를 해본 적이 거의 없어서 무척 떨리네요.
융: 대구에서 시작하셨군요, 유노이아는 어떻게 만들게 된 브랜드인가요?
권희진: 이전에는 직장 생활을 했어요. CS 관련 고객 서비스 마인드 교육 일을 했어요. 평소 옷을 좋아해 나만의 브랜드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은 늘 있었지만 타이밍은 생각지 않았을 때 오더라고요. 직장 생활을 하면서 우연히 기회로 베이식한 디자인의 니트 2가지 스타일을 만들어 판매했었어요. 이게 유노이아의 첫 시작이었죠. 고객 반응도 좋고 저 역시 재미있다보니 점점 회사와 병행이 안 되더라고요. 그때 퇴사하고 본격적으로 옷을 만들기 시작했어요.
융: 어떻게 보면 회사를 다니면서 사이드 프로젝트로 시작된 브랜드네요. 퇴사하실 때 두렵진 않으셨어요?
권희진: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다고 생각해서 두려움이 없었어요. 건강이 좋지 않은 상태였고 많이 지치기도 했고요. 미련이나 욕심이 사라진 공허한 상태였던 것 같아요. 유노이아 초창기에 고객 분들이 “알 수 없지만 어두운 부분이 느껴진다”라고 했었거든요. 그런 부분들을 의외로 반겨주기도 하시더라고요. 지금은 가족과 직원들도 있지만, 그때는 잃을 게 없었어요.
융: 유노이아는 무슨 뜻이에요?
권희진: 그리스어로 ‘아름다운 생각’이라는 뜻이에요. 박연준 작가님의 산문집 <소란>을 읽고 아름다운 사람에 대한 기준을 떠올려봤어요. 비주얼적으로 화려한 것보다 눈빛이 살아있고 자기만의 기준과 자신감을 가진 사람들이 멋있더라고요. 아름다운 생각이 아름다운 옷으로 연결이 된다고 생각했고 계속 검색해보다가 유노이아라는 단어를 발견했어요.
융: 유노이아 제품들을 보면 블랙과 화이트가 많아요. 처음부터 주요 색깔로 블랙과 화이트를 정하고 시작하신 거예요?
권희진: 정했다기보다는 좋아하는 색이라서 자연스럽게 잡혔어요. 유노이아는 담백함을 추구해요. 검은색은 심플하면서 아무에게나 입혀도 멋있게 만들어주는 색이잖아요. 예전에 고객님이 “패션 센스가 없어도 유노이아의 옷을 한 벌로 입으면 스타일을 아는 사람처럼 보인다”는 피드백을 준 적이 있으실 정도죠. 블랙이라는 컬러에서 느껴지는 시크한 느낌과 무게감이 분명 있거든요.
융: ‘담백한 아름다움’이라는 표현이 특히 와닿았어요. 화려한 것보다 수수하고 담백한 아름다움에 중점을 두는 이유가 있나요?
권희진: 제가 좋아하는 브랜드들의 이야기로 그 이유를 들려드리고 싶어요. 저는 에르메스, 샤넬, 질 샌더를 좋아해요. 에르메스는 마차에 들어가는 부속이나 마구(馬具)를 만들던 브랜드예요. 당시에 마구를 장착할 수 있는 사람들은 귀족이 많다 보니 고객 특징이 명확했어요. 지금도 에르메스는 승마 유산을 이어받아 옷을 만들고 있죠. 샤넬은 트위드 셋업을 만들며 당시 여자들이 입던 코르셋을 해체시킨 브랜드예요. 몇 십 년이 흐른 현재 아직도 트위드 한 벌이 그때의 가치를 지니고 있어요. 질 샌더는 기본적인 패턴에 고급스러운 소재를 써요. 따라 하고 싶어도, 최고급 소재 때문에 차별화가 생겨요. 세 브랜드의 공통점은 지금 유행하는 트렌드를 무조건 좇지 않는다는 점이에요. 모두 본질에 있는 알맹이가 뚜렷해요. 스스로 만들어진 아카이브 안에서만 활동하죠. 유노이아가 지켜내고 싶은 것도 비슷해요. 담백한 아름다움 안에서 우리만의 뚜렷한 아카이브를 쌓고 싶어요.
융: 아카이브가 만들어진다는 말이 인상적이에요. 빠르게 흘러가는 세상 속에서 조급해지지 않고 유노이아만의 속도를 지키려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권희진: 빨리 가야 할 이유가 없어서예요. 유노이아를 시작한 5년 전도 그렇고, 지금도 현재에 만족하며 우리 브랜드만의 속도로 나아가고 있어요. 유노이아만의 아카이브, 알맹이를 단단하고 뚜렷하게 만들어가고 있는 중이죠.
에르메스와 샤넬은 100년이 넘은 브랜드고 질 샌더는 50년이 넘었어요. 우리나라에도 오래된 브랜드가 있을 텐데요. 물론 해외 명품 브랜드와는 다를 수 있지만 한국에서는 입지를 두텁게 가진 브랜드를 찾아보기 힘들잖아요. 오래된 국내 패션 브랜드를 왜 입지 않는지 생각해보면 한국이라는 나라가 가진 특성 때문인 것 같아요. 빠르게 산업이 성장했다 보니 트렌드도 빠르게 따라가는 것에 익숙해진 거예요.
그런데 자칫 트렌드만 좇다 보면 자기 고유의 색깔이 점점 흐려질 수 있잖아요. 사람과 브랜드는 철학과 알맹이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알맹이가 뚜렷하면 디자이너가 바뀌어도 문제가 되지 않아요. 코코 샤넬은 세상에 없지만, 브랜드 샤넬의 아이덴티티는 이어지고 있잖아요. 아카이브가 뚜렷하기 때문이죠. 그래서 저도 오래가는 브랜드를 해보고 싶어요. 그래서 ‘개인 브랜드가 100년의 역사를 가질 수 있는 방법’을 항상 고민해요.
융: 아름다움의 의미는 주관적일 수 있잖아요. 유노이아가 정의하고 있는 ‘아름다움’의 의미가 궁금해요.
권희진: 모든 아름다움은 비워진 것에서부터 시작이 되고 배경에 따라서 평범한 것도 다름이 될 수 있어요. 자연스러운 곳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에 의식하거나 과장하지 않고 옷을 바라볼 때 진정한 아름다움이 보여요. 그래서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해요. 짧은 시간 안에 만들어졌다고 해서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깊어질수록 농익는 건 어쩔 수 없죠. 영글어가는 과정이 필요해요.
융: 유노이아만의 고유한 분위기가 제품과 대표님의 말씀에서 자연스럽게 느껴지는데요. 그 고유함에 영감을 주는 것들은 어떤 게 있나요?
권희진: 미니멀리즘을 추구하는 작가들이 쓴 책을 좋아해요. 소노 아야코의 <약간의 거리를 둔다>와 히로세 유코의 <이제 좀 느긋하게 지내볼까 합니다>와 같은 책이요. 비우는 삶과 적절한 거리를 둘 때 오는 아름다움이 있어요. 이런 생각이 반영되어 유노이아의 활동 영역 자체도 더 좁고 깊어지는 것 같아요. 자연도 영감의 원천 중 하나예요. 꾸며지지 않은 걸 좋아해요. 순리대로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과정 안에서 유노이아의 옷도 흘러가는 것 같은 순환의 느낌을 좋아해요. 그래서 옷을 입었을 때도 불편함은 배제하고 편하게 입을 수 있도록 제작합니다.
융: 온라인 샵을 먼저 운영하다가 오프라인 매장을 내기로 결심한 계기가 있었어요?
권희진: 온라인 스토어만 운영하던 당시에 1년에 2~3번씩 고객들이 제품을 직접 보실 수 있도록 대구 사무실에서 행사를 했었어요. 그때마다 다른 지역의 고객들이 많이 와주셨어요. 실제 데이터를 보니 고객의 절반 이상이 서울, 경기에서 오신 분들이시더라고요. 멀리 대구까지 오는 불편함을 감수하고 유노이아를 찾아오시는 고객들을 보며 이제는 매장을 낼 때가 아닌가 고민하던 찰나에 연희동 현재 공간을 소개받았고, 유노이아와 잘 어울려서 계약하게 된 거예요.
융: 선(先)오더 방식으로 제품을 출시하는 것도 유노이아의 다른 점 같아요. 이 프로세스를 지키는 이유가 있나요?
권희진: 처음에는 제가 좋아하는 옷을 고객들께 보여드리고 같이 구매해서 입자는 취지였어요. 초반에 혼자 일하다 보니 먼저 제작하는 게 확신이 없더라고요. 이제는 매달 옷이 출시되니까 ‘월간 유노이아'라고 불러주시는 분들도 계세요. 매달 옷이 나오는 건 패션 브랜드 업계에서도 독특한 일정인데요. 저희가 기획부터 생산, 촬영, 출고까지 전부 운영하다 보니 루틴처럼 반복하고 있어요.
융: 팬덤이 두터우신 것 같아요. 고객과 가깝게 소통하는 비결이 있나요?
권희진: CS가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어찌 보면 옷보다도 더요. 유노이아는 어떤 일을 할 때 고객 입장에서 먼저 방어적으로 움직여요. 고객의 불만이 애초에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게 제일 중요하고, 고객이 문의를 제기하면 무조건적인 대처가 필요해요. 회사 분위기가 그렇게 형성되어 있어서 전 직원이 CS를 중요시합니다. 고객 입장에서 제품을 보니 검수가 꼼꼼해질 수밖에 없고요. 상품을 출고할 때도 출고 담당자가 마지막 검수까지 해서 보내고요. 고객 의견이 접수가 되면 디자인팀 실장이 고객님께 직접 전화를 드리기도 해요. 쉽지 않은 일이지만 고객이 없으면 브랜드는 존재할 수가 없어요. 유노이아가 이제 9년 차 브랜드로 접어들었는데요. 오래 가기 위해서 작게 손해를 보더라도 고객 편에 서서 해야하는 일이 있다는 걸 기억하려고 노력합니다.
융: 이전에 CS 강사로 일했던 경험이 엄청 도움이 될 것 같아요.
권희진: 정말 큰 도움이 되죠. 제가 CS를 강조하다 보니까 유노이아의 브랜드 색깔에도 묻어나는 것 같아요. 친절하고 다정한 브랜드로요.
융: 해외 진출은 어떻게 하게 되신 거예요?
권희진: 유노이아 온라인 스토어에서 글로벌 구매가 가능하다 보니 해외 고객 분도 계세요. 올해는 좋은 기회로 ‘23 S/S 프랑스 파리 패션위크의 ‘트라노이 트레이드 쇼'에 가게 됐어요. 보통 미국, 영국, 일본에서 구매하는 고객 분들이 많아서 파리는 큰 기대를 하고 가지는 않았는데 생각보다 현장에서 반응이 좋았어요. 이탈리아와 그리스에 계신 바이어 분들도 오더를 많이 하셨고요.
융: 대표님과 대화를 나누다 보니, 대표님께서 정의하는 성공은 어떤 모습인지 궁금해졌어요.
권희진: 이미 성공한 것 같아요. 예전에 ‘유통과 예술이 합이 되어야 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요. 자본 없이는 예술을 마음껏 하면서 살기는 어렵고 예술이 없는 유통만 하면 빠르게 추락한다는 말이었어요. 유통과 예술, 둘 사이의 균형을 지키는 게 중요하다는 말이 와닿더라고요. 과거 어떤 시점에 유노이아를 다르게 운영했다면 더 크게 확장되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할 때도 있어요. 하지만 그냥 흐르듯이 온 지금이 가장 좋은 것 같아요. 성공은 뭔가를 좇지 않는, 지금 그대로 만족하면서 자연스럽게 커 가는 모습에 가깝다고 생각해요.
융: 좇지 않는다는 말이 너무 좋아요. 대표님이 더 해보고 싶은 일은 무엇인가요?
권희진: 브랜드의 다음을 생각했을 때 유노이아에게 2023년은 중요한 기로인 것 같아요. 무신사 엠프티(EMPTY)라는 좋은 파트너를 만나기도 해서 더 점프업을 할 수 있는 시기라고 생각해요. 더 길게 하고 싶은 일을 생각해 보면, 100년이 가는 브랜드를 목표로 유노이아를 운영해보고 싶어요. 이제 옷은 나를 꾸미는 것 이상의 가치를 갖고 있다고 생각해요. 결국에는 브랜드가 오랫동안 건전하게 성장해야만 고객도 같이 성장할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더 해보고 싶은 일이 있다면 아기 옷을 만들고 싶어요. 유노이아라는 이름으로 만들지는 않을 것 같고요. 언젠가 딸에게 입히고 싶은 예쁜 옷을 만들고 싶어요.
융: 브랜드 언박싱 독자들에게 마지막으로 해주고 싶은 말이 있나요?
권희진: 진짜 하고 싶은 일을 하세요. 꿈이 큰 것도 좋지만, 눈앞에 있는 걸 놓치지 않았으면 해요. 옷으로 비유하자면 내 옷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만 팔면 되거든요. 내 카테고리의 사람들이랑만 서로 주고받으며 지내기만 해도 충분히 행복해요. 이것저것 경험해보면서 내가 좋아하고 하고 싶은 일을 찾아보세요.
인터뷰어 정혜윤
독립한 마케터 겸 작가. 하고 싶은 일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다양한 회사와 세계 곳곳을 유랑한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좋아하는 것에 빠져있는 사람들, 편견을 부수는 사람들과의 대화를 즐깁니다. 10년 간 에이전시 및 스타트업 업계에서 마케터로 일하다가 2020년 여름, 회사로부터 독립해 현재는 프리랜서 마케터이자 작가로 일하며 다능인을 위한 뉴스레터 '사이드 프로젝트'를 운영합니다. 여전히 좋아하는 것도, 하고 싶은 것도 많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