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뎌진 마음도 다시 깎이면, 다시 쥘 수 있다
연필깎이를 손에 든다.
언젠가부터 그 자리에 놓여 있었지만
한동안 손대지 않았던 물건.
책상 구석에 꽂힌,
쓰다 남은 연필을 꺼낸다.
짧고, 무디고, 손에 쥐기도 조금 애매한 길이.
그런데도 쉽게 버려지지 않았다.
어딘가 아깝고,
아직 조금은 쓸 수 있을 것 같은 여백.
나는 그 연필을 천천히 깎는다.
조심스럽게 칼날을 대고,
나무의 겉껍질을 돌려 벗긴다.
얇게 깎여나가는 나무 껍질,
그 안에서 드러나는 단단한 흑심.
그 조용한 갈색의 속살을 바라보며
문득, 내 마음도 이렇지 않을까 생각한다.
한동안 너무 써서,
무뎌지고, 짧아지고,
쥐기 어려워진 마음 하나.
다시 쓰기 위해
나는 조심스럽게 그것을 깎고 있다.
마음은 지워지지 않지만
다시 쥐어질 수는 있다.
다듬어진 연필은
아직도 충분히 글을 쓸 수 있다.
아주 길진 않지만,
짧다고 무의미한 건 아니다.
짧은 만큼 집중하게 된다.
무뎌졌기에 더욱 섬세해진다.
나는 연필을 깎으며 생각한다.
한때 날카로웠지만,
지금은 그저 손끝에 익숙해진 감정들.
그 감정들도,
지금 이 순간
다시 쥐기 위해 다듬어지고 있는 건 아닐까.
연필을 다 깎고 나면
자투리 나무 조각이 남는다.
그것들은 버리지만,
그 깎여나간 시간은 내 안에 남는다.
나는 그 연필로,
무언가를 다시 적고 싶어진다.
지금의 나를,
지금의 감정을,
지금의 마음을.
당신은 지금, 어떤 마음을 다시 쥐고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