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를 직면할 용기가 없으면 아무것도 이뤄지지 않는다.
1.
우리는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회의를 한다.
회의란 불완전한 사람들이 모여서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주며 보다 완벽한 의사결정을 하기 위한 모임이다. 따라서 회의할 때 항상 '내가 틀릴 수 있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남의 의견을 귀담아 들어야 하며, 본인 의견의 근거를 충분히 마련해야 한다. 누구나 공평하게 의견을 개진할 권리를 가져야 한다. 물론 최종 결정하는 사람은 필요하다. 회의를 시작한 이상 결론은 나와야 하니까.
2.
특히 마케팅 관련 의사결정은 회의를 통해 진행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마케팅은 정답이 없기 때문이다. 마케팅은 기업이 제품이나 서비스를 소비할 것으로 예측되는 잠재 소비자를 실제 소비자로 전환하는 과정을 반복하여 해당 제품이나 서비스만의 시장을 형성하고 유지하는 일련의 과정이다. 잠재 소비자를 일일히 만날 수 없기 때문에 표본 데이터와 직감을 바탕으로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 따라서 전략을 세워도 결과를 100% 확신하기 보다 추측하고 예상할 수 밖에 없다. 한 사람이 독단적으로 결론을 내리기에는 리스크가 크기 때문에 여러 사람의 의견이 모여야 하는 이유다.
3.
가장 이상적인 마케팅 회의는 아래와 같이 다섯 단계를 거친다. 사실 마케팅 뿐만 아니라 모든 의사결정 과정에 적용해도 마찬가지다.
① 문제 인식
어딘가에 문제가 생겼다. 작년보다 시장점유율이 떨어졌다던지, 시장에서 발생하는 제품 불만사항, 이번 성수기에 어떤 캠페인을 해야 하는지, 브랜드가 노후되어 올드해보인다는 인식 등 뭔가 개선해야야 할 사항은 다 문제다. 문제를 인식하면 관련 실무자는 모여서 회의를 시작한다.
[문제인식]
시장 점유율이 작년보다 떨어졌다
② 상황 파악
중요한 첫 단추다. 문제는 수면 위로 떠올랐기 때문에 비교적 명확하게 보인다(물론 무엇이 문제인지 파악하지도 못하는 무능한 실무자도 존재한다). 이 문제가 왜 발생했는지를 파악하는 단계가 필요하다. 이 단계부터 회의 참석자들이 팩트에 기반한 의견을 내야 한다. 한 가지 팁이 있다. 문제인식을 질문으로 바꿔보자. 질문은 본능적으로 답을 찾게끔 만드는 힘이 있다.
[문제인식]
왜 시장 점유율이 작년보다 떨어졌지?
[상황파악]
A : 우리 브랜드가 인지도가 떨어져서
B : 현장 영업사원들이 부족해서
C : 제품 기능 자체가 경쟁제품보다 열위라서
③ 문제점 정의
어마어마하게 중요한 단계다. 문제점을 어떻게 정의하냐에 따라 해결책이 다르게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단계는 왜 이런 문제가 생겼는지 근본적인 원인을 고민하는 시점이다. 이 부분에서는 팩트뿐만 아니라 직감과 추론의 논리도 필요하다. 얼굴이 붉혀질 수도 있지만 최대한 감정을 억누르고 이성적인 토론을 나눠야 상황을 냉정하게 들여다 볼 수 있다. 여기서도 질문을 계속 던져보자.
[문제인식]
왜 시장 점유율이 작년보다 떨어졌지?
[상황파악]
A : 우리 브랜드가 인지도가 떨어져서, 그런데 왜 떨어졌지?
B : 온라인 판매량은 작년보다 올랐는데, 오프라인 판매량이 오히려 급감해서, 그런데 왜 떨어졌지?
C : 제품 기능 자체가 경쟁제품보다 열위라서, 그런데 왜 기능이 떨어졌지?
[문제점 정의]
A : 우리 브랜드를 알리는 주요 방법이 광고인데, 이번에 광고비를 작년보다 적게 쓴게 문제다.
B : 인센티브가 작년보다 낮아져서 현장 영업사원들의 판매실적이 저조해졌다.
C : 원가절감과 투자비절감을 위해 기존 제품을 파생해서 기능이 작년과 그대로다. 떨어진게 아니라 경쟁제품의 수준이 올라간거다.
④ 해결책 논의
사실 문제점이 명확하게 정의되면 해결책은 따라온다. 대부분의 문제점은 해결책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혹자는 의문을 품을 수도 있다. '기획을 할 때 문제점을 하나로 압축시켜 그 부분을 집중적으로 해결하는 게 효율적인데 왜 이렇게 문제점을 많이 벌려놓지?' 맞다. 그게 효율적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는 이유는 제안하는 입장에서 통제력이 크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에이전시의 기획자일 가능성이 높다. 보통 마케팅 커뮤니케이션 에이전시 입장에서 클라이언트 기업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 힘들기 때문에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문제점을 정의하고 그에 대한 해결책을 내놓는다(그리고 그 해결책은 대부분 광고다). 효율이 무조건 좋은 답은 아니다. 때로는 효율이 정답을 찾는 길을 가리기도 한다.
하나의 문제상황을 야기하는 다양한 측면의 문제점을 정리해야 한다. 분류를 명확하게 해야 그에 대한 해결책도 분류가 된다. 분류되면 실행할 사람들도 구별할 수 있다.
[문제인식]
왜 시장 점유율이 작년보다 떨어졌지?
[상황파악]
A : 우리 브랜드가 인지도가 떨어져서, 그런데 왜 떨어졌지?
B : 온라인 판매량은 작년보다 올랐는데, 오프라인 판매량이 오히려 급감해서, 그런데 왜 떨어졌지?
C : 제품 기능 자체가 경쟁제품보다 열위라서, 그런데 왜 기능이 떨어졌지?
[문제점 정의]
A : 우리 브랜드를 알리는 유일한 방법이 광고인데, 이번에 광고비를 작년보다 적게 썼다.
B : 인센티브가 작년보다 낮아져서 현장 영업사원들의 판매실적이 저조해졌다.
C : 원가절감과 투자비절감을 위해 기존 제품을 파생해서 기능이 작년과 그대로다. 떨어진게 아니라 경쟁제품의 수준이 올라간거다.
[해결책 논의]
A는 마케팅 커뮤니케이션 업무
- 의견1 "광고비를 증액하자."
- 의견2 "근본적으로 광고에 의존하는 게 문제다. 소비자가 찾아올 수 있도록 *Owned media를 강화하자."
(* Owned media : 기업이 소유하고 있는 미디어, 홈페이지, SNS채널, 블로그 등)
B는 영업 업무
- 의견1 "인센티브를 다시 올리자"
- 의견2 "현장 영업사원에 대한 지원이 형편없다. 인센티브 뿐만 아니라 현장의 목소리를 본사에 생생하게 전달할 수 있는 창구를 체계화하자"
C는 상품기획 업무
- 의견1 "원가절감은 결국 점유율절감을 불러온다. 소비자 니즈에 부응하는 상품을 만들고 그 과정에서 원가절감을 해야지, 무조건 원가절감하는 건 의미가 없다. 기존 상품을 업그레이드하자."
- 의견2 "경쟁제품보다 뛰어난 제품을 만드는 건 말이 쉽다. 어차피 기본기능은 같으니 가격대를 내려서 보급용으로 구성하면 점유율을 올릴 수 있다."
⑤ 해결책 결정
각 업무 파트별로 해결책을 결정한다. 그 뒤는 해당 해결책을 어떻게 실행할지에 대한 과제가 될 것이다.
4.
눈치 챘을지 모르겠다. 위와 같이 체계적으로 회의를 진행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장애물이 있다. 한 부서에서 했다면 자신들의 잘못보다는 다른 부서 탓을 하기 바쁠 것이다. 상황을 저렇게 거시적, 미시적으로 들여다보기 위해서는 CEO급이어야 가능하다. 그러니까 말했잖는가. 가장 이상적인 회의라고.
5.
불행히도 대부분의 한국기업에서는 이상적인 회의는 고사하고 회의 자체를 제대로 하기 힘들다. 여기에는 크게 다섯 가지 이유가 있다.
첫 번째, 기업의 수직적 구조 때문이다. 군대처럼 상하관계가 분명한 체계는 명령을 내리면 그대로 실행되기 때문데 대단히 효율적이다(물론 지시를 내리는 사람이 정답이라는 가정 하에 효율적이다). 먼저 밝혔듯이 회의는 누구도 옳다고 확신할 수 없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모이는 것이다. 그런데 특히 대기업 회의는 명목만 회의지 사실상 실무자의 보고를 받고 결재자가 일방적으로 판단하여 진행하는 경우가 많다. 분위기 자체가 자유로운 분위기가 아닌데 생산적인 의견이 나올리가 없다.
두 번째, 우리는 회의하고 토론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다. 한국의 공교육은 시작부터 수직적이다. 선생님과 교과서가 옳으며, 시험지로 그 옳음을 옹호하는 방식에 우리는 익숙해져있다.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기 보다 교과서에 담긴 남의 생각을 외우기에 급급하다. 이런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모여서 본인의 의견을 피력하고 남의 의견을 수긍할 수 있을까? 대기업 입사를 위해 토론을 준비하기도 하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하다. 회의를 운영하는 사람도, 구성원도 모두 토론에 대한 경험치가 없으니 막막할 수 밖에 없다. 게다가 감정도 잘 상한다. 내 의견을 냈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상처받고, 본인 의견이 공격당했다고 해서 얼굴을 붉히며 회의에 감정을 섞고, 남의 의견을 묵살하는 경우를 너무나 많이 봤다.
세 번째, 회의에서 면피하기 바쁘다. 이상적인 회의 과정을 살펴보면서, 각 부서마다 문제점이 있다는 점을 확인했다. 직장인은 실적과 승진과 연봉이 중요하다. 본인이나 자기 부서의 잘못이라고 했을 때 곧이 곧대로 인정하지 않는다. 서로 탓하기 바쁘다. 회의를 기업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가 아닌, 책임회피를 어필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한다. 서로 자기탓 아니라고 주장하다가 끝나는 경우가 많다.
네 번째, 소비자가 아닌 기업의 관점으로 판단한다. 사실 이게 가장 중요한 이유다. 소비자에게 답이 있는데 그것을 외면하고 판매자, 제조자의 입장에서 의사결정을 한다.
'원가절감을 위해 제품에서 이 기능을 뺀다.' ==> '이 기능이 이 제품의 핵심인데?'
'같은 기능의 제품에 서로 다른 브랜드를 붙이고 판매가 차이를 주자' ==> '모르고 산 사람은 어쩌려고?'
'제품이 런칭한지 3개월이 지났는데 안 팔린다. 판매가를 낮추자.' ==> '이미 산 사람들은 어쩌고?'
'우리가 인본주의를 추구하는 기업임을 광고하자' ==> '신입사원까지 잘라놓고 인본주의?'
혹자는 스티브 잡스는 시장조사를 하지 않는다며, 직감을 따라야 한다는 헛소리를 시전한다. 그건 현재 시장에 머무르지 않고 소비자가 인식할 수 없는 미래의 시장을 개척하려는 스티브 잡스에게만 해당하는 말이다. 애플 제품은 단순히 디자인이 좋은 제품이 아니다. 직접 사용해보면 사용자에 대한 연구를 얼마나 했는지, 버튼 하나를 마감할 때도 뭘 고민했는지가 느껴진다. 심지어 잘 보이지 않는 제품 내부의 메인보드 마감까지 아름답다. 소비자의 입장에서 일관적으로 의사결정을 하는 것은 대부분 판매자의 손실로 보인다. 더 노력해야 하고 더 알아봐야 하고 더 고민해야 하기 때문이다. 당장 눈 앞에 있는 이득에 흔들리지 않고 소비자의 입장에서 마케팅을 전개하는 기업이 성공한다. 우리는 이런 기업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바로 우리가 사랑하는 기업들이 이런 기업들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문제 자체를 싫어하고 두려워 한다. 전형적인 오너형 기업에서 나타나는 경향이 있다. '문제'를 싫어할 뿐만 아니라 단어 자체를 금기시한다. 특히 조직 내에서 처세를 잘하는 조직친화적 인물들이 이런 성향을 보이는데, 주로 '고려사항', '검토', '확인' 이라는 말로 '문제'를 대신하고 책임을 회피하기 바쁘다. 대부분의 의사결정을 오너가 하는 상황에서 '문제'가 발생했다면 결국 오너의 의사결정이 잘못되었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오너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최대한 노력하는 모습은 가상하지만, 그런 태도가 기업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장애물이 되어 충성하는 오너의 기업을 망치는 결과를 낳는다.
6.
마케팅 회의가 잘 안되는 근본적인 원인은 문제를 직면할 용기가 없어서다. 사람이 하는 일이고,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문제는 끊임없이 일어날 수 밖에 없다. 이러한 문제를 직면하지 않으면 결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특히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마케팅은 끊임없이 문제를 발견하고 해결하는 과정이다. 회의를 진행하려면 공통된 문제의식이 있어야 하는데, 애당초 문제를 회피하기 급급하니 회의가 제대로 될 리가 없다.
혹자는 볼멘 목소리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월급 받는 입장에서 그렇게 따박따박 문제를 지적하면
상급자 입장에서 뭐가 예쁘겠어요?
괜히 분란만 일으키는 사람으로 찍힙니다.
시키는 일만 잘 해도 괜찮은 거 아닌가요?"
맞는 말이다. 그렇게 살아도 회사생활에 아무 지장 없다. 문제점을 지적하면 아프다고 비명 지르는 사람들은 분명 있으며 꼰대문화에, 군대문화에, 가족문화까지 점철된 한국기업에서 당당하게 문제를 해결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눈 앞에 보이는 문제를 도외시하는 사람은 결코 성장할 수 없으며 마케팅 기획자라고 떳떳하게 밝힐 수 없다고 생각한다. 문제를 공론화하고 기업을 향해 용기 있게 말하자. 이 문제를 다 함께 모여 해결해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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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가끔 요리하고 글 쓰고 노래하고 운동하는 남자.
- 본능적인 욕망을 추구하며 날것의 언어를 사랑하는 기획자.
- 종합광고대행사의 AE였다가 브랜드 마케터로 전향한 직장인.
- 세상을 브랜드로 이해하며, 브랜드 부스팅 전략을 탐구하는 마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