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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브랜드부스터 켄 Jun 14. 2019

왜 주관적인 직장인이
더 유능한가?

이왕 일하기로 했다면 내가 성장할 수 있는 방향이 낫지 않을까?

1.

예전에 회장님 보고 때 겪었던 이야기다.


회장님을 포함한 경영진은 목요일 아침마다 주간 회의를 하는데, 실무진이 보고할 건이 있으면 이 때 하면 된다. 그날도 실무진이 우르르 들어갔다. 내 앞 순서는 해외 유명 박람회를 다녀온 상품기획팀 과장님의 보고였다. 심플하게 정리한 PPT에는 사진과 텍스트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박람회에 출품된 상품 분류부터 시작해서 트렌드 분석, 신기술까지 보고를 마치자, 회장님은 고개를 갸웃하면서 입을 열었다.


"그럼, 자네 생각은 뭔가?"

"......네?"

"아니, 다녀와서 좋았다는 건 알겠어. 그 다음에 자네가 뭘 어떻게 할지가 궁금한데?"


과장님은 더듬거리며 의견을 밝혔다. 아마 거기까지는 준비를 하지 않은 듯했다. 몇 마디 들어보니 방금 전 이야기한 보고 내용을 교묘하게 짜집기해서 자기 생각처럼 이야기하고 있었다. 실무자인 나도 금방 눈치챘는데 경영진이라고 눈치를 못 챘을 리가 없다. 듣고 있던 회장님은 '그만 됐다'고 말을 잘랐고, 그 뒤에 과장님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과장님은 어리둥철한 기색이었다. 자신이 뭐가 부족했는지 모르는 눈치였다.


기회가 된다면 나는 '그 보고는 과장님이 아니어도 누구나 할 수 있지 않을까요?'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과장님은 회사가 돈 들여서 임직원을 출장 보내는 이유를 모르고 있었다. 박람회에서 보고 들은 경험을 잘 정리했지만, 그 뒤에 제일 중요한 본인 생각이 없었다. 사실 요약한 내용은 과장님이 아니더라도 박람회 측에서 제공하는 자료로도 알 수 있다. 과장님은 자기 생각 없이 남의 생각(박람회)만 정리한 것이다.


자네 생각은 뭔가? 남의 생각 말고 자네 생각을 듣고 싶은데?


2.

나는 강력한 주관을 기준으로 회사를 위해 판단하며 이를 강하게 주장하는 회사원이 밥값 이상을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사람들이 많아야 회사의 미래가 밝다. 회사일은 크게 창안(전략)과 유지(운영)다. 남의 생각을 참고하는 객관적인 업무태도는 업무를 '운영'할 뿐 새로운 먹거리를 만들지 못한다. 반대로 남의 생각을 넘어 자신만의 주관이 뚜렷할수록 강한 색깔의 기획이 탄생한다. 전략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회사에서 자기 주관을 가지고 일하려면 3가지를 고려해야 한다. 첫째, 위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한 의사결정자들은 부하들의 자기주장을 용납하지 않는다. 세상이 바뀌었다고 하지만 여전히 기업의 주요 의사결정자는 가부장제에서 자란 남자들이다. 이들은 절대로 틀리지 않는 아버지의 위엄을 회사에서도 여전히 누리고 싶어한다. 이런 사람들에게 자기 할 말 다 하는 부하들이 달가울리 없다.


둘째, 책임을 회피하고 떠넘기는 문화다. 토론경험이 없어서 그런지 한국 사람들은 자기 주장에 굉장히 조심스럽고 누군가가 강하게 주장하거나 반문하면 기분부터 상한다. 다들 인간관계를 의식하다보니 가만히 있으면 절반은 간다라는 격언을 믿고 모두 회의석만 차지하고 눈만 굴리고 있다. 그러니까 회의가 조용하다. 경청을 핑계로 갈등과 대립은 최대한 피하고 회의에서 못한 말은 술집이나 흡연구역에서 뱉는다.


회사에서 민주주의를 찾는 의사결정자는 더 나쁘다.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의사판단이라는 미명 아래 여러 사람의 의견을 들어보라고 하면서 결정을 미룬다. 겉보기에는 좋아보이지만 실상 제일 피곤하고 주변사람들을 방전시키는 유형이다. 정작 자신이 결정해야 할 문제도 실패할까 두려워 어떻게 해서든 책임을 분산시키려 한다. 더 최악은 의견들을 실컷 수령해서 정리했더니 결정은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경우다.



개그우먼 장도연은 개그맨 양세찬과 개그콤비로서 몇 년 동안 호흡을 맞추고 뒷풀이 자리에서 '자기 주장'이 없다는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 배려하기 위해 그의 의견에 군말 없이 따른 모습을 오히려 책임회피로 느낀 것이다. 사안에 대해 자기 주장을 하지 않으면 책임감은 낮아지고 '내 일'이라는 결과가 안 좋은 때도 '내가 그럴 자기 책임이 없다고 여기기 쉽다.



'아, 그 일에 대해서는 안타깝게 생각합니다.'와 같 소위 '제 3자 화법', '유체이탈 화법'도 문제다. 자기가 책임져야 하는 일인데도 추궁받으면 다른 사람이 한 것처럼 자신의 존재는 쏙 빼고 말한다. 이 뿐만 아니라 우리가 평소에 즐겨쓰는 '개인적으로'라는 말도 책임회피용이다. 어차피 모든 말은 주관적이고 개인적인데 굳이 앞에 붙이는 이유는 뭘까? 비공식적인 발언이니 비난하거나 욕하지 말아달는 의미다. 그럴거면 왜 말하나?


셋째, 100% 객관적인 기획은 존재할 수 없다. 애초에 기획이란 객관적인 데이터를 근거로 주관적인 판단을 하는 업무다. 아무리 제 3자를 고려하고 데이터를 근거로 삼고 논리를 펼쳐도 판단의 주체는 감정으로 똘똘 뭉친 인간이며, 절대로 주관을 벗어난 판단을 할 수 없다. 이 사실을 모르면 기획서를 들고 온 기획자에게 '객관성'을 요구하는 황당한 상황이 발생한다. 객관적인 기획은 인간에게 불가능하다. 


만약 객관적 기획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어떤 상황이라도 모든 기획자가 동일한 결론을 내려야 한다. 왜? 똑같은 정보를 봤을 때 자신의 주관을 배제한다면 당연히 같은 결론이 나와야 하는 것이다. 이 말은 곧 기획자가 필요없다는 의미다. 완벽하게 객관적이어야 하는데 기획자가 무슨 필요가 있을까? 같은 상황이라도 어떤 '인사이트'를 발견하고 이를 통해 '문제 정의'와 '해결 방안'을 판단하는 능력이 '기획력'을 결정한다. 


3.

심지어 '정보'까지도 얼마든지 '주관적'일 수 있다. 로우 데이터를 가공하여 정보로 제공하는 기업이나 단체 역시 '주관'을 가진 '사람'이 운영하기 때문이다. 같은 데이터라도 편집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진다. 사실 객관이란 나를 제외한 '사람들'이 가진 주관의 총합에 불과하다. 심지어 '객관적 사실'도 있는지 의문이다. 가장 객관적이라고 알려진 뉴스도 사실 특정 관점 하에 사실을 편집하여 내보낸다.


다음은 1986년 영국 일간지 가디언의 광고다.


처음 영상에서는 남자가 도망친다. 카메라가 반대편을 비춘 두 번째 영상에서는 남자가 신사에게 공격적으로 달려든다. 길거리 전체를 보여주는 세 번째 영상에서는 남자가 무너지는 벽돌더미 아래의 신사를 구해주려는 모습을 담는다. 같은 사실이라도 카메라 앵글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 앵글을 관점이라는 단어로 바꿔도 의미는 동일하다. 내가 무엇을 보고, 무엇을 받아들이냐에 따라 사실은 조작될 수 있다.


믿기 시작하는 순간, 속기 시작하는거야! (출처: 시체가 돌아왔다)


하나의 사실도 이렇게 편집되는데 여러 가지 사건을 내보낼 때는 어떻겠는가? 정작 알려야 할 사실을 알리지 않고 대중을 호도하는 언론은 여전히 존재한다. 영화 <시체가 돌아왔다>에서 극중 류승범이 외친 '믿기 시작하는 순간, 속기 시작하는 거야!'라는 대사를 굳이 인용하지 않아도 우리는 진실이란 거짓이 밝혀지기 전까지만 진실로 존재한다는 진리를 잘 알고 있다.


이 세상이 이렇게 주관으로 가득차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객관에 더 높은 점수를 부여한다. 왜? 불안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한 명보다 여러 명의 생각이 확률상 더 낫다고 여기기 때문에 한 사람의 주관을 본능적으로 경계한다. 정부에서, 기업에서, 단체에서 회의를 거듭하는 근본이유는 손해보기 싫어서이다. 손실에 민감한 인간 특성상 객관성은 판단주체를 안심시킨다는 장점이 있다. 진실은 때로 불편하다. 


4.

물론 밑도 끝도 없이 무조건 자기 생각이 맞다고 하기에는 이 세상이 호락호락하지 않다. 본인의 주관성을 수면 위로 내보이기 위해서는 수면 아래에서 안정적으로 받쳐줄 객관성이 필요하다.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는 말은 그래서 유효하다. 실제로 내가 낸 아이디어가 알게 모르게 두달 전에 누군가에서 들었던 단어 하나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 나는 지금까지 겪은 경험의 합이다.



객관의 범위가 넓을 수록 주관은 강력해진다. 왜 여행과 독서 같은 경험이 중요하겠는가? 따지고 보면 객관이란 내가 아닌 타인의 주관이다. 타인의 주관을 다양하게 겪어봐야 이해관계에 휘말리지 않고 상관관계와 인과관계를 구분하는 명료한 가치관을 세울 수 있다. 따라서 가장 객관적이어야 가장 주관적일 수 있다. 극과 극은 통하는 법이다.


주관을 세우더라도 이를 표현하는 방법을 단련할 필요가 있다. 고집을 피우는 것이 아닌 합리적인 근거를 토대로 설득력 있게 주장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느슨하게 쥔 강한 의사표현(Strong Opinions Weakly Held)이 필요하다. 자신의 판단을 논리적으로 밀어붙이되, 언제든 자신이 틀릴 수 있다는 유연한 태도를 가진 사람들이 펼치는 담론은 감정소비가 덜하며 유쾌하면서도 생산적이다. 


5.

돈 받는 직장인이라면 자기 주장을 해야 한다. 주관적인 판단력을 가진 사람이 더 독창적이고 뛰어난 아이디어를 낼 수 있으며 따라서 이슈를 주도할 수 있다. 반대로 여론을 따르고 대세를 따르는 직장인은 영원히 따르는 사람이 될 수 밖에 없으며 운이 좋아 의사결정자가 된다고 해도 눈치 보느라 주변을 힘들게 만들 것이다. 테드 터너가 말했듯이 회사에서 우리가 취할 행동은 3가지다. 


테드 터너, CNN 설립자의 말


어차피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하면 되는데 뭐하러 그러냐고 묻는 사람에게 나는 이렇게 반문한다. '하나하나 다 지시해야 하고 자기 의견이 없는 팀원을 신임하고 중요한 일을 맡길 수 있겠어요?' 받는 만큼 일한다는 태도와 일한만큼 받겠다는 태도는 커다란 차이를 만든다. 이왕 회사에서 하루의 1/3 이상의 시간을 보내야 한다면, 이끄는 입장이 되어 더 성장하는 방향이 낫지 않을까? 내가 주관적인 직장인이 더 유능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다.


-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브랜드 부스터

- 가끔 요리하고 글 쓰고 노래하고 운동하는 남자.

- 본능적인 욕망을 추구하며 날것의 언어를 사랑하는 기획자.

- 종합광고대행사의 AE였다가 브랜드 마케터로 전향한 직장인.

- 세상을 브랜드로 이해하며, 브랜드 부스팅 전략을 탐구하는 마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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