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랜드 뿌리깊은 나무
"어떻게 한창기를 알지?"
이 나라를 대표하는 광고인이 나에게 물었다. 내 앞에 앉은 이는 박웅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CD), TBWA KOREA 제작 그룹의 리더였다. 나는 그 해 입사한 신입사원이었고. 그와 마주하며 ‘한창기’를 언급했다. 어떠한 이야기를 하다가 그의 이름을 꺼냈는지는 기억에 없다. 다만 그 때에 박웅현 CD가 해주었던 말은 생생히 남았다.
"한창기는 우리 세대의 비틀즈였지"
끝내주는 카피였다.
한창기
한창기는 1970년대 80년대의 아이콘이었다. 청년들에게는 비틀즈 이상의 존재였다. 그 청년들 가운데 나의 아버지도 계셨다. 세월이 흘러 아버지는 아들에게 이 근사한 위인을 소개해주었다. '한창기스럽다'는 말은 우리 부자의 최상급 표현이 되었다. 심지어 저 위대한 스티브잡스 조차도 우리에게는 ‘미국의 한창기’ 였다. 한창기는 원형이었다. 동시대에 그를 경험한 적은 없지만 그의 영향력은 시대를 초월함이 있었다.
그야말로 독자적인 삶이었다. 서울대 법대를 나왔지만 '엘리트'라면 판사나 변호사보다 '더 중요한 일'을 해야 한다 생각했다. 세일즈맨이 되었다. 미군부대에서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팔았다. 사내의 출중함은 태평양을 넘어 시카고의 브리태니커 본사에도 전해졌다. 한국 브리태니커사의 지사장이 되었다.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브리태니커 사전이 가장 많이 판매되는 나라가 되었다. 그 즈음이었을까. 한창기 사장은 돈 보다 의미가 앞서는 일을 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가 관심을 둔 곳은 점점 사라져가는 이 나라의 전통이었다. 저걸 부활시켜야겠다. 큰 돈이 되지 않을 사명이었다. 묘책을 짜냈다. ‘설득의 제왕’이 브리태니커 본사에 매달렸다.
"브리태니커를 뒤져 보면 한국에 관한 항목이 그야말로 쥐 불알만하게 실려 있는 바람에 한국 사람들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래서 지금 브리태니커 불매운동을 벌이려는 '불순한' 기운이 퍼지고 있다. 이쯤에서 불을 끄려면, '컨슈머리즘' 이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판매에 큰 걸림돌이 되기 전에 한국 문화를 제대로 담은 월간 잡지를 하루 빨리 내야 한다." (윤구병, 특집! 한창기)
설득은 통했다. '뿌리깊은 나무'의 탄생이다. 영어백과사전을 팔아 전통을 사는 일이었다. 이후 ‘뿌리깊은 나무’는 대한민국 잡지의 역사를 다시 썼다.
뿌리깊은 나무
한창기 선생의 맏아들 '뿌리깊은 나무'가 1976년에 세상에 나왔다. (평생 독신으로 살았던 한창기 선생은 자신이 발행한 두 잡지 ‘뿌리깊은 나무’ 와 ‘샘이 깊은 물’을 아들과 딸로 부르곤 했다) 경제발전이 모든 것에 우선하던 시절이었다. ‘세계화’, ‘현대화’는 지상명령이었다. 해외의 문물이 밀물처럼 밀려 들어와 추앙 받았다. 박혀 있던 돌은 굴러온 돌에 자리를 내주었다. 포크레인 소리가 우렁찬 굉음을 낼 수록 ‘우리의 것’은 뿌리 채 뽑혀나갔다. ‘뿌리깊은 나무’는 이러한 시대의 물줄기를 틀고자 했다. 모두가 필요를 느끼고 있으나, 모두가 눈을 감던 일이었다. 이 잡지는 우리 문화의 바탕이 ‘토박이 문화’에 있다고 보았다. 점점 자취를 감추어가던 토박이들의 삶을 취재했다. 연재된 기사의 제목들만 보더라도 이 잡지가 마음을 두었던 곳이 어디인지 분명하게 전해진다. ‘혼자 사는 외톨박이’ ‘민중의 유산‘ ’다시 읽는 한국 구전‘ ’이 땅의 이 사람들’...
창간호 표지에는 나이든 농부의 거친 두 손이 쌀을 한 가득 움켜쥔 사진이 실렸다. 토박이 문화의 정수가 이 한 장으로 그대로 전해졌다. 창간사에서 한창기 선생은 이렇게 적었다.
“뿌리깊은 나무는 우리 문화의 바탕이 토박이 문화이라고 믿습니다. 또 이 토박이 문화가 역사에서 얕잡힌 숨은 가치를 펼치어. 우리의 살갗에 맞닿지 않은 고급문화의 그늘에서 시들지도 않고 이 시대를 휩쓰는 대중문화에 치이지도 않으면서, 변화가 주는 진보와 조화롭게 만나야만 우리 문화가 더 싱싱하게 뻗는다고 생각합니다.”
읽히는 잡지의 탄생
한창기를 두고 '비틀즈'라고 한 박웅현 CD는 한 인터뷰에서 ‘디자인’은 ‘배려’ 라고 정의했다. 흔히 ‘디자인’이라고 하면 장식적인 요소 정도로 치부되지만, 그 본질은 누군가의 삶을 즐겁고, 편하게 해주려는 ‘배려’가 아니겠냐는 것이다. ‘뿌리깊은 나무’의 성공 비결도 이러한 ‘디자인’에 있었다. '토박이 문화'부터가 다루기에 만만치 않은 주제였다. 그 자체로는 거칠고 투박하여 읽는 쪽에서 쉽게 소화하기 힘든 면이 있었다. 텔레비전의 세례를 덜 받은 후미진 촌구석의 노인들의 삶 따위를 어떻게하면 잘 전달할 수 있을까. 현대적인 감각을 얹고, 보암직하게 가공해야 했다. 이것이 독자에 대한 예의이자 배려일 터였다. '뿌리깊은 나무'의 진가는 여기에서 발휘되었다. 토박이 문화를 당대의 가장 세련된 그릇에 담았다. 먹기 좋게 내놓았다. 이를 위해, 국내 잡지 시장에서 통용되어 오던 모든 금기를 깼다. (‘뿌리깊은 나무’의 초대 편집장을 지낸 윤구병 씨는 이를 두고 ‘열여섯 가지 금기를 무시하고 태어난 위험한 잡지’라고 했다.)
최초의 한글 전용 잡지였다. 초등학교만 나온 사람이면 누구나 막힘 없이 읽을 수 있게끔 만들었다. 당시는 모든 출판사들이 국한문 혼용을 해야 책을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하던 시대였다. 가뿐히 무시했다. 독자 입장에 서보면 바로 답이 나오는 문제였다. 독자들은 해방감을 느꼈다.
최초로 아트디렉션 체계를 도입했다. 인쇄소에서 잡지 디자인까지 맡던 것이 당시의 관행이었다. 한창기 선생이 ‘이 나라에서 디자인 눈썰미가 가장 좋은 사람’으로 인정한 디자이너 이상철이 잡지의 디자인을 총괄했다. 레이아웃이라는 개념이 생겼다. 글자 크기와 행간, 자간 등에 통일감을 주었다. 국내 잡지사 중에서 처음으로 애플컴퓨터를 들여온 것도 ‘뿌리깊은 나무’였다.
최초로 편집권을 실천했다. 필자의 원고를 고쳐 쓰는 ‘무례한 일’을 자행했다. '필자의 생각의 깊이를 다치지 않으면서, 필자의 말이 독자에게 제대로 전달되고 이해되도록 다리를 놓는 것'이 편집자의 역할이라고 믿었다. 필자들의 엄청난 항의와 반발을 감수해야 했지만, 독자들은 ‘알아듣게 쓰여진’ 잡지에 열광했다. 물론 '뿌리깊은 나무'는 독자의 편이었다.
그 결과, 생경한 토박이 문화를 가장 현대적으로 보여주는 희대의 잡지가 탄생했다. 전북대 강준만 교수는 ‘뿌리깊은 나무’가 특별했던 이유를 ‘우리 것 사랑하기’ 캠페인이 아니어서라고 했다. 대신 이 잡지는 ‘우리 것에 대한 제대로 된 감상‘을 도왔다. 구호가 아닌 제안이었다. 사랑은 캠페인이 되는 순간 망하니까. 느낌으로 통할 일을 외침으로 대신하는 순간 바로 죽어버리니까.
이런 잡지를 누가 볼까했는데 안 보는 사람 빼고 모두 보는 잡지가 되었다. 1980년 신군부에 의해 강제로 폐간되기 전까지 월 발행부수가 8만부를 넘나들었다. 당시에 나름 인기가 있던 ‘신동아’의 정기구독자 수가 2만부 정도였다.
할머니의 이야기
나의 할머니는 종종 당신의 근황을 나에게 들려주신다.(지근거리에서 나의 부모님과 함께 사신다.) 나를 키워주신 이야기, 당신의 증손자(나의 아들과 딸) 이야기, 해외에 있는 자식과 손주들 이야기, 병석에서 투병중이신 친구분의 이야기. 먼저 세상을 떠나신 할아버지 이야기....나는 듣는다. 가끔은 인내심을 요할 때도 있지만 최대한 경청한다. 할머니와 보내는 이 시간을 '당연한 것처럼' 흘러보내면 안될 것 같아서. 얼마 남지 않은 기회인 것 같아서. 할머니가 곧 '뿌리깊은 나무'인 것 같아서. 한창기 선생이 '뿌리깊은 나무'를 만들때 이런 심정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