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브랜드보이 Jan 01. 2019

[발뮤다] 내려놓아야 보이는 것들

브랜드 발뮤다

[슬램덩크] 스승의 말은 냉정했다. 서태웅은 산왕과의 경기 도중 안선생의 뜻을 이해했다. 스스로를 내려놓았다. 패스를 시작했다.
[쇼핑왕누이] 쇼핑으로 집 한채 날려본 적 있는 김숙이 말했다. "너 오늘 좀 쎈거 가지고 왔다." 발뮤다 토스터를 두고 한 말이었다. 죽은 빵을 되살리는 기적의 토스터기였다.
이 가게 빵 좀 굽는데?라는 생각이 들면 주방을 훔쳐보시길. 여지없이 발뮤다 토스터가 놓여져 있을테니. 백미당에서도 발뮤다 토스터를 사용한다.
남자는 극적인 삶을 살았다. 17세에 학교를 중퇴했다. 1년간 유럽을 여행했다. 록커로 10년을 살았다. 디자이너로 변신했다. 발뮤다를 창업해서 이끌고 있다.
발뮤다의 첫 제품인 노트북 거치대 <X-Base>. 반응은 나쁘지 않았다. 2주만에 300대가 팔렸다. 경제위기가 닥치자 주문이 뚝 끊겼다. 이때부터 고객의 '필요'를 고민했다.
신제품을 내놓을 때마다 발뮤다는 2,000개 이상의 시안을 제작한다. 가장 중요한건 제품의 '목적'이다. '디자인'보다 '목적'을 우선순위에 둔다.
발뮤다 토스터는 기억의 산물이었다. 그날 폭우 속에서 먹었던 빵 맛을 기억했다. 수분이 촉촉하게 스며드는 토스터기를 개발했다.
발뮤다는 잊혀진 기억을 소환한다. 가습기 <레인>을 보면 우리네 할머니의 모습이 떠오른다. 항아리에 물을 붓는듯한 형태의 낭만적인 가전이다.


발뮤다 제품은 튀지 않는다. 컬러는 정제되어있다. 매장에서든 집안에서든 홀로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는다. 주변과 잘 어우러진다.
발뮤다의 첫 번째 브랜드 매장이 도쿄 긴자에 생겼다. 마츠야 백화점 8층에 위치해있다. 발뮤다의 이름값에 비해서는 상당히 겸손한(?) 규모였다. 브랜드보이가 찾았다.
토스터기 옆에는 식빵과 물이 준비되어 있었다. 직원에게 "이건 전시용으로 두신거죠?" 라고 물어보니, 이 자리에서 직접 빵을 구워준다고 했다. 그리고 비닐장갑을 꺼냈다.
토스터기에 물을 넣고 몇 분을 기다리니 먹음직하고 보암직한 토스트가 완성되었다. 빵의 향을 맡고 다른 고객들이 몰려왔다. 함께 빵을 나누어 먹었다. 특별한 체험이었다.

“자네는 아직 윤대협을 이기지 못해”

안선생이 말을 던졌다. 제자의 가슴에 비수가 꽂혔다. 북산 고교의 에이스 서태웅이었다. 농구에 관해서라면 누구에게도 져본 기억이 없는 사내였다. 제자는 스승의 뜻을 알 수 없었다. 그 길로 윤대협을 찾아갔다. 1대1 승부를 신청했다. 해가 저물 때까지 치열하게 겨뤘다. 경기 후 윤대협이 입을 열었다.


"넌 네가 가진 재능을 충분히 쓰지 못하고 있어. 1대1도 공격기술 중 하나에 지나지 않아.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동안엔, 네게 지지 않아."


결정적인 힌트였다.


이후 정우성과의 대결에서 답을 얻었다. 고교 최강의 플레이어였다. 1대1로는 정우성을 넘을 수 없었다. '북산의 에이스가 무너졌다. 시합은 끝났다.' 경기장에 있는 모든 이가 같은 생각을 했다. 그 순간 서태웅은 나지막이 웃었다. 이거였구나. 안선생님과 윤대협이 말한 것이. 그리고 '패스’를 했다. 자기만 잘난 줄 알던 천재가 '팀플레이'에 눈을 떴다. 경기의 흐름을 북산 쪽으로 돌려놓았다. 강백호의 결승골을 어시스트 했다.
그날 서태웅은 스스로를 내려놓았다. 자신과 팀을 구했다.


일본의 가전 브랜드 발뮤다도 '내려놓아' 살아났다. 자신이 최고라 믿던 시절이 있었다. 확신과 오만함의 경계에서 춤을 추었다. 위기의 파도가 덮치고 나서야 생각을 고쳐 먹었다. 내려놓았다. 패스를 할 줄 아는 서태웅이 되었다.


연극

극적인 삶이었다. 어릴 적 부모가 이혼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모친이 사고로 세상을 떴다. 인생의 유한함을 느꼈다. 하루하루 전력을 다해 살기로 결심했다. 남은 생이 2,000년쯤 되는 건 아니니까.


17세에 고등학교를 중퇴했다. 1년 동안 스페인, 이탈리아, 모로코, 프랑스 등 지중해 연안의 나라를 여행했다. 유럽의 거리는 학교였다. 교실에서 배울 수 없는 ‘진짜 문물’을 접했다. 온몸으로 흡수했다. 평생을 두고 써먹을 ‘감각’이 되었다. 무한한 자신감을 얻고 귀국했다.


‘록스타’로 진로를 정했다. 음반사와 계약을 맺고 록밴드 ‘비치 파이터’를 결성했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여러분. 그 동안 제가 갈고 닦은 ‘미친 감각’을 보여 드리지요. 거칠 것 없는 청춘이었다. 스스로를 천재라 생각했다. 삶이 클라이막스를 향해 치닫고 있다고 믿었다. 딱 거기까지였다. 클라이막스는 없었다. 밴드의 음악은 뜨지 않았다. 그렇게 10년의 세월이 흘러갔다. 그 사이 오만함과 무지함, 무례함이 씻겨 내려갔다. 연극의 1막이 끝났다.


우연한 계기로 인생의 궤도를 수정했다. 여자친구의 집에서 네덜란드의 디자인 잡지 ‘프레임(Frame)’을 만났다. 기타를 내려놓았다. 디자인 서적을 들었다. 명함에 ‘제품 디자이너, 테라오 겐’이라 새겼다.


매일 아키하바라 전자상가, 도큐 핸즈(Tokyu Hands)로 출근했다. 제품을 보고 또 보았다. 오만 가지 질문으로 직원들을 괴롭혔다. 얼기설기 그린 제품 도면을 들고 공장을 찾았다. 시행착오를 되풀이했다. 실패에서 배웠다. 그대로 실력이 되었다. 쓸만한 시제품이 나오기 시작했다. 나날이 자신감이 더해졌다. 30세가 되던 해 ‘발뮤다 디자인’(2011년 발뮤다로 회사명 변경)을 설립했다. 연극의 2막이 올랐다.


위기는 기회

테라오 겐 대표가 유일한 직원이었다. 스스로의 감각을 믿었다. 시장조사 따위는 없었다. 록커 출신이었으니까. 곡을 만들 때 “어떤 곡이 듣고 싶으신가요” 라고 묻는 록커는 으니까. 본인이 가지고 싶은 물건이라면 다른 이들에게도 마찬가지일거라 생각했다. 알루미늄으로 만든 노트북 거치대, 탁상용 스텐드 등을 내놓았다. 디테일에 목숨을 걸었다. 반들반들 윤이 나는 표면을 위해 도장을 세 번이나 하는 식이었다. 문제는 가격이었다. 노트북 거치대가 무려 35만원이었다. 몇 년 동안은 근근이 판매가 되었다. 2008년 세계 경제위기가 터지자 주문이 끊겼다. 3,000만엔의 빚이 생겼다. 도산을 3개월쯤 앞둔 상황에서 겸손해지지 않을 이는 없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왜 고객들은 우리 제품을 외면할까.


그 후로 9년의 세월이 흘렀다. 지금 발뮤다는 90억엔(약 900억원)의 연 매출을 올리는 브랜드다. 직원은 90여명에 달한다. 발뮤다의 팬들은 갈수록 그 수가 더해진다. 망하기 직전의 영세 브랜드가 세계적인 가전 브랜드로 도약하는 중이다. 비법은 하나였다. 발뮤다는 내려놓았다. 이전까지 성공의 지름길이라 믿고 움켜쥐던 것들을 포기했다. 부활했다. 옛말은 틀리는 법이 없었다. 위기는 곧 기회였다.


혁신을 내려놓았다

고객의 필요가 보였다

 

고객 탓을 했다. 솔직히 서운했다. 이토록 멋진 디자인을 못 알아보다니. 안목이 이렇게나 떨어지다니. 생존의 갈림길에 서자 겸손해졌다. 빳빳했던 고개를 숙이고 실패의 이유를 찾았다. 한가지 문제가 분명해졌다.


“고객들에게 발뮤다의 제품은 필요가 없었다.”


혁신적인 제품이었다. 고객의 생각은 달랐다. 멋지지만 쓸모 없는 제품이었다. ‘아름다운 쓰레기’였다. 내가 이상적으로 생각한 제품과 고객이 원하는 제품이 결코 일치하지 않았다. 그때부터 ‘혁신'에 대한 강박을 내려놓았다. 시선을 돌렸다. 사람들의 생활을 들여다 보았다. 특별한 기능보다 고객의 ‘필요’를 고민했다. 이미 존재하는 가전에서 ‘필요’가 보였다. 선풍기였다. 시중에 나온 선풍기의 바람은 당장은 시원하지만 오래 쐴수록 기분이 불쾌해졌다. 선풍기 바람이 만들어내는 소용돌이가 주범이었다. 자연 바람처럼 기분 좋은 바람이 ‘필요’ 했다. 바람이 닿는 날개 면적을 넓히고 특수 모터로 소음을 최소화한 선풍기를 내놓았다. 그제서야 고객은 '필요'느꼈다. 40만원이 넘는 가격에도 날개 돋친 듯 팔렸다.


토스터기에서도 필요를 보았다. 겉은 바삭 하고 속은 폭신한 빵을 만들 수는 없을까. 빵 안에 수분을 채워 넣는 '궁극의 토스터'를 개발했다. 발뮤다의 토스터로 빵을 구운 자마다 ‘죽은 빵도 살려낸다’는 소문을 내기 시작했다.


가습기에 필요를 보았다. 매번 물탱크를 꺼내고 끼우는 일은 거추장스러운 일이었다. 물탱크를 없애버렸다. 항아리 모양의 가습기 본체에 물을 붓는 ‘낭만적인’ 가습기가 탄생했다. 사용할 때마다 도자기를 빚는 듯한 체험을 할 수 있었다. 이 정도면 가전이 아니었다. 작품이었다.


이제 발뮤다는 애써 혁신하려 하지 않는다. 새로운 장르의 가전을 만들려 하지도 않는다. 고객의 필요만 수집할 뿐이다. 그런 발뮤다에게 ‘혁신적’이라는 찬사가 쏟아진다. 역설이다.


디자인을 내려놓았다

제품의 목적이 보였다


“'아름다움’이 아닌 ‘맛있음’을 디자인한 첫 번째 프로젝트”     


발뮤다 토스터를 개발한 직원의 말이다. 많은 이들이 발뮤다 하면 디자인을 떠올린다. 군더더기 없는, 세련된 디자인을 두고 ‘2의 애플’이라 말한다.


지난날, 발뮤다에 ‘디자인’은 절대선이었다. 사소한 부분까지 신경을 쓴 아름다운 가전제품에 목을 맸다. 지금은 아니다. 가전의 '목적'이 우선이다. 디자인은 거들뿐이다. 즉, 토스터로 구운 빵의 ‘맛있음'이 토스터 자체의 ‘아름다움’보다 중요하다.


“서툰 스페인어로 갓 구워낸 빵을 받아서 한 입 베어무는 순간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목적이 우선이다. 토스터가 존재하는 목적은 ‘빵 맛’을 높이기 위해서다. 그렇다면 ‘맛있는 빵’의 그 ‘맛’이 어떠한 ‘맛’인지는 어떻게 알 수 있는 걸까. 발뮤다는 고객에게 묻지 않는다. 스스로에게 묻는다. 과거를 반추한다. 인생을 통틀어 가장 맛있게 먹었던 ‘빵'에 대한 기억을 소환한다.

17세 소년 타라오 겐이 스페인 론다 지방에서 처음 먹었던 빵이 그랬다. 낯선 이국 땅에서 빵을 베어 문 순간 긴장과 피로가 풀렸다. 불안하고 힘들었던 감정들이 눈물이 되어 쏟아져 나왔다.


다음의 기억은 직원들과 바비큐 파티를 한 날이다.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고, 재미 삼아 숯불에 빵을 구웠다. 겉은 바삭하면서 속은 촉촉한 '미친' 토스트를 맛보았다. 두 개의 강렬했던 기억이 하나로 모였다. ‘그때의 그 빵 맛’을 구현하는 토스터 개발이 시작되었다. 늘 이런 식이다. 발뮤다는 기억을 소환한다. 히트제품이 탄생한다.


“기억하는 최고의 방법은 감동하는 것이다.”


TBWA KOREA 박웅현 대표의 말이다. 창의적인 생각은 기억에서 비롯된다. 필요한 순간에 기억이 나와주어야 한다. 쟁여둔 기억이 많으면 많이 나온다. 그 반대라면 적게 나온다. 기억들끼리 부딪혀 화학작용을 일으키기도 한다. 이건 덤이다.


감동하여 얻은 기억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사소한 데에 소름 돋을 줄 아는 사람이 그래서 유리하다. 남들은 무심코 흘려 보내는 생각을 붙잡는다. 기억한다. 참신한 생각의 재료로 쓴다.


발뮤다는 창의적인 집단이다. 감동받는데 천재들이다. 행복했던 순간의 기억을 겹겹이 쌓아둔다. 가전으로 만든다. 어느날 창문 사이로 불어온 기분 좋은 바람은 그린팬(선풍기)이 된다. 할머니에 대한 그리운 기억은 항아리에 물을 붓는 형태의 레인(가습기)이 된다.  


기억이 제품이 된다. 무형의 사유가 유형의 제품이 되는 기적이다. 결국 고객의 기억마저 상기시킨다. 고객이 언젠가 경험한 상쾌한 바람의 느낌, 맛있게 먹었던 토스트, 어릴 적 보았던 할머니의 모습이 되살아난다. 고객은 생각에 잠긴다. 행복해진다. 기꺼이 중국산 제품보다 5~10배나 되는 가격을 지불한다.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주연을 내려놓았다

주변이 보였다


단어의 쓰임은 시대의 반영이다. 한때 ‘패션 피플’이라는 단어의 주가가 높았다. TV에도 잡지에도 일간지에도 ‘패피’가 등장했다. 방점은 보통 ‘피플’보다 ‘패션’에 찍혔다. ‘패피’라 불리는 이들을 보면 대개 '사람'보다 '옷'이 보였다. ‘패션’이 ‘피플’을 집어삼킨 형국이었다. 주객의 전도였다. ‘패션’은  목소리가 컸다. “이 구역에서 내가 제일 잘나가.” 홀로 튀려는 욕망 앞에 자연스러움의 자리는 없었다. 그럼에도 이 단어는 핫했다. 지금은 아니다. 쓰이는 빈도가 확연히 줄었다. 그 자리를 ‘놈코어’ ‘휘게’ 같은 단어들이 대체했다.


“요즘 세대의 디자이너는 가전제품을 ‘가전’이라 부릅니다. 과거에는 항상 ‘가전제품’으로 불렸습니다.”


SWNA 이석우 대표의 말이다. 예전에는 가전을 하나의 독립된 ‘제품’으로 인식했다. 디자이너는 제품을 주인공으로 만들려고 했다. 화려하고 튀었다. 거실에서 제품만 도드라졌다. ‘패피’였다.

시대가 변했다. 이제 가전은 공간에 놓이는 물건으로 인식된다. 조화가 우선이다. 발뮤다의 인기는 이러한 시대적 흐름의 반증이다. 발뮤다는 주변과 잘 어우러진다. 그 뒤에 타라오 겐 대표의 내려놓음이 있었다.


창업을 한 후 오랜만에 기타를 잡은 날이었다. 기타를 연주하는 동안 선풍기 생각이 전혀 나지 않았다. 희한한 체험이었다. 자나깨나 선풍기 생각만 할 때였다. 고객도 마찬가지겠구나. 세상에 선풍기를 이렇게나 생각하는 사람은 나뿐이겠구나. 당시 타라오 겐 대표에게는 선풍기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물건이었다. 고객에게 선풍기는 그냥 선풍기였다. 선풍기보다 중요한 건 이 세상에 차고 넘쳤다. 집안만 봐도 테이블, 의자, TV 같은 쟁쟁한 주인공 후보들이 있었다. 선풍기는 주연 ’깜’도 아니었다. 주제파악을 마쳤다. 주연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았다. 어느 공간에서나 잘 어울릴 줄 아는 ‘조연’의 역할에 충실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존재감을 억누르기 시작했다.


“노력하고 고민한 흔적을 굳이 소비자에게 드러내고 싶지 않습니다.”


발뮤다는 독종이다. 신제품을 출시하기 전까지 2,000개가 넘는 시안을 테스트 한다. 무시무시할 정도로 회의에 회의를 거듭한다. 디테일에 대한 강박은 유명하다. 그러나 발뮤다는 이렇게 노력한 흔적을 굳이 드러내려 하지 않는다. 도리어 과하지 않도록, 꾸며낸 듯 보이지 않도록 경계한다. 스스로 설 자리를 잘 알기 때문이다. 자신을 낮추고 주변과의 조화를 살피려 한다. 발뮤다의 내공이다. 그리고 소비자들은 이런 ‘진짜 베기’를 알아보지 못할 만큼 눈이 어둡지 않다. 주연의 자리를 내려놓고, 낮은 데로 임했다. 결국 발뮤다는 주인공이 되었다.



내려놓으면 보이는 것들


“발뮤다 토스터는 절대 사면 안돼. 엄청 살쪄.”


지인의 충고에 웃었다. ‘죽은 빵도 살려낸다’는 발뮤토스터의 위력이 그대로 전해져서. 발뮤다를 써본 사람들은 한 목소리를 낸다. 발뮤다로 인해 생활이 달라졌다. 이제는 발뮤다 없이는 못살겠다. 일종의 신앙고백이다.


발뮤다가 여태 출시한 제품은 10종이 채 되지 않는다. 새로운 장르의 가전을 창조한 적도 없다. 그럼에도 발뮤다는 지구상에서 가장 사랑 받는 가전 브랜드가 되어가는 중이다. 내려놓음이 비결이다. 내려놓으니 고객이 보였다. 처음으로 고객을 '제대로' 보았다. 필요를 보고, 그 안에서 제품의 목적을 고민했다. 고객이 머무는 공간에서 가전이 놓일 위치를 보았다. 스스로를 내려놓고 고객을 보는 것, 거창한 일이 아니었다.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일이었다. 답은 가까이에 있었다. 터무니없을 정도로 단순했다. 진리라는 것이 원래 그랬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