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제에서

289 걸음

by 고성프리맨

고성에서 인제까지는 그리 멀지 않다. 하지만 특별한 동기 없인 잘 안 움직이는 편이라 아직까지도 많은 곳을 가보진 못했다.


"인제가 자연환경이 그렇게 좋다던데 한번 놀러 갔다 올까?"


겸사겸사해서 실로 오랜만에 가족 소풍을 인제로 다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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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로 간 곳은 '원대리 자작나무숲'이었다. 검색해 보니 유명한 곳이기도 하고 자연경관을 오롯이 느낄 수 있다고 한다. (게다가 가격도 무료! 이게 전부는 아니었지만...) 주차장비는 5,000원이었다.


"어, 좀 비싼데..."라고 생각했지만,

"인제상품권으로 5,000원 지급되니까 이걸로 가맹점에서 뭐 사드시면 돼요."라고 하는 게 아닌가.


?!?!


그러니까 5,000원어치 인제 상품권을 사서 쓰는 개념이렷다?


'괜찮은데?'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한 방법치고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주변 상권 가격도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 자, 상품권은 상품권이고 여하튼 우리의 주 목적지는 자작나무 숲 정상이다. 정상을 향하여 출발!!


[A few minutes later...]


20분 정도 지났을까. 지치기 시작했다.

올라가는 길은 잘 닦여 있었는데 무릎도 아프고, 덥고, 그냥 다 짜증 났다.

추가로 둘째도 내 성미를 닮아서인지, "아, 재미없어. 지겨워. 힘들어. 더워. 내려갈래요."를 연발하는 게 아닌가. 순간 '잘됐다' 싶어서 나는 첫째와 아내에게 하산을 고하고 둘째와 함께 밑으로 내려왔다.


"아빠 잘 가요! 저는 정상까지 찍고 갈게요."


평소엔 저질체력처럼 보이던 첫째였는데 이상하게 산에만 오면 힘이 펄펄 나는듯하다.

사실 아내도 하산하고 싶었지만 아이 혼자 올려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라 결국 내대신 등산을 하게 됐다.

오랜만에 둘째와 단둘이 손 붙잡고 내려오는 시간을 선사받았다.

우리는 쉴 새 없이 재잘거렸다.

주로 아이가 내게 이런저런 근황을 얘기했는데, 생각보다 듣는 재미가 쏠쏠했다.


같은 학원생 형이 양양으로 이사가게 돼서 슬프다는 얘기,

오랜만에 다 같이 놀러 나와서 즐겁다는 얘기,

반에서 달리기는 본인이 가장 잘한다는 얘기(학생수가 10명 정도 되던가... 그래도 뭐 자신감이 있는 건 좋은 거니까!),

형은 이상하게 산에만 오면 기운이 펄펄 난다는 얘기 등.

평소에 나누지 못했던 여러 얘기를 듣다 보니 어느새 입구까지 도착했다.


"아이고 고생했네. 너 목공에 관심 있니?"


우리 곁에 가이드 쌤 한분이 다가오셨다.


"네. 목공 좋아해요."

"그래? 잘됐다. 그럼 저기로 이동해서 만들어볼까? 아버님은 옆에서 아이 보조해 주세요."


산행을 포기한 대신 목공 체험을 할 수 있게 될 줄은 몰랐는데.

역시 인생은 알 수 없는 법이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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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공 체험을 마치고 우리는 차로 돌아와 휴식을 취했다. 잠시 후(라기엔 50분 정도 기다렸다) 아내와 첫째도 무사히 하산했다.


"와... 직접 봤어야 됐는데. 진짜 영화의 한 장면 같았어!"


아내는 좀처럼 풍경을 보고 극찬하는 사람이 아닌데, 좋긴 좋았나 보다.


"다음에 또 올 수 있어요?"


첫째도 만족도가 높았나 보다.


"난 다음에도 안 갈 건데?"


둘째는 여전히 툴툴거렸고 마지막으로 내 대답은,


"그래. 다음에 또 오자. 그때도 올라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는데."


다음을 기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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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당에서 밥을 먹는데, 자동차 경주 영상이 나오고 있었다.


"우와. 아빠 저기 인제라는데요?"

"응?"

"인제 스피디움? 이라네요."


아... 들어봤다. 알게 된 지인으로부터 카레이싱의 성지 인제라며 들었던 적이 있다.


"밥 먹고 한번 가볼까? 숙소에서 엄청 멀지도 않은데."

"네 좋아요!"


식사 후 스피디움을 향해 출발했다.

가는 길은 상당히 구불구불했다.


'이렇게 외진 데에 서킷이 있다고?'


한참을 달려서 도착하니 스피디움의 웅장한 입구가 반겨주었다.

그런데 사람은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일단 차로 들어가 한 바퀴 돌아봤다.

다행히 주차차단기가 내려져 있지는 않아 차로 구석구석 돌아볼 수 있었는데,

사람이 한 명도 없어서 그런가 왠지 스산했다.

만약에 혼자 구경 왔다면 기묘한 스산함에 압도당해 후다닥 도망쳤을지도 모르겠다.


"별 거 없네요? 넓기는 엄청 넓다."


경기가 열리지 않는 날의 풍경은 이러한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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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가보지 못한 '백담사'랑 '기적의 도서관', '십이선녀탕'이 있긴 한데 하루 안에 다 돌아볼 수는 없었다.

다음을 기약하며 우리는 노곤한 몸을 누이러 숙소로 향했다.


도착 후, 샤워를 마치자마자 침대에 누웠다. 비로소 평온함이 찾아왔다.

여행 참 좋긴 한데, 그래도 집이 최고구나.

그래도 오랜만에 다 같이 놀러 와서 잠도 자고 나쁘지 않았다.

무엇보다 애들은 집을 떠나 낯선 곳에서 자는 경험도 상당히 즐거워한다.

자주까지는 아니더라도 가끔씩은 익숙한 곳을 벗어나, 낯선 생활을 해보는 것도 필요한 거 같다.


"아빠. 다음에 또 다른 펜션 가서 자고 싶어요."


내게는 집이 최고였지만, 아이에겐 이 순간의 경험이 더 좋게 다가왔나 보다.


"그래. 다음에 다른 데도 가자."


약간의 불편함 정도는 감수하지 뭐. 원래 그런 게 여행이라는 거 아니겠어.

네가 좋다는데 이 정도쯤은 아무것도 아니지.


'내 여행의 목적은 바로 너의 웃는 모습을 보는 거니까.'


어느새 인제에서의 하루가 저물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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