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気配りがないね(키쿠바리가나이네)
일본어를 배운다는 건 단순히 외국어 하나를 추가하는 일이 아니라 그 나라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엿보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언어는 결국 문화의 표면이니까.
우리가 일본인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들이 있다.
“겉과 속이 너무 다르다더라.”
“참 피곤하게 산다.”
“앞에서는 웃고 뒤에서는 험담한다던데.”
나도 한때는 그 말을 그대로 믿었다.
혹시 내가 겪은 불편한 경험도 한일 감정 때문은 아닐까, 그들도 여전히 한국인을 미워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렇게 단순하게 정리해 두면 마음이 편했다.
하지만 일본 문화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면서, 오해가 좀 풀렸다.
흔히 말하는 ‘혼네’와 ‘다테마에’.
본심과 겉으로 하는 말의 차이.
설명은 간단하지만, 실제로는 꽤 복잡한 감각이다. 말의 표면이 아니라 결을 읽어야 한다. 이 말이 예의인지, 진심인지, 거절인지, 완곡한 부탁인지.
이를테면 이런 것들.
“언제 한 번 밥 먹어요.”
그 말이 반드시 약속을 의미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
“괜찮아요.”
그 말이 정말 괜찮다는 뜻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
이 정도면 시식 정도는 된 셈일까.
아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난 일본 가면 아무하고도 안 친해질 것 같아. 너무 피곤해.”
듣기만 해도 숨 막힌다는 표정이었다.
그런데 나는 이상하게도 다른 생각이 들었다.
‘그게 왜 문제지?’
물론 직접 살아본 것도 아니다. 그저 상상일 뿐이다. 그런데도 마음이 움직였다.
아마도 몇 년 전의 한 사람 때문일지도 모른다.
형이라 부르던 사람이 있었다. 그는 너무 즉흥적이었다. 내 마음속 거리는 아직 천천히 좁혀지고 있었는데, 그는 이미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약속은 최소 2~3일 전에는 정하고 싶었다. 마음의 준비라는 게 필요했다. 하지만 그는 늘 예고 없이 등장했다.
“지금 갈게. 안 바쁘지?”
그리고는 집 앞이었다.
거절을 잘 못하는 나는 결국 나갔다. 이미 도착했다는 말 앞에서 “다음에 보자”라고는 도저히 상대에게 말할 자신이 없었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선약 없이 움직이기는 힘든 사람.
어쩌면 그래서 친구가 없는 걸까, 하는 생각도 스쳤다.
그와 나 사이의 감정은 조금씩 어긋났고, 결국 마지막에는 카페에서 서로의 입장만 확인한 채 돌아섰다. 이해받지 못했다는 기분과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는 기분이 엉켜 있었다.
그 뒤로는 만나지 않았다.
그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나는, 나와 비슷한 속도로 움직이는 사람들이 많은 곳을 원하고 있는 건 아닐까.’
단순히 일본의 ‘혼네’ 문화가 좋다기보다,
관계를 서두르지 않는 분위기를 기대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일본어로 ‘키쿠바리(気配り)’는 배려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키쿠바리가나이네’라고 하면 “배려가 없네.”라는 말이 된다.
내게 배려란 다정한 말 몇 마디보다,
함부로 다가오지 않는 태도에 가깝다.
침묵을 침묵으로 두어 주는 것.
거리를 조심스럽게 재는 것.
어쩌면 나는 일본을 동경하는 게 아니라, 내 마음의 속도를 존중받는 세계를 상상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물론 안다.
겪어보지 않은 세계는 언제나 조금은 이상적으로 보인다는 걸.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져보지 못한 방식의 관계를 한 번쯤 꿈꿔보는 일까지
포기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아직 가보지 않은 나라의 언어를 배우는 이유는
결국 그곳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곳에서 어우러지는 나를 상상해보고 싶어서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