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3 걸음
"오빠 버릴 거니까 준비해 놔 알았지?"
드디어 올게 온 것인가라는 생각에 아내의 말을 듣자마자 화들짝 놀랬다. 이제 도장만 찍으면 홀로서기를 하게 되는 것인가...
"난 사실 아직 마음의 준비가..."
"뭐래. 마음먹었을 때 해치워야 한다고."
잔인한 사람. 당신은 이미 오래전부터 차곡차곡 준비하고 있었을지 몰라도 난 아니란 말이야.
"왜 그러는데 아까부터? 오늘 무조건 버릴 거 두 개 꺼내놔 알았지? 내가 요즘 미니멀리즘에 빠져 있는 거 안 보여? 알아서 장단 맞추라고!"
"어..? 어. 그 얘기였구나. 다행이다."
"뭐가 다행인데?"
"응. 그런 게 있어."
얼마 전부터 아내는 갑자기 집에 있는 자질구레한 것들을 버려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솔직히 백수 된 시점부터는 딱히 모은 것도 없는데 "오빠 것만 버려도 집이 널널해질거야."라며 계속 괴롭히는 게 아닌가.
"아니. 눈치 주는 거잖아요. 그쯤 하면 알아듣고 알아서 먼저 서류에 찍어주세요."
그런가? 내가 눈치가 너무 없었나?
아니. 실은 알면서도 버티고 있는 건데?
원래 불리할 때 바보처럼 행동해야 가늘고 길게 갈 수 있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다.
"장난 그만하고 빨리 버릴 거 꺼내놔. 옷이든 쓸데없는 박스 같은 거든 알아서 꺼내놔! 오늘 할당량 2개다? 오케이? 가장 님 일하고 올동안 꼭 꺼내놔."
그나저나 뭘 버려야 한다는 거지?
가진 것 중 대부분은 책이긴 한데... 안 읽고 있긴 하니 버리는 게 맞으려나.
가뜩이나 가진 옷도 없는데 다 버리고 나면 이제 뭐 입지?
미니멀리즘 같은 거엔 관심도 없는 내겐 꽤나 가혹한 미션이다.
아내는 실제로 행동하길 좋아하는 사람이라서 잘 입고 다니던 바지도 전부 버렸다.
"그래서 입을 게 없어. 새로 사야 해."
아니 새로 살려고 그냥 버린 거 아니야?
당최 이해가 안 되지만 그러려니 해야지.
아내의 말처럼 가장이시니까.
새로 사기 위해 버리는 걸 미니멀리즘이라 불러도 될까?
마치 채식한다면서 "실은요. 저는 생선은 먹어요 오호홓." 하는 거랑 비슷하잖아. (절대로 특정인 디스 아닙니다)
그나저나 아내가 돌아오기 전까지 버릴 걸 꺼내놓긴 해야 하는데 야단 났네.
버릴 건 못 찾았고 이대로 내일이 되면
"내일은 3개 버려야 함. 아니지 내일 것까지 합쳐서 총 5개! 페널티 부여!"
싫음. 싫음. 싫음.
그래도 어쩔 수 없지 뭐. 절이 싫지 않으니 중인 내가 떠날리는 없다는 사실.
결국 버릴 거 찾아 삼매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