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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rantrcm Sep 11. 2015

01. 현재

- 이제는 무뎌졌다고 말(해야만)했다.

쉽사리, 도저히, 평생을, 죽기 전까 지도

오지 않을 것 같던 무뎌짐의 순간이 내게도 드디어 왔다.

하루 온종일 방황하며 흘려보냈던 시간들을 이제는 여기 내 앞에 끌어다 앉히고 

'자 이젠 무얼 할까?' 하며 계획이란 걸 잡을 수 있을 만큼 나는 무뎌졌다.


그런데 왜인지 모르게 내 하루의 시간은 툭 툭 끊긴 기차의 선로처럼 

각각의 시간에, 각각의 장소에서, 각각의 기억으로 나누어져 깨어난다.


지금은 과정을 알 수 없는 등산을 한 모양이다.

산 정상에 내가 서 있더라. 

마치 다른 사람이 내가 자는 사이 여기 버려두고 간 기분이다.


이왕 정상까지 온 거 소리는 한번 질러야지 싶어 있는 힘껏 내지른 소리는 

대결이라도 하듯 내 귀로 돌아와 나의 말을 흉내 낸다. 

아니다. 이건 대화다. 흉내 내서 돌아오는 소리가 아니다. 

내가 야 하고 부르면 왜 하고 받아친다. 

다른 누군가가 있나?

아니다. 여기는 나 하나다.

나는 혼자 여기에서 내가 나를 불렀다가 내가 나에게 대답했다가 다시 또 내가 나에게 대답을 한다.


무뎌진 게 아닌가 보다. 


그래! 무뎌졌다고 스스로를 속였나 보다. 

아니면 무뎌짐이란 단어가 조금은 나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란 마음에서

경솔하게 무뎌졌다고 그렇게 내뱉었겠지!


아! 나는 무뎌진 게 아니었구나.


사실 나는 무뎌짐이 싫다. 내 안에 쌀알만큼 남아있는 너에 대한 감정에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언젠가 네가 돌아오게 된다면 무뎌짐이란 단어가 얼마나 절실했으며 동시에 얼마나 싫었는지 설명해야지!




조각 같은 기억이 지속된다.

또 다른 곳에 나는 서 있다. 지금은 아까처럼 산 정상이구나 하는 느낌마저도 없는

암흑.


일단 걸을까?


한 발자국을 채 내딛기도 전에 (허공에 다리가 반은 들린 채로) 멈췄다.

내 앞은 온통 물이다. 

빛이 하나도 없는 곳에서 어둠에 익숙 해질 즈음 나는 여기가 산 아래의 계곡이란 걸 알았다.

내가 서있는 돌 위 말곤 사방이 물이다. 

끊어진 기억 사이의 과정을 추측해보려 해도


이건 너무하잖아.

무뎌졌다고 한 것에 대한, 내 안의 너를 무시한 것에 대한 벌일까?


계곡이 많이 깊지 않은 듯 보인다. 


건너갈 수 있을 것 같은데..


이 계곡을 건너갈 왠지 모를 용기가 생겼다. 


너에게 무용담으로 들려줄 수 있지 않을까? 언젠가. 


나는 절대 무뎌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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