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좀 생태주의자라

by Sejin

1. "물티슈 하나만 줘"

"휴지로 닦고 물로 한번 손을 닦아"

"응?"

"아, 내가 좀 생태주의자라"


점점 더 참기 어려운 세상이 되어간다

대체 왜 이렇게 물티슈를 많이 쓰는지 모르겠기 때문이다.

저 물티슈는 썩지 않는데, 말랑해보여서 그렇지 다 플라스틱인데.

지금 조금 편하자고, 뭐 좀 흘리고 떨어졌다고 대체 이렇게 많은 물티슈를 써도 된다는 생각은 어떻게 하는거야? 나한테 그럴 권리가 대체 어딨냔 말이야?


2. 언제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그냥 어릴 때부터 비가 와서 길에 나왔다 말라 죽는 지렁이가 불쌍했고,

통통한 밤벌레가 귀여웠고,

꽃을 함부로 꺾거나 나무에 상처내지 않아야 할 것 같았고,

무심코 손에 들고 있는 쓰레기를 길바닥에 버리는 것은 불편했다.


그래서 지렁이가 살아 있으면 나뭇가지에 살짝 걸쳐 축축한 땅 위에 올려놔주었고

과일을 먹다 애벌레가 나오거나 상추를 씻다 달팽이가 나오면 며칠은 더 살려보겠다고 야물지도 않은 손으로 집 비슷한 것들을 만들어주곤 했다

꽃다발보다는 화분 선물이 좋았고,

어쩌다 꽃다발을 받게 되면 수돗물을 받아 잠시 시간을 두어 물의 윗부분만 화병에 넣고 콜라 조금을 넣거나 설탕 조금, 소주 조금 넣은 물에 담갔다. 그렇게라도 꽃을 오래 보관해두고 싶었다.

채식은 시도해봤지만 바깥에서 음식을 사먹기가 너무 어려웠던 탓에 2주만에 그만 두고,

부족하게 느껴지더라도 음식을 남게 먹지는 말자는 혼자만의 다짐을 했다.

어쩌다 1회용 물티슈가 생기면 가급적 쓰지 않고, 모으고 모았다가 어떻게든 여러 번을 쓰거나 뽑아 쓰는 물티슈는 쓰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쓰레기통 찾는 것도 좋아한다. 보통은 바닥에 못 버려서 집에 쓰레기를 들고 오기 일쑤다.


(뭐 그렇다고 해서, 매번 그러냐하면 아주 그렇지도 않으므로, 누군가는 너 예전에 ~~~ 했잖아 하며 위선적/이면적인 내 모습을 더 기억할지도 모르겠지만, 내 마음 편한 방향은 그렇다는 것이다. 지향, 지향!)


3.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계기는, 결혼.

워낙 깔끔한 남편은 좀 잘 흘리고 먹는 내 옆에, 꼭 식사가 시작되면 물티슈 한장을 뽑아놓았다.

계속 신경쓰였다. 나를 챙겨주려고 한 매너인데 지적하면 괜히 민망할까봐, 괜찮아. 괜찮아만 했었다. 그러다 어느 날은 진지하게 말했다.


"있잖아, 나 좀 생태주의자라, 물티슈 쓰는 거 싫어해"


적잖이 놀란 눈치였다.

"그래서 맨날 물티슈 됐다고 한 거야?"


"놀랍겠지만, 웅. 사실 물티슈도 내가 직접 산 적 없어. 엄마가 하도 박스로 주문하니까 집에서 하나씩 가져오긴 하는데, 그것도 싫어해. 나는 행주쓰는 거 좋아해. 손도 식탁도, 다 먹고 물로 한번 닦으면 되잖아. 저거 분해되는데 백년 넘게 걸린대..."


불쌍한 어린 애 보듯 물티슈를 보며 속상해하는 내가 잘 이해는 안되어 보였지만

그 이후로는 물티슈를 먼저 꺼내놓지는 않는 남편이었다.

도저히 못참겠을 때만, 이번만 물티슈 쓰면 안되냐는 질문하기 정도로 타협했다.


아기가 있는 친구들은 아기 낳아보라며, 물티슈의 소중함을 그때는 알게 될 수도 있을 거라 말한다.

그래, 그럴 수도 있겠지.


그런데, 난 내가 좀 귀찮고 힘들어도 말야,

왠지 내가 버린 분해 안 되는 쓰레기들이, 내가 의식 못하고 죽인 어떤 생명들이, 어딘가에 둥둥 떠서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것만 같아. 그냥 그런 답답한 느낌이 있어.

가볍고 싶어 조금 더. 더 책임이 있고 싶어. 나는 그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어. 그냥 나는 좀 그래.


내가 뭘 대단한 것을 해내지는 못할 것 같다.

태평양 어디에 있다는 거대한 쓰레기 섬에 가서 그 쓰레기를 치우는 일을 하기도 힘들 거고

커피마실 때는 빨대를 영원히 안쓰지도 못하겠지.

그래도 기꺼이 "나는 좀 생태주의자야"라는 머쓱한 변명을 말하면서 일회용품 좀 적게 쓰고 개미가 가는 길은 건너 뛰어 가고, 지나가는 벌레한테 자리 좀 비켜주는 건 괜찮지 않을까?


4. <봄의 침묵>, 그리고 <깨끗한 식사>

한 3년 정도, 레이첼 카슨의 <봄의 침묵>을 통독하는 강의를 맡은 적이 있었다.

어릴 때 한번 읽었었고, 강의를 위해 다시 읽으면서, 유기적으로 이어진 생태계라는 생명의 사슬이 존재함을을 다시금 느끼는 경험을 했다. 오롯이 뚝 떨어진 생명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어떻게든 어디서든 우리는 서로 기대고 영향을 주고 받고 함께 산다. 명심할 일은 그것 하나다.

그리고 <깨끗한 식사>, 김선우 시인의 <<내 몸 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문학과지성사, 2007)에 수록된 시이다.


어떤 이는 눈망울 있는 것들 차마 먹을 수 없어 채식주의자가 되었다는데 내 접시 위의 풀들 깊고 말간 천 개의 눈망울로 빤히 나를 쳐다보기 일쑤, 이 고요한 사냥감들에도 핏물 자박거리고 꿈틀거리며 욕망하던 뒤안 있으니 내 앉은 접시나 그들 앉은 접시나 매일반. 천년 전이나 생식을 할 때나 화식을 할 때나 육식이나 채식이나 매일반.

문제는 내가 떨림을 잃어간다는 것인데, 일테면 만년 전의 내 할아버지가 알락꼬리암사슴의 목을 돌도끼로 내려치기 전, 두렵고 고마운 마음으로 올리던 기도가 지금 내게 없고 (시장에도 없고) 내 할머니들이 돌칼로 어린 죽순 밑둥을 끊어내던 순간, 고맙고 미안해하던 마음의 떨림이 없고 (상품과 화폐만 있고) 사뭇 괴로운 포즈만 남았다는 것.

내 몸에 무언가 공급하기 위해 나 아닌 것의 숨을 끊을 때 머리 가죽부터 한 터럭 뿌리까지 남김없이 고맙게, 두렵게 잡숫는 법을 잃었으니 이제 참으로 두려운 것은 내 올라앉은 육중한 접시가 언제쯤 깨끗하게 비워질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는 것. 도대체 이 무거운, 토막 난 몸을 끌고 어디까지!

- <깨끗한 식사> 전문


어디선가 만난 시는 모든 내 식사에서 어른거린다. 그래서 적어도 내가 내 몸 속에 깃들 이들을 위해 감사히 먹고 경건히 먹는 일, 함부로 낭비하지 않는 일로 기도를 대신하려고 한다. <채식주의자>의 영혜처럼 나를 나무로 만들 수도 없고 고기먹는 입을 닫을 수도 없겠지만 말이다.


문득, 물티슈가 싫어 휴지를 찾고 그마저도 안하려 행주를 열심히 빨아 햇빛 잘 드는 베란다에 널었다가 다시 개며 이런 기록을 하고 싶었다.


조금 더 성실한 생태주의자가 되어야지, 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