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보배진 Jul 16. 2024

봉천동 카페 히코

글로 그리는 크로키 01

네이버 지도에서 동네 카페를 검색할 때 가끔 이름이 특이하다고 생각했다. 마치 일본 영화 속 여주인공의 이름 중 하나일 것만 같은 느낌. 핑크색으로 머리를 탈색한 자유분방한 느낌이거나 반대로 윤이나는 까만 단발머리에 일자 앞머리를 가진, 작은 체구의 단단한 표정을 가진 여자 주인공의 이름일 것만 같았다. 메뉴로는 필터커피가 눈에 띄였고, 강아지도 한 마리 키우는 것 같았다. 네이버 리뷰에서 보여주는 이미지들로만 보면 주인장이 아기자기하게 꾸며놓은 10평 이하의 작은 카페일 것이라 추측했다.


카페의 존재를 알고도 한참동안 나는 그곳에 가지 않았다. 봉천역 근처 대로변의 적당히 허름한 상가건물의 2층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그냥 걸어 다니면서는  별로 눈에 띄지 않아 간판을 보고 ’ 카페다!‘하고 발견하기 쉽지 않은 곳이었다, 그저 ‘오늘은 히코에 가야지!’ 하고 마음먹어야 갈 수 있는 곳이었다.


그러던 어느 하루 커피 마시며 조용히 멍 때릴만한 자그마한 카페가 필요했다. 그저 커피 한 잔 고요히 마시겠다는 마음으로 머릿 속에 있는 카페 목록을 훑다보니 우연히 히코가 떠올랐다. 카페는 내게 도심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작은 탐험의 장소이자 모험의 대상이라, 이 새로운 카페가 멍때림에 적합한지 확인하고 싶었다.


봉천역에서 서울대 입구역 방향으로 조금 걸어가면 흰 벽의 허름한 상가 건물이 나온다. 히코로 가는 입구는 그 건물의 전면 왼편에 조그맣게 나 있다. 작은 유리문을 밀면 곧 좁고 작은 면적의 계단이 나온다. 그렇게 2층으로 올라가면 히코라는 새로운 세상이 펼쳐진다.  


올라가는 계단에서 마주하는 빈 와인병과 패브릭 소품들이 카페 내부에 대한 기대감을 심어 주었다. 곧 천으로 된 문발을 걷으니 눈앞으로 커다란(상상했던 10평보다 더 너른 공간 속에!) 초록이 펼쳐졌다. 도로변으로 난 큰 창의 위치가, 여름을 맞아 초록의 무성한 잎을 자랑하는 플라타너스 나무의 상단부와 높이가 맞아 창 밖의 풍경이 한없이 푸르렀다.


파란 하늘과 초록을 한 번에 볼 수 있도록 카페 공간의 한가운데 위치한 테이블로 가 짐을 놓아두고 카운터로 가서 산미가 있는 아이스아메리카노를 시켰다. 그리고 다시 자리로 돌아가 주섬 주섬 짐을 풀었다. 그 사이 어디선가 보스턴테리어(?)로 추정되는 강아지가 어슬렁거리면서 내 자리로 다가와 테이블 아래 내 다리 주변을 돌아다니며 나를 탐색했다. 냄새를 맡기도 하고, 괜히 종아리에 몸통을 비벼보기도 하면서 일 이분 정도 머물더니 볼일 다 봤다는 듯 다시 유유자적 자리를 떠났다.


곧이어 주인장이 음료를 가져다주었다. 상대적으로 입구가 넓고 바닥면이 좁은 투명한 유리컵 속에는 각얼음과 밝은 갈색을 띄는 액체가 담겨있고, 반투명한 빨대가 꽂혀있었다. ’ 빨대를 빼 주시면 좋을 텐데 ‘ 생각했지만, 주인장이 커피를 테이블에 내려놓으면서 “저어 드세요.”하고 말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아마 샷이 위쪽에만 집중되어 있어 고루 섞는데 쓰라는 의미였을텐데 ‘머들러 스틱’ 같은 씻어 쓸 수 있는 도구를 줬으면 더 좋았을 텐데-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산미 있는 커피를 좋아하는 내 입맛에 딱 맞는 깔끔하고 청량한 맛이었다.


아주 천천히 커피를 한 모금, 두 모금 넘기며 책을 읽거나, 눈앞의 초록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맑은 하늘색의 여름스러운 하늘 빛에 대비되는 짙은 초록의 플라타너스 잎이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는 모습은 넋을 놓고 바라보기에 딱 좋은 풍경이었다. 잎멍?이랄까. 그렇게 한참 있다 보니, 않은 자리 기준으로 왼편에서 해가 지기 시작했다. 지는 노을에 카페 공간에도 서서히 주황색 빛이 비쳐 들어왔다.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 보다는 자기 할 일을 챙겨와 조용히 집중하는 사람들이 더 많이 남게되어 곧 카페 내부의 분위기는 어쩐지 매우 사적인(?) 공간으로 변했다. 함께이되 따로 존재하는 그런 공간.


제멋대로의 크기이지만 거의 모두 나무 소재라 낡은 나뭇결의 바닥과 잘 어울리는 그 공간의 가구들 처럼, 그곳에 모인 사람들도 그 순간만큼은 모두 제각각이지만 이 공간에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 개인적인 시간이 필요할 때나, 푸르른 플라타너스의 찬란한 자태를 마주하고 싶을 때 다시 찾게 될 것 같다.


*크로키라는 컨셉처럼 떠오른 기억을 기반으로 쓴 글입니다. 정보 전달을 목적으로 하기보다는 장면과 느낌을 묘사하는 글이니, 정확한 정보는 검색창으로 검색해 주세요.


매거진의 이전글 마음의 힘을 믿는 사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