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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와 비슷한 베트남 '무이네'

사막체험

by 자급자족

무이네는 우리나라의 바다내음 나는 동해의 느낌이, 선셋이 예쁜 도시였다. 무이네 사막을 다녀왔다. 코스는 '요정의 샘 - 어선마을-사막 체험 - 붉은 모래 선셋 - 선인장과 과일인 용과 농장 견학' 순이었다.


엄밀히 말해 사막이 아니라 수천 년간 모래가 날아와 형성된 사구 같았다. 애들은 처음 사막을 보는 것이기에 부킹닷컴에서 투어 예약을 했다. 픽업해 줄 노란 차가 숙소 앞으로 도착했다.


기사에게 인사한 후 약 3만 원의 운행료를 냈다. 요정의 샘이라는 곳을 거닐었다. 바닥이 단단한 진흙으로 된 산책 시냇물이었다. 전 세계에서 온 사람들이 가족과 도란도란 얘기 나누며 물속을 산책했다. 중앙아시아, 유럽, 아시아 말이 섞여 들렸다.


30분 정도 물속 산책을 하고 나와 가이드가 준비해 놓은 생망고 주스를 마셨다.

베트남은 팁문화가 있는데 호텔에서는 1불 혹은 2만 동짜리 한 장을 준다. 팁을 줄 상황은 호텔밖에 없었다. 남편이 사막체험에서는 인당 5만 동씩 해서 팁 20만 동(11500원)을 주자고 했다. 그러면 모든 게 스무스해진단다.


진짜였다. 모든 게 스무스했다. 심지어 사막 한가운데까지 가이드가 동료의 사륜구동차를 따로 타고 와서 사진을 찍어주기도 했다. 사진의 구도를 완벽 아는 분이었다.




하얀 모래사막 구경을 다하고 붉은 사막을 오를 때였다. 많은 사람들이 붉은 사막의 가장자리로 선셋을 보러 올라가고 있었다. 맨발로 래 경사로를 걷는 것이 힘들어 걸음을 멈추었다. 아들에게 선셋을 지금 서있는 곳에서 보자고 제안했다.


그때 어디선가 "C'est dur?" 쎄 뒤르?라는 물음이 들려왔다. 80대 정도의 베트남 할머니셨는데 어로 힘드냐 질문이었다. "Ouais, C'est dur!" 우웨이, 쎄 뒤르라고 답했더니, 눈이 휘둥그레지시며 어떻게 불어를 할 줄 아냐고 물으신다. 불어로 물어보셔서 불어로 답해드렸을 뿐이었다. 릎이 아파 앉아계시다며 선셋 보러 가지 말고 대화하자고 하신다. 지금 올라가 봐야 선셋이 아닌 달을 보게 될 것이라는 농담과 함께. 정말 그 속도라면 달을 보게 될 것 같았다.


마침 궁금하던 것을 여쭤봤다. 일반적으로 베트남 사람들은 불어를 아는데 안 하는 거냐고 여쭸다. 할머과 비슷한 연배의 분들은 불어를 할 줄 아는데 지금 젊은이들은 영어만 중요하게 배우는 듯하단다. '영어, 영어, 영어'라고 반복 강조하는 목소리에 안타까움이 묻어있었다. 식민지 시절 향으로 불어를 아시는 거냐고 하니 그렇다고 하다.


스위스 제네바에 사시는데 사위 며느리 등 대가족이 베트남 여행을 왔다고 하셨다. 사위는 독일사람, 며느리는 프랑스 사람, 다국적 가족이라고 소개하신다. 손자들이 각각 몇 살인지까지 설명하셨다. 어디에서 왔으며 왜 프랑스어를 할 줄 아냐고 계속 물으셨다.


대학에서 불어를 배웠고 지금은 직업이 ○○며, 불어를 사용하는 직종이 아니라고 했다. 게다가 한국에서는 불어를 쓸 기회가 없어서 그저 불어를 좋아하는 직장맘일 뿐이라고 했다.


할머니께서는 내게 정말 아름다운 직업을 가졌다며 한국에도 알리앙스 프랑세즈라는 문화원이 있다면 거기에서도 근무하는 것이 어떠냐고 하신다. 그분의 따님은 한때 거기에 근무했다는 말도 덧붙이셨다. 문화원에는 프랑스어 능력 구술시험인 달프를 보러 간 적이 있으며, 지금 내 직업에 만족한다고 답했다. 유럽 공원에서 만난 여느 할머님들처럼 제네바로 건너가서부터 지금까지의 삶에 대해 설명하셨다.


벨기에 사람들의 프랑스어 억양이 있듯, 스위스 특유의 억양을 가지고 계셨다. 대화를 하다 보니 불어가 내 인생의 큰 부분을 차지했으며, 그 언어를 배우던 시절이 행복했다는 기억이 떠올랐다. 왜 그동안 그 언어를 고 지냈는지도 기억났다. 첫 직장이 프랑스 무역회사였는데, 좋아하는 언어로 돈을 번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아름다운 언어로 프랑스 은행에 전화해 따져 묻는 일이 내 업무 중 하나였으니 말이다.


지금은 적성에 맞는 직업을 가지고 있으니, 여유 있게 Plaisir d'apprendre(배움의 기쁨)를 충분히 느껴도 좋을 시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어폰 꼽고 길거리에서 불어로 혼잣말하고 다니던 열정의 기억' 떠올랐다. 사람들은 한국의 길거리에 '똑같은 시간에 혼잣말하는 미친 사람이 돌아다닌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손짓 발짓까지 하면서 상상하며 걸어 다녔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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