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림이 우거진 정글 속에 작은 마을이 하나 있었다.
세상과 동떨어진 그곳에는 소수의 원주민들이 움막을 짓고 살고 있었는데,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즐겁고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종종 야생동물이 나타나기도 했지만, 무서운 야생동물들을 무찌를 수 있는 힘과 지혜가 있는 추장이 있었기에 원주민들은 그야말로 평화로운 나날 속에서 하루하루를 행복하게 지내고 있었다.
어느 날, 추장이 마을 인근에서 새끼표범을 데리고 놀고 있는 아이들을 발견했다. 놀란 추장은 아이들에게 달려갔다.
"얘들아, 그건 새끼표범 아니냐?"
"네, 추장님! 요 앞에 나갔다가 어미 잃은 새끼 표범이 있길래 데리고 왔어요. 귀엽죠?"
"그 표범을 데리고 있으면 안 된다! 지금은 새끼 표범이기 때문에 귀엽고 예쁠지 모르지만, 시간이 지나면 위험해져. 그 새끼표범은 지금 죽여야 돼!"
추장은 오른손에 들고 있던 창을 새끼표범을 향해 겨누었다. 새끼표범은 영문도 모른 채 맑은 눈망울로 추장이 겨눈 창끝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척 날카로운 창이었다. 놀란 아이들은 새끼표범을 끌어안고 울부짖었다.
"안돼요, 추장님! 새끼표범을 살려주세요! 이 새끼표범은 우유만 먹이면 된다고 아빠가 이야기했어요. 살려주세요! 저희가 우유도 주고 잘 키울게요! 한 번만요!"
아이들은 추장의 다리에 매달려서 엉엉 울었다. 새끼표범은 이런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이들의 얼굴을 혀로 핥으며 애교를 부렸다.
그 모습을 잠자코 바라보던 추장은 이내 창을 거두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이야기했다.
"좋아. 너희들이 그렇게 원하니 표범을 살려주마. 하지만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게 있다. 저 표범은 야생에서 왔기 때문에 우유 외에 다른 어떤 것도 주면 안 된다. 위험에 처할 수 있으니 말이다. 이 사실을 반드시 명심해야 한다."
"네, 알겠어요!"
추장이 마을로 돌아가자 아이들은 뾰로통한 얼굴로 이야기했다.
"이 표범이 얼마나 예쁜데 죽이려고 그래? 우유만 먹이면 되는 건데, 추장님은 아무것도 모르면서 괜히 그래."
"맞아! 추장님은 새끼표범이 얼마나 예쁜지 몰라서 그러시는 거야. 이렇게 착한 새끼표범이 어디 있어?"
아이들의 마음에서는 추장님의 이야기가 그저 귀찮고 번거로운 잔소리로 여겨졌다.
제법 오랜 시간이 흘렀다. 표범은 아이들이 타고 다닐 수 있을 만큼 몸집이 커졌고, 잽싸게 달려서 포도나무 위에도 올라갈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다. 표범은 여전히 온순했고, 아이들이 주는 우유를 먹으며 아이들과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표범을 데리고 마을 인근에서 놀던 아이들 중 한 명이 경사가 가파른 언덕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평소 어른들이 조심하라고 자주 이야기하던 곳이었는데, 어린 마음에 별다른 생각 없이 흘려들었다가 일어난 일이었다. 날렵한 표범이 먼저 뛰어내려왔고, 뒤이어 놀란 아이들이 재빨리 뛰어내려 가기 시작했다. 굴러 떨어진 아이는 다행히 크게 다치진 않았지만, 군데군데 옷이 찢어진 데다 무릎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평소 아이들의 얼굴을 핥으며 애교를 부리던 표범은 굴러 떨어진 아이의 무릎에 맺힌 피를 혀로 핥아주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짜릿한 피 맛을 느끼기 시작하며 더 빠르게, 더 강하게 피를 빨기 시작했다. 그러다 갑자기 표범의 눈빛이 변하더니, 앞발을 들어 날카로운 발톱으로 아이의 가슴을 찢어버렸다.
"아악! 표범아 왜 그래! 이러지 마!"
그러나 아이의 비명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표범은 아이의 가슴과 얼굴을 찢어버리고 마음껏 피를 빨기 시작했다. 뒤이어 도착한 아이들도 표범의 앞발에 무참히 목숨을 잃었다. 모든 아이들을 죽인 표범은 조용히, 그리고 아무렇지 않은 듯 정글 속으로 유유히 사라져 버렸다.
어느 책에서 읽은 대강의 내용이다.
무척 단순한 이야기다. 어느 작은 마을에서 일어난 안타깝고 슬픈 이야기다.
그러다 3번, 4번, 5번 반복해서 읽다 보니 새로운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단순한 이야기지만, 굉장히 깊은 마음의 세계가 담겨 있다. 처음에는 그저 안타깝고 슬픈 이야기에 불과하던 이야기에서 점차 이야기 속 마음의 세계 속으로 마음이 빠져들어가기 시작했다.
아이들을 죽인 것은 표범이다. 하지만 다른 면에서 봤을 때 아이들을 죽인 것은 표범이 아니다. 새끼표범이었다. 새끼표범이 아이들을 죽인 것이다. 그리고 새끼표범이 아이들을 죽게 만든 것은 바로 아이들이었다. 자신들의 생명이 표범에게 무참히 희생되도록 만든 장본인이 바로 그들이었다. 그 표범이 새끼표범이었을 때 아이들은 "새끼표범은 귀엽고 애교가 많기 때문에 우리를 죽이지 않아."하고 생각했다. '이 표범은 우리를 죽이지 않는다.'라고 생각한 어린아이들의 옳음이 그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아이들의 마음에서 '추장님은 틀렸고 우리가 옳아!' 하는 분명한 믿음이 세워져 있었다.
위 이야기에서 추장은 아이들의 생명을 지키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의 오른손에 들린 창은 아이들과 마을 원주민의 생명을 지키는 도구다. 정글 한가운데 있는 마을이었지만, 추장에 의해 가장 안전한 곳으로 바뀔 수 있었다. 행복과 평화가 맴돌 수 있었던 이유는 추장이 있었기 때문이며, 좀 더 나아가 그의 오른손에 날카로운 창이 언제나 들려있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표범은 추장의 시야 안에서 절대 안전할 수 없다. 귀엽고 애교가 많은 새끼표범이지만, 언젠가는 마을 원주민들의 생명을 앗아갈 수 있는 무서운 존재가 되리라는 것을 추장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마을은 공동체적 성향을 띠고 있으므로 한 마리의 표범으로부터 안전할 수 있다. 그러나 혼자서 표범과 대적할 수 있는 인간은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약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어른의 기준에서 바라보느냐, 어린아이의 기준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가 나타난다. 순수하고 착한 아이들이었지만, 그 아이들의 옳음은 결과적으로 마을 전체를 위험에 빠트려버렸다.
협상은 상호 간 가장 좋은, 최적의 선택을 하는 것이 목적이다. 어느 한쪽의 성공이나 성장이 아닌 모두를 위한 올바른 선택이 협상의 가장 기초적인 이유라고 할 수 있다. One for all, All for one이 적용되는 신뢰의 세계에서 활용될 수 있는 단어다. 상호 간 정확한 믿음과 신뢰가 형성되어 있지 않으면 보기에만 그럴듯한, 그러나 실제로는 전혀 쓸모없는 협상이 되고 만다. 마치 아이들이 '우유만 먹인다면 이 표범은 위험에 빠트리는 행동을 결코 하지 않을 겁니다.'라고 이야기하지만 실제로는 최악의 결과가 만들어지는 것처럼 말이다.
추장의 목적은 단 하나다. 마을과 원주민의 안전이다. 표범, 그리고 그보다 더 날렵하고 용맹한 야생동물로부터 마을과 원주민을 지키는 것이 추장으로서 해야 할 일이자 삶의 목적이다. 표범을 죽이는 것, 아이들 입장에서는 잔인하고 몹쓸 일에 불과한 그 일이 실제로는 마을과 원주민을 최악의 위험으로부터 구해내는 것이다.
아이들의 시각에서 옳은 것은 마을 주민들에게 있어서 치명적 피해를 안겨줄 뿐이다. 마을 자체가 송두리째 날아갈 수 있는 선택이다.
아이들이 추장과 협상을 하려고 한다면, 3가지 방법으로 추려질 수 있다.
첫 번째로, 가장 좋은 방법은 표범을 죽이는 것이다. 아이들에게 있어서 표범을 죽이는 것은 마음이 아프고 슬픈 일이겠지만, 마을과 원주민이 안전하게 지켜질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다.
두 번째 방법은 표범을 추장의 권한 아래 두는 것이다. 아이들은 그저 방관자, 혹은 구경꾼으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표범을 죽이지 말아 달라고 요청할 수는 있다. 하지만 표범을 살리든지 죽이든지 결정하는 모든 권한을 추장에게 위임하는 것이다. 추장은 자신의 능력 안에서 표범을 관리할 수 있다. 세 번째 방법은 마을이 아닌 곳에서 추장의 권한 아래 표범을 가두어 두는 것으로, 마을과 아이들을 모두 지킬 수 있으며 표범 역시 추장의 권한 아래 관리될 수 있다.
올바른 선택은 없다. 선택을 옳게 만드는 과정이 있을 뿐이다.
<여덟 단어>의 저자 박웅현 작가의 말이다. 광고업계의 구루, 감각적인 강연가, 작가라는 타이틀을 갖고 있는 그의 명성에 걸맞은 훌륭한 어록이다. 그의 말처럼, 어떤 면에서 봤을 때 올바른 선택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좋은 대학을 간다고 해서 행복한 것도 아니며, 최악의 실수를 경험한다고 해서 행복하지 않은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꽃들에게 희망을>에서 수많은 애벌레들이 꼭대기의 어떤 것을 찾아 떠나지만, 그곳에 도착해서 그들은 그 무엇도 찾지 못한 채 밑바닥으로 추락해서 운명을 달리한다. 어쩌면 트리너 폴러스 Trina Paulus는 강한 옳음을 갖고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애벌레의 삶을 통해 인생의 참된 진리를 알려주는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마음이 든다. 그래서 박웅현 작가의 어록이 더 크게 들리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말이 영원불변의 진리를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앞서 언급한 표범과 어린아이들의 예화처럼, 선택을 옳게 만드는 과정 속에서도 어떤 경우에는 맞지만 때로는 전혀 다른 결과가 나타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새끼표범을 죽이지 말아 달라고 애원한 아이들의 선택에 따라 새끼표범은 목숨을 구했지만, 그 결과는 원주민의 떼죽음이다. 옳음이 위험한 이유다. 그들의 선택은, 잘못된 선택을 옳게 만들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 위험한 선택이었다. 아이들이 자신들의 옳음을 내려놓고 추장에게 모든 권한을 맡겨두었더라면, 그 선택을 옳게 만드는 과정이 추장의 손에 달려있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