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은 생활연령으로 내가 스물다섯 살이 되던 해였고, 어떤 계기로 인하여 나는 죽음 앞에 초연해졌다. 비교적 젊은 나이에 죽음을 마주한 것이었는데, 그때부터 살을 깎고 뼈를 갈아내는 어려움을 당했음에도 그다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가짐을 갖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가 임신을 했다. 산부인과에서 태아 검사를 했는데, 아내의 뱃속에서 자라고 있는 아들의 모습을 보았다. 아들의 심장소리, 희미하게 움직이는 아들의 윤곽이 보였다. 그때부터 다시 죽음이 두려워졌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허락된 불변의 진리다. 죽음을 마주한 스물다섯 살 무렵부터 아들이 태어난 2020년 1월까지 나는 줄곧 의미 있는 일, 그러니까 누군가를 돕거나 누군가의 성공을 바라는 일 앞에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였다. 그러다 가족이 생기고 난 이후, 조금은 다른 측면에서 의미 있는 일을 해야겠다고 궁리하게 된 시간이 있었는데, 이미 자잘 자잘한 실패들을 많이 경험하고 난 이후였다. 궁리의 사전적 의미는 '사물의 이치를 깊이 연구함. 마음속으로 이리저리 따져 깊이 생각함, 또는 그 생각'이다. 마흔을 앞두고 궁리의 시간을 거치는 동안, 조각난 파편처럼 흩어져있던 생각들이 하나의 틀로 구성이 잡히기 시작했다. 그때의 궁리 덕분에 내가 잘할 수 있고 좋아하는 일을 의미 있는 일과 접목시킨다면 그야말로 멋진 인생이 될 것이라는 판단이 내려졌다. 글쓰기가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의미 있는 일이고 잘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에 생각이 미친 것도 그 무렵이었다. 글 쓰는 일을 게을리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게 된 계기 중 하나다.
큰 틀에서 봤을 때 글쓰기는 가장 진실된 나와 마주하는 일이다. 틈만 나면 글을 쓰고 생각을 정리하곤 했다. 행복할 때도 글을 썼고, 즐거울 때도 글을 썼다. 마음이 어렵고 심란할 때도 글을 썼는데, 한참 이런저런 글을 쓰다 보면 자연스레 마음이 정리가 되었다. 결과적으로 내면이 단단해지는 경험을 많이 했다. 마치 꾸준히 육체훈련을 거친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우수한 체력과 정신력을 가질 수 있듯이, 나를 마주하는 시간이라는 점에서 글쓰기 시간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단단한 나를 만들어주었다.
탁월한 글쓰기나 위대한 글쓰기는 꽤 어렵다. 이마에 피가 맺히거나 피를 말리는 과정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혼불을 집필한 고 최명희 작가도 '나는 일필휘지를 믿지 않는다'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일기 쓰기, 편지 쓰기, SNS글쓰기는 그리 어렵지 않고 나름의 재미도 느낄 수 있다. 일필휘지로 쓸 수도 있고, 좋은 글이 아니어도 상관없다. 조금은 삐걱거리는 글이라도 상관없다. 게다가 몰라보게 달라진 나를 발견할 수 있다. 몰라보게 달라진 나를 발견하다니, 놀랍지 않은가? 지금 바로 펜을 들고 글쓰기를 시작해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