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985년 생이다.생일은 1월 15일인데, 그래서 학교도 빨리 들어갔다. 경북 안동시 안기동 영남초등학교 1학년 1반 출신인데, 옆자리에 현숙이가 나보다 키가 커서 곁눈질로 현숙이의 키를 가늠해보며 식은땀을 흘린 25년전의 기억이 생생하다.
어릴 때 별명은 '깜디'였다. 얼굴이 까맣고 눈이 동그래서 '아프리카 쌔깜디'라고 부르던 녀석들도 있었다. 선생님들은 '친구들끼리 그러면 안되요.'라고 타일렀지만, 초등학교 1학년 꼬맹이였던 내게는 견디기 힘든 별명이었다. 지금은 웰빙이니 건강미남이니 하면서 날 보는 사람들이 '남자답게 건강한 피붓결을 가지고 계시네요. 멋있으세요.'라고 이야기도 해주는데 퍽 듣기 좋은 말이다. 괜히 어깨가 으쓱으쓱하는 것이, 입밖으로 내지는 않아도 글로 끄적이게 되다니 속물근성이 드러난다 싶다.
당연한 말이지만 나는 어머니와 아버지를 닮았는데, 이게 묘하게 헷갈리는 말이다. 내가 보는 나는 엄마를 닮았다. 눈이 동그랗게 크고, 책 읽는 것을 좋아하고, 조곤조곤 말하는 성격들이다. 그런데 나를 아는 사람들, 예를 들어 엄마의 친구나 엄마 미용실 단골 이모님들같은 경우는 '그렇게 지 애비를 쏙 빼닮았다'는 거다. 아버지가 아기였던 흑백사진, 나는 그 사진이 '누나의 흑백 돌사진'인 줄 알았다. 아버지랑 누나가 그렇게 똑같이 생길 수가 없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보는 나는 아버지를 닮았다. 묘하게 다른 감정이 스쳐지나가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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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도 나처럼 생일이 빠르신데, 1957년에 태어나셨지만 주민등록증에는 1958년생이다. 잘은 모르지만 그 때 무렵만 해도 6.25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라 잘 못먹고 병치레도 많아서 어릴 때 죽고..그래서 호적을 늦게 등록하셨다고 하는데 확실하진 않다. 어찌되었건 아버지가 계시기에 내가 있다. 아버지는 이제 환갑을 넘기셨는데, 환갑을 넘기시면서 '내가 60을 넘겼다..;하고 엄마한테 이야기하셨다고 한다. 아버지의 형님과 할아버지, 그 외 가까운 형님들이 모두 단명하셨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를 하셨다고 전해 들었다.
아버지의 눈물을 처음 본 날이 기억난다. 아버지의 아버지,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날이다. 아버지의 아버지였던 할아버지는 나를 지극히 예뻐하시던 분이었다. 4남1녀 자식들 중에 첫째 아들의 첫번째 아들이 나였으니 그럴만도 했겠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던 그 때, 나는 초등학교 1학년이었다.
곤히 잠을 자고 있던 누나와 나를 엄마와 아빠가 깨우셨다. 눈을 비비고 일어나서 주섬주섬 옷을 입으면서 창문 밖을 내다보니 밖은 아직 어두컴컴했던 기억이 난다. 아버지 차를 타고 어디론가 가면서 누나와 나는 머리를 맞대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잠에 빠져들었고, 중간중간 깨어나서 실눈으로 차창 밖 풍경을 볼 수 있었다. 시골에서도 시골인 안동, 그 중에서도 시골인 풍산 저 깊은 곳 병산서원 옆에 자리잡고 있는 할아버지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할아버지 집에 도착할때쯤 희미하게 사람들 얼굴이 보일 정도로 날이 밝아왔고, 잘은 몰라도 얼굴이 무릎에 닿도록 고개숙이고 인사하던 '동네 아재'분들이 할아버지 댁에 모여계셨고, 만날 때마다 잠자리를 잡아주시던 동네 어른들도 모여계셨다.
어린 마음에 분위기가 뭔가 이상하다고 느낄 때쯤, 할머니는 멀뚱멀뚱 서있는 나를 끌어안고 펑펑 우셨고, 영문도 모른 채 나도 따라 울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할머니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할아버지는 병산서원 앞의 병풍과도 같은 산처럼 누워계셨고 흰 천을 머리까지 덮고 누워계셨다. 그 뒤에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시는 아버지의 얼굴도 보였다.
할아버지는 환갑을 맞이하기 전 돌아가셨다. 외모도 출중하셨고 농사일을 하면서 평생을 보내셨지만, 집안의 가문을 바꿀 정도로 크게 농사를 지으셨던 분이었다. 나이가 들어서도 그 때의 아버지의 아버지 모습을 생각하면 멋진 분이었지 하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살아계셔서 손자 며느리도 보셨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용돈도 좀 쥐어주시고 그러시지..'하는 생각에 한번씩 울컥 울컥 할 때가 있다. 너무 빨리 가신 분이라는 마음이 든다.
그런 할아버지의 자리 앞에 무릎을 꿇고 아버지는 3일을 통곡하셨다. 아버지! 하고 큰 소리로 통곡하시는 아버지의 모습은 25년이 지난 지금도 내 머릿속에 또렷이 기억이 남아있다. 어른도 우는구나..아버지도 우는구나..하고 말이다. 그리고 내가 어른이 될 때까지, 아버지가 우시는 모습을 본 것은 한 번밖에 없다. 그것도 거하게 술을 드시고 온 어느 날, 세수를 하며 아무도 모르게 훔친 눈물을 내가 우연히 '발견'한 것 뿐이었다. 과하게 약주를 드시고 오셨는데 갑자기 토악질이라도 나오면 등이라도 두들겨드릴까 싶어 화장실문을 벌컥 열었다가 발견한, 아주 우연히 발견한 아버지의 눈물이었다.
나이가 들면서 아버지가 늘 좋지만은 않았다.
경상도 분에 무뚝뚝한 아버지. 머리가 굵어질수록 대화가 통하지 않는 아버지는 '내 말에는 귀기울여주지 않는 존재'로만 인식이 되어갔고, 뭘 해도 '싼 것'만을 찾는 그런 분으로만 느껴졌던 것 같다.
어느 아버지인들 아들과 소통하고 싶지 않을까. 어쩌면 소통하는 방법을 모른 채 세상이라는 전쟁터의 군인으로 평생을 살아온, 땀과 피와 고통과 두려움으로 가득하지만 다시 한 번 일어서서 달려나가는 용기로 가득찬 존재가 아버지라는 존재가 아닐까. 그런 아버지의 등 뒤에서 칼을 꽂고 비수를 던지는 존재가 자식이라는 존재가 아니었을까.
어느 해 가을 저녁, 아버지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들짜식, 밥은 먹었나?"
"예 아버지, 식사하셨어요? 퇴근하셨겠네요."
"그래, 집에 와있다."
남자 두명이 있으면 하게 되는 그런 대화를 하다가, 문득 아버지께 엄마는 어디계시냐고 여쭤보았다.
"이제 퇴근하고 오실거다."
"그럼 혼자 계세요?할머니는요?"
"그래. 경로당에 가셨는데 아직 안오셨네."
할머니의 안부를 묻고 잠시 이런저런 대화를 주고받은 뒤 전화를 끊으면서, 나는 아주 확실하고 분명한 사실을 하나 깨닫게 되었다. 그건 내가 아버지가 되어서도, 또 어느 국가나 어느 시대에도, 혹은 누군가의 아들이나 아버지에게도 통용될 수 있는 아주 명확한 사실이었다.
그것은, 아버지는 외로울 때 아들에게 전화를 한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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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아버지를 잃은 나이정도가 되었을 때, 나는 생애 첫 사업에서 쓰디쓴 실패를 맛봤다. 회사를 그만두고 무역사업을 진행했다가 보기 좋게 실패한 것이었는데 이후로 아주 어려운 시간을 보냈다. 의류를 수출하는 일이었는데, 한번도 해보지 않은 사업을 한답시고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시작한 일이 만만할 리 없었다. 치밀한 계획이 없었고, 분명한 목표도 없었으며, 성공에 대한 열렬한 소망이나 강력한 상상력도 없이 그저 ‘젊을 때 고생은 사서도 한다지.’하는, 그야말로 멍청한 사고방식으로 만나게 된 첫 번째 실패였다. 그리고는 고향에 갈 때마다 늘 빈손으로 가야 했다. 고향방문길에만 빈손이었더라면 좋았으련만! 누구는 명절에 부모님께 외제차를 사드린다고 하고, 누구는 명절에 부모님께 용돈을 두둑히 준다고들 이야기했다. 돈다발에 수표를 꽃꽂이해서 선물로 드린다고 자랑하는 사람도 있었는데 나는 부모님께 드릴 용돈이나 선물은 커녕 회사에서 주는 값싼 건강식품 하나 달랑 들고 가는 게 일쑤였고, 싸구려중에서도 싸구려 안마의자를 사들고 고향을 방문해야 했다. 편하게 누워서 모터진동소리를 들으며 다리를 올렸다 내렸다 어깨를 주물렀다 폈다 하는 그 수백만원짜리 안마의자가 아닌 의자에 올려놓고 전원버튼을 올리면 엉덩이와 등어리에 지직지직 진동이 오는 그 싸구려 안마의자. 그 싸구려 안마의자는 아들 며느리가 고향에 왔을 때 마음 편하게 묵을 수 있는 게스트룸 책상의자에 고이 모셔져 있는데 지금 난 그걸 깔고 앉아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아들 몰래 며느리에게 10만원이 든 봉투를 쥐어주시는 아버지를 보며 피가 거꾸로 솟았지만 줄곧 모른 척하며 식은 땀을 흘리곤 했다.
그럼에도 단 한번도 실망하거나 속상해하지 않으셨고 전화를 끊을 때마다 '어깨 펴고 당당하게 다녀야 된다.'하고 말씀하셨다.
사업을 실패하고 기아자동차 딜러로 근무하던 지난 해 여름, 아버지가 같이 여름휴가를 가자고 하셨다.
아내와 나에겐 퍽 부담스러운 제안이었다. 당시 계약금을 내고 차량을 기다리던 고객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계약을 해지하는 등 펑크를 내버리는 바람에 차량 판매고가 무척이나 저조하던 때였다. 심지어 집 대출금과 차량 대출금도 몇 달치나 밀려 있어서 하루하루 피가 마르던 때였고, 여름 휴가라고 해도 워낙 성수기 시즌이라 비용이 만만찮은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저 ‘같이 여름휴가 가자’는 제안 외엔 아무런 말씀 한 마디 없이 값비싼 리조트를 예약하셨고 우리를 위해 모든 걸 준비해두셨다.
여름휴가를 떠난 강원도에서 나는 간만에 잠다운 잠을 잘 수 있었다. 어려운 짐을 다 내려놓고 그저 아버지와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로를 받았다. 결혼을 하고 난 뒤 자주 느꼈던 마음인데 아버지가 살아서 곁에 계시다는 것이 세삼스레 참 다행이라는 마음이 들었고 아버지와 함께 있으면 마음이 안정이 되었다. 간만에 휴가다운 휴가를 보낸다는 기분이었다.
아버지, 엄마, 아내와 나는 신나게 물놀이를 다녔고 간만에 찾아온 즐거움을 만끽했다. 열심히 물놀이를 하다가 배가 출출해진 아내에게 아버지는 '우리 애기 배 안고프나?'하고 물으셨고 아내는 '아버님 배고파요.' 하고 이야기했다.
“밥먹기엔 좀 이르고, 간식같은 거 먹고 싶나?”
“네, 아버님 먹고 싶어요.”
“뭐 먹고 싶노? 라면도 있고 소세지도 있는데. 일단 가보자.”
간식코너에 가서 간식을 주문하려는데, 컵라면과 소세지를 인원에 맞게 주문했다. 적지 않은 금액이 나와서 나도 당황했고, 아내도 당황했는데 아버지는 미리 준비해두신 전용카드로 다 계산하셨다.
간식을 먹는 게 편하지가 않았다. 편안하게 모시고 와서 대접도 해드리고 운전도 해드려야 되는데..싶어 마음이 퍽 무거웠다. ‘괜히 배고프다고 해서는 돈이나 쓰시게 하고..’눈치도 없이 이야기한다 싶어 아내에게 보이지 않게 타박을 했는데, 눈치를 채신 아버지가 나중에 조용히 이야기하셨다.
“아들은 표정이 안좋은데, 별로 재미가 없나? 재밌게 놀면 되는데, 표정이 왜 어둡노?”
“부모님이랑 오니까 좋지요. 그래도 저도 그렇고 아내도 그렇고 좀 성공해서 아버지랑 엄마 모시고 와야 되는데, 그런게 좀 신경이 쓰여서요.”
"괜찮다 아들아, 이런 곳에는 돈 쓰러 오는 거야. 먹고 즐기려고 오는 곳인데 아버지가 있으니 걱정하지 마라. 아버지가 돈 있으니까 괜찮아. 우리 마음 편하게 먹고 즐기자."
아버지 입에서 나온 말씀, '먹고 즐기자'. 성경 속에서 아버지를 떠나 먼 나라에 갔다가 전 재산을 탕진한 뒤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아버지에게 돌아온 아들을 향해 아버지가 하신 말씀도 ‘내 아들을 위해 살진 송아지를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였다.
‘아들아, 우리 먹고 즐기자.’ 그것은 아버지의 마음을 가장 잘 표현한 말씀이었다.
사진 구글.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자는 아버지의 마음을 잘 표현한 그림이다.
나는 지방 국립대학을 나왔는데, 한번씩 아버지가 내게 하신 이야기를 생각하면 서울로 대학원을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고등학교 2학년 무렵, 아버지는 외할머니 댁에서 친지분들과 술을 드시다가 이런 이야기를 하셨다.
"아들이 서울대학교 들어가면 아빠가 마티즈 신차로 한 대 뽑아줄건데, 한 번 노력해봐!"
서울대는 커녕 전문대에 갈 실력밖에 되지 않았던 나였기에 아버지의 말을 크게 귀담아 듣지는 않았고 무엇보다 어렸기에 심각하게 생각되지는 않았다. 어차피 못갈건데!
나이가 들어서 그 때 아버지의 모습이 생각나는 것은, 남들 보기엔 별 볼일 없는 자식이지만 아버지에게는 자랑하고픈 아들이었겠구나 하는 마음이 문득문득 들어서였다. 아버지는 내게 어떤 마음을 품고 계셨을까.
대학을 졸업하고 난 뒤 남들 다 가는 번듯한 직장이 아니라 미래를 이끌어갈 인재를 키우겠다는 포부를 안고 대안학교 선생질을 한다고 먼 울산으로 내려올 때도, 선교사가 되어 전 세계 수많은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겠다는 포부를 밝혔을 때도, 아버지는 그저 묵묵부답이었다. 나중에야 '그거는 다 마음으로 하는거지.'하고 한마디 하실 뿐이었다.
피처럼 소중히 여기는 지인이 몸이 좋지 않아서 입원해있는 병원을 찾아간 적이 있다. 거기에는 정신이 약한 사람도 있었고, 살인자도 있었고, 조직을 이끌던 사람이 상대편 조직원을 살해한 뒤 들어와있기도 한 곳이었다.
가족면회가 이루어지는 그 곳에서 젊은 한 친구를 만났다. 권투선수로 활동하다가 머리에 이상이 생겨 정신착란으로 입원했다던 이 친구는 아버지가 면회를 오셨다고 하면서 김밥을 몇 줄 가지고 왔다. 김이 눅눅해져서 얼핏 보기에 썩 맛있어 보이지 않는, 서툴게 둘둘 말아서 은박지에 싸온 김밥이었다.
"아버지가 혼자 계셔서 먼저 일어날게요. 맛있게 드시고 대화 나누세요."
예의 바르고 겸손한 청년이 뛰어간 저 어깨너머에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더운 여름날, 아들을 위해 직접 만들어오신 수육과 김밥, 삼겹살이 상하지나 않을까 연신 손으로 부채질을 하시는 남자, 그을린 얼굴에 주름이 깊게 패여 있었던 그 분은 한 눈에 보기에도 '번듯한 직장 부장님'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잘은 몰라도 농사를 지으시는 분이 아니실까 하는 느낌.. 겸손한 태도와 달리 어떻게 병원에까지 오게 되었는지에 대한 질문에 지인이 대답해주었다.
"아버지를 칼로 찔렀어."
아버지가 문득문득 그리울 때가 있다. 얼마전 생전 처음 링겔 꽂고 병원에 누워있었는데 병명은 '맹장염'이었다. 나이 서른중반이 다되서 처음 들어간 수술실, 그리고 병원. 아버지는 먼 안동에서 울산까지 오셨고 허허 웃으시면서 '엄마가 아들 때문에 펑펑 울더라.'하고 이야기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