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잘 사 주는 예쁜 누나' 드라마가 종방한 지 오랜 시간이 지났다. 배우들도 예쁘고 참 잘생기고, 게다가 내용도 알찬 모양이었는지 와이프는 내가 뒤척이건 말건 휴대폰 불빛을 비추면서 침대맡에서 눈이 빨개지도록 보곤 했다. 나는 드라마를 별로 즐기지 않고 티비도 잘 보지 않는다. 아내가 매일 밤마다 휴대폰으로 보면서 낄낄거리길래 재미있는 건가보다 하고 생각했을 뿐이다. 연하의 남자가 연상의 여인과 사랑에 빠지는 내용 정도로만 알고 있다.
내게도 누나가 한 명 있다. 막내로 자란 나는 누나라는 단어가 익숙하다. 고객들을 만날 때에도 나이가 많은 여성분들은 조금만 친해지면 '누님'이라고 부른다. 상대방이 '나이 차이도 얼마 안 나는데 누나라고 하세요.'하고 이야기하실 때도 있는데, 그럴 때는 더 친근함을 느낀다. 어느샌가 나도 모르게 '누나라고 부를게요.'하고 말이 나온다.
누나는 나보다 한 살 많다. 어느덧 둘 다 30대가 되어서 크고 작은 도움을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지만 어릴 때는 참 많이 싸웠다. 일단 말이 한 두 마디 섞였다 싶으면 그다음부터는 제대로 된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런 상황은 내가 군에 입대하기 전까지 계속되었는데 바람 잘 날이 없다는 말이 들어맞을 정도로 많이 싸웠다. 초등학교 5학년 무렵으로 기억하는데, 누나랑 말싸움을 하다가 갑자기 따귀를 맞았다. 가만히 앉아서 말다툼을 하다가 기습 폭행(!)을 당한 내 코에서 코피가 줄줄 쏟아지기 시작했다. 너무 많이 쏟아지는 피 때문에 당황한 내가 팔을 휘저으며 일어서는 동안 흥분한 누나는 등이며 팔이며 닥치는 대로 때리기 시작했고, 피는 이불이며 베개에 묻어서 난리도 아니었다. 이후 엄마랑 아빠가 돌아오셨을 때 누나가 한 말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나랑 싸우다가 한 대 맞아서 코피 났는데, 코피 난 거 엄마 아빠한테 보여주려고 이불이랑 베개랑 피 묻히고 그러더라."
동네 노래자랑대회든 규모가 큰 가요제든 일단 대회만 나가면 대상을 타오는 누나는 뛰어난 노래실력에 나름대로의 무대매너와 재능도 갖춘, 보기 드문 '개천에서 난 용'이었다. 안동 성희여고 노티스 1기 보컬이었던 누나는 음악을 좋아하는 친구들과 늘 함께 했다. 당시 기타를 치던 누나의 친구 한 분은 미국으로 유학 가서 유명한 뮤지션과 협업 공연을 하기도 했는데 한국의 여성 기타리스트로 밴드를 만들어 음악활동을 하고 있다. 누나가 고등학교 때 친구들과 만든 여고 밴드부는 지금 2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학교의 터줏대감이 되어 있는 모양이다.
학창 시절 인근 중고등학교 학생들 사이에서 '예쁘고 노래도 잘하는 ㅇㅇ여고의 걔'로 유명했던 누나는 대학 입시에서 약간의 어려움을 겪었다. 전문대를 졸업하고 서울권 대학 음악과로 편입을 준비했지만 그마저도 결과가 좋지 않았다. 다행히 지금도 음악을 하고 있고, 평생 음악을 할 모양이다. 다만 세상은 홀로 서는 20대 여성에게 호락호락하지 않았고 경쟁자는 너무 많았다. 20대 중반에 혼자 서울로 올라가서 자리를 잡고 방송국 음향담당자로 일을 할 때는 '일에 비해 소득은 적고 , 마치 노동 착취를 당한 것 같다.'라고 이야기할 정도로 어려워하기도 했었다. 사실 세상은 학벌보다 능력과 리더십을 겸비한 사람만이 성공할 수 있는 곳이라는 게 맞는 말인 것 같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학벌이 가져다주는 이점이라곤 입사할 때와 술자리에서의 자기 자랑 말고는 별로 없다'는 사고방식을 가진 나지만 당시 누나와 부모님이 느꼈을 실망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들지 않았을까 싶다. 누나는 혼자 방에서 음악을 듣거나 조용히 앉아있는 시간이 많았고, 묻는 말에 조용히 대답할 뿐이었다. 밝은 성격 탓에 그런 시간은 길지 않았지만 누나가 인내하는 시간들은 주변 사람들에게 '모두가 숙고해야 할 순간'처럼 느껴졌다. 그래도 나는 동생이라 달랐다. 나이 터울이 크지 않아 '누나에게 상처를 주는 즐거움'으로 시간을 보냈고 당연하게 여겼다.
하지만 누나는 입이 무겁고 속이 깊었다. 누나가 '위로가 되는 사람'으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은 군대에 입대하고 난 뒤였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는 속담과 달리 지리적 거리가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마음에서 더 가까워지고 그리워지는 존재는 가족인 듯싶다. 특히 이등병 말 호봉 때 누나의 면회는 가족의 힘이 얼마나 강한 것인지 뼈저리게 알게 해 준 시간이었다. 100일 휴가를 다녀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누나가 면회 온다는 소식을 듣고 며칠 동안 들떠있었다. 밖에 있을 때는 눈만 마주쳐도 으르렁거리던 사람이었건만 군대에 있으니 그렇게 그리울 수가 없었다. "이건 이렇고 저건 이렇게 해야지. 왜 그렇게 말귀를 못처알아먹냐?" 평소 같았으면 독을 품고 노려봤을 김 상병의 갈굼도 그날은 천상의 하모니처럼 들렸다. '나도 누나 면회 온다 이 새끼야. 우리 누나가 올 때 치킨이랑 도너츠랑 사 온다고 했는데 누나만 오면 너 같은 새끼한테 욕들은 거 정도는 까맣게 잊고...' 사회에서는 단 한 번도 소중함을 몰랐던 누나의 얼굴이 떠올라 갈굼을 당하는 내내 눈물이 방울방울 되어 맺혔다. 면회 오기로 한 약속시간이 한참 지난 3시 30분쯤 되었을까, 내무실 벨이 울렸다. "예, 예, 알겠습니다. PX로 보내겠습니다. 예 수고하십시오, 충성! 야 쩐, 누나 오셨단다. 갔다 와라." 누나는 커다란 치킨박스와 도너츠를 사들고 왔다. 누구한테서 들었는지 내무반에서 필요한 물품들을 살뜰히 챙겨 왔다. 누나의 소중함을 크게 느끼는 순간이었다. "안 힘드나? 군대 갔다 오면 남자가 된다고 하더라. 이제 좀 있으면 포상휴가 나온다고 하니까 좀만 참아레이." 서울에 살면서 표준말이 익숙해질 법도 하건만 누나는 가족을 만나면 안동 사투리가 나왔다. 어느덧 사투리를 쓰는 누나가 어색해져 있었다. 머리통보다 더 큰 박스에 담긴 KFC 치킨 중에 한 조각을 한 손에 쥐고, 수십 개는 될 만한 던킨 도너츠 박스에서 한 개를 꺼내 양 손에 쥐고 먹는데 누나 얼굴을 보면 울 것 같아서 고개를 숙이고 먹었다. 같은 내무실에서 생활하는 선임병들이 지나가다가 눈이라도 마주치면 어쩔 수 없이 경례를 해야 되는데, 누나 앞에서 도저히 그런 자존심 상하는 일은 할 수 없었다. 면회 시간이 다 되어서 누나가 갈 때까지 땅과 누나 신발만 쳐다보면서 먹었다.
누나가 나를 대견하게 생각할 때가 몇 번 있었다. 한국에 와서 뮤지컬 공연을 할 때, 누나는 꽃다발을 들고 찾아와서 나를 안아주며 '대견하다, 내 동생'이라고 이야기했는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묘한 감정이 올라왔다. '내가 누나에게 대견한 존재였구나.' 평생을 함께 살았지만 누나에게 대견하게 행동했던 적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그냥 동생이니까, 한 번씩 용돈이나 주면 고맙지만 동생이라고 하나 있는 게 말 안 들으면 혼도 내는 그런 사람이 누나였다. 내게는 대화라는 게 도저히 안 통하는 그런 '여자 사람'의 존재로만 느껴졌었다. 그런 누나가 '대견하다, 내 동생' 하고 이야기했을 때 작은 행복을 느낄 수 있었다. 수년 전, 아버지 생신 때 있었던 일이다. 내가 해외봉사단 워크숍에 교사로 참석하게 되면서 아버지 생신에 가지 못한 적이 있었다. 그때 아내는 혼자 버스를 타고 시댁에 가서 1박을 하면서 부모님 식사를 대접해드리고 케이크도 사서 잘라드리고 왔다. 애교가 많고 올망졸망한 매력이 있는 아내는 굉장히 지혜롭고 예쁜 구석이 있었다. 울산에서 안동까지 가서 고기도 사드리고, 작은 케이크를 사서 초를 꽂아놓고 '해피 벌스데이 투 아버님' 하고 노래를 불러드리고, 연세가 팔십이 넘으신 할머니 입에 케이크도 넣어드리고 왔다. 그런 아내를 누나는 무척이나 좋아하고 이뻐했다. 누나는 두고두고 그 일을 고마워하며 '우리 동생이랑 결혼한 시동생이 이렇다!' 하고 동네방네 자랑을 하고 다녔다. 대견한 동생뿐만 아니라 대견한 시동생까지 합세한 셈이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 사업은 잘 풀리지 않았다. 분명히 맞벌이를 하는데도 쪼들렸다. 빚을 갚고, 대출금을 내고 나면 남는 게 없었다. 돈이란 게 정말 벌 수 있는 때가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일은 잘 풀리지 않았고 뭘 해도 제대로 되는 게 없었다. 하루하루 답답하고 짜증스럽기만 하던 그때, 하루는 아내랑 운전해서 집으로 오는데 아내가 이야기를 했다. "오빠, 언니가 있잖아.." '언니? 우리 누나?" "응. 언니가 우리 옷 사 입으라고 돈 보내주셨어." "돈? 뭐, 얼마나?" "백만 원."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불쾌한 기분. 그 기분은 한동안 계속 이어졌는데 누구에게 쉽게 설명할 수 있는 그런 기분은 아니었다. 굳이 설명하자면 '나는 평생 다른 사람한테 베풀지도 못하고 매번 도움만 받다가 죽을 인생인가' 하는, '도대체 이 나이 되도록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 인간인가' 하는 자기 연민의 일종이랄까. 하지만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 보니 누나에게도 내가 의지할 대상이 될 때가 있었다.
얼마 전, 아내와 집 근처 마트에서 장을 보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누나였다. "어디야? 시끌시끌하네." "어, 누나. 잠시 장 보러 왔어." 잠시 정적이 흐르는가 싶더니 누나는 갑자기 울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한참을 전화기를 붙들고 울었다. 언제 저렇게 울었던 적이 있었나, 싶었다. 20대가 되면서 누나가 그렇게 우는 모습을 본 적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20대 초반에 서울로 올라가서 30대 중반이 될 때까지 혼자 살던 누나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크고 작은 문제들을 만나며 마음에 큰 상처를 입었다. 혼자 어떻게든 이겨보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도저히 견딜 수 없을 지경이 되어서야 '들어줄만한 사람'에게 전화를 한 것이었다. 누나와 나는 오래간만에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간의 어려움들을 이야기하고, 마음을 나누며 대화를 했다. 누나의 마음에도 크고 작은 상처들이 있었고, 혼자 살면서 고립되어 있는 누나에게는 그런 상처들이 더 많은 생각들을 만들어낼 수도 있었다. 물리적인 거리가 있어서 당장 해줄 수 있는 건 없었지만 이제는 누나가 의지할 만한 대상이 되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자주 올라갈게. 자주 보자."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일들을 다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대견한 동생이 되는 데 많은 노력이 필요한 건 아니었다. 들어주고, 대화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누나에게는 대견한 동생이 될 수 있었다. '예쁘고 노래도 잘하던 누나'는 30대 후반의 사회인이 되었고 나도 역시 30대 후반에 접어든다. 누나는 요즘도 방송일로 바쁘다. 가끔 방송에도 간간이 출연하는데 뒷모습만 나와서 사람들이 얼굴을 궁금해한단다. "재밌잖아. 누군지 안 밝히면. 난 지금이 재밌어." 누나의 마음이 항상 따뜻하기를 바라며,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이 펼쳐지기를 희망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