멕시코는 얼마나 잘 살까
며칠 전 한국 80-90년대생들에겐 충격이었을 기사가 하나 떴는데 바로 멕시코가 명목 GDP에서 한국을 앞지르기 시작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사실 88 올림픽 이후 태어난 현재 청년-중년 세대는 한국이 적어도 동남아나 중남미 정도 이상은 살기 시작했을 때 태어났기 때문에, 멕시코나 인도네시아 같은 나라에게 역전당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 해봤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더 큰 틀에서 보면 한국이 멕시코보다 잘살기 시작한 지는 생각보다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멕시코는 미국 밑이라는 강력한 지리적 이점이 있었고 삼림, 지하자원도 풍부하며 석유까지 나는 꽤 괜찮은 나라였던 반면, 한국은 가뜩이나 좁고 자원도 없는 땅에서 북한이라는 적을 마주하며 자동차, 반도체와 같은 고부가가치 산업에 국가의 존망을 걸고 투자해서야 비로소 살 만한 정도까지 올라올 수 있었습니다.
한국이 이를 갈며 맨땅에 제철소, 반도체 공장을 세우는 동안 멕시코는 아쉽게도 부패, 정경유착, 그리고 거기에서 오는 국영기업, 대기업들의 혁신 부재로 인하여 삼성, 현대와 같은 이렇다 할 글로벌 브랜드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현재까지도 한국으로 치면 이마트, SK텔레콤 같은 기업이 시가총액 10위권에 올라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또한 1980년대부터 대규모 카르텔들이 미국으로의 마약 밀수를 전담하면서 내전상태를 방불케 하는 일부 지역의 치안도 멕시코의 대외 이미지를 크게 깎아먹었습니다. 따라서 최근까지도 많은 멕시코인들이 선진국으로의 발전을 크게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멕시코의 알려진 모든 단점들에도 불구하고 최근 몇 년 새 국운이 바뀌었다고 할 정도로 멕시코의 분위기가 긍정적으로 변했습니다. 미국의 니어쇼어링으로 인해 멕시코 북부 지역이 폭발적으로 발전하였고 투자가 늘어났으며 인스타그램 등으로 멕시코의 멋진 관광지들이 주목을 받으면서 상당히 많은 미국인들이 멕시코로 휴양, 신혼여행을 오고 있습니다. 그 결과 해안가의 관광 산업은 더욱 발전하고, 산업과 자본의 집약체인 몬테레이, 멕시코 시티 두 메이저 도시는 어지간한 미국 도시보다 뛰어난 생활 수준을 자랑하게 되었습니다.
흔히들 미국을 선진국이라고 하지만 한인들이 많이 가는 캘리포니아, 뉴욕, 워싱턴 DC 말고 중부나 남부의 인기 없는 주에 가보면 격차를 바로 느낄 수 있듯이, 미국이나 멕시코처럼 땅이 넓은 연방제 국가가 잘 사는지 못 사는지를 따져보려면 주별로 봐야 합니다. 미국의 경우 캘리포니아처럼 넘사벽으로 GDP 아웃풋이 높은 주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주들이 1인당 5-6만 달러 정도로 고만고만하며 5만 달러가 안 되는 주들도 4곳이나 존재합니다.
같은 맥락에서 멕시코 주별 데이터를 한번 봅시다. 1차적으로 눈에 띄는 것은 멕시코의 지역 격차가 매우 심하다는 점입니다. 미국과 비등한 수준의 5만 달러가 넘는 주가 있는 반면 1만 달러도 안 되는 후진국 수준의 남부 주들이 눈에 띕니다. 가장 못 사는 치아파스주의 경우 아예 사파티스타라는 반군 조직이 통제하고 있어 국가에서 지원도 받기 힘든 실정입니다.
그럼 한국 1인당 소득이 현재 3만 4천 달러, 서울이 4만 달러인 것을 감안하고 주별로 비교해 봅시다.
캄페체 주(남동부): 칸쿤 옆에 붙어있는 캄페체 주가 인당 소득 5만 달러를 기록해서 여기만 무슨 스위스인가 싶을 수 있지만 "석유"로 간단하게 요약할 수 있습니다. 이곳에 위치한 칸타렐 유전은 한때 사우디 다음으로 많은 석유를 생산했던 적도 있습니다. 석유로 번 돈은 어차피 캄페체 주에서 빠져나가기 때문에, 석유산업을 제외하고 보면 인당 소득은 3만 달러 정도라고 합니다.
바하 캘리포니아 수르(서북부): 바하 캘리포니아 지역은 샌디에이고와 맞닿아 있기 때문에 미국과 경제 활동이 활발하고, 남부 바하 캘리포니아는 칸쿤과 비슷하게 휴양지로 미국인들에게 많은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미국으로의 해산물, 농산물 수출도 활발합니다.
소노라(북부): 애리조나와 맞닿은 국경 주로써 역시 미국과 경제활동이 활발하게 일어납니다. 주요 생산품은 광업이며 따라서 전자제품, 에너지 등을 생산하는 제조업이 발달했습니다. 자동차 제조업 또한 전국 1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소노라 땅의 상당 부분이 서부영화에 나오는 척박한 사막인 것을 감안하면 꽤 선방한 결과입니다. 단 국경지대다 보니 치안은 좋지 않은 편입니다.
코아윌라(동북부): 텍사스와 붙어있으며 FCA, GM 등 자동차 기업이 대거 진출해 있습니다. 소노라주와 합치면 멕시코 전체 자동차 아웃풋의 30% 가까이를 담당합니다.
누에보 레온(동북부): 역시 텍사스와 붙어있으며 기아자동차가 진출해 있어 한인들에게 가장 친숙한 주입니다. 누에보 레온의 주도인 몬테레이는 멕시코 제3의 도시로써 백만 명 넘는 인구를 갖고 있는 발달한 도시입니다.
멕시코(중부): 멕시코 시티가 위치한 주의 이름도 멕시코입니다. 아즈텍 제국 시절부터 멕시코의 패권을 가지고 있던 중원과 다름없는 지역이며 금융, 산업, 문화 등 모든 면에서 수도의 포스를 느낄 수 있습니다. 멕시코 시티가 엄청 큰 도시인만큼, 도시 내에서도 빈부 격차가 크게 체감되는 편인데 한남동 수준의 부촌도 있는가 하면 카페 하나 없는 낙후된 동네도 많이 있습니다.
타바스코(남부): 타바스코 핫소스가 이름을 따온 그 주입니다. (정작 타바스코 소스는 미국 루이지애나에서 만들어집니다) 해외에는 거의 안 알려져 있지만 공업, 농업, 제조업 등이 꽤 발달했으며 주요 카카오 생산지이기도 합니다. 상태가 안 좋은 남부 주 중에서 비교적 선방했습니다.
중부를 보면 시나로아, 듀랑고가 1만 5천에서 2만 달러 정도로 집계되는데, 일단 듀랑고는 시에라 마드레 산맥과 사막으로 이루어져 있어 농업, 임업 외에 무언가 하기 어려운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때문에 예전부터 인구 밀도도 매우 낮았으며, 멕시코 혁명 당시에는 판초 비야와 같은 혁명군이 복잡한 지형을 적극 이용해서 작전하기도 했습니다. 시나로아의 경우 해안가를 차지하고 있어 발전하기에 괜찮은 조건이었지만 위에 있는 소노라에게 밀리고 카르텔의 발상지 중 하나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멕시코 시티 밑으로는 게레로, 오아하카, 치아파스 등 전부 빨간색 일색으로, 모두 기초적인 산업 말고 성장 동력이 부족하며, 미국과 무언가 해볼 수 있는 위치도 아니고, 북부처럼 공업이 발달하지도 않아서 발전에서 낙후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개발을 하자니 밀림과 보호구역을 훼손해야 하므로 관광산업 말고는 딱히 뾰족한 수가 없어 보입니다.
결론 내보자면, 멕시코 전체의 1인당 GDP는 아직 한국에 비해 많이 낮은 편으로 가야 할 길이 멉니다. 많은 지역들이 개발과 현대화에서 밀려나 80년대 수준에 머물러 있으며, 불안한 치안과 부패한 정치 등 아쉬운 통제력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북부 공업지대를 위시한 멕시코의 발전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으로, 저성장이 고착화되는 위기를 맞이한 한국에 비해서 훨씬 성장 가능성이 큽니다. 이번 기회를 멕시코가 잘 활용하여 한단계 도약한다면 최소한 북부 그리고 멕시코시티에 한해서는 미국에 준하는 수준까지 올라갈지 모르니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