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서고 41화
1.
새벽 두 시, 편의점 형광등 아래에서 한 남자가 도시락을 고르고 있었다. 정갈하게 다림질된 와이셔츠 소매가 냉장고 문에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세 개의 도시락을 번갈아 들어보더니 결국 가장 저렴한 것을 집어 들었다. 계산대로 향하는 그의 걸음걸이는 이상하리만치 반듯했다. 피곤에 절어야 마땅할 시간임에도 그의 등은 곧게 펴져 있었고, 점원에게 건네는 "감사합니다"는 너무도 또렷했다.
2.
문득 궁금해졌다. 저 사람은 지금 웃고 있는 걸까, 아니면 웃어 '보이는' 것일까.
3.
요즘 우리는 모두 [잘 지내고] 있다. SNS 타임라인은 행복의 전시장이다. 누군가는 오늘도 맛있는 브런치를 먹었고, 누군가는 승진을 했으며, 또 누군가는 여행지에서 황홀한 일몰을 감상했다. '좋아요'를 누르는 손가락은 분주하다. 댓글란에는 축하와 부러움이 줄을 잇는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이 모든 행복의 향연 속에서 우리는 점점 더 고립되어간다.
4.
독일의 철학자 한병철은 《피로사회》에서 현대인이 겪는 고통이 더 이상 외부의 억압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오늘날의 고통은 자기 자신에 대한 과도한 긍정, 끝없는 자기계발의 강박, 그리고 "할 수 있다"는 주문이 만들어낸 자기착취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더 이상 타인의 채찍질이 필요 없다. 우리 스스로가 가장 잔인한 감독관이 되어 자신을 몰아세운다.
5.
이때 가면은 필수품이 된다. 아니, 가면이라는 표현조차 부적절할지 모른다. 왜냐하면 가면은 '벗을 수 있는 것'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24시간 가동되는 자기검열의 시대에, 과연 우리는 언제 가면을 벗는가. 퇴근 후에? 주말에? 휴가 때? 아니다. 퇴근 후에도 우리는 '워라밸을 즐기는 사람'의 가면을 쓰고, 주말에는 '자기계발에 여념이 없는 사람'의 가면을 쓰며, 휴가 때조차 '인생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의 가면을 쓴다.
가면과 얼굴의 경계가 흐려진 것이다. 아니, 이미 융합되었다고 말하는 편이 정확할 것이다.
6.
대학 시절, 나는 한 친구를 알고 있었다. 그는 언제나 밝았고 유쾌했으며 모임의 분위기를 주도하는 사람이었다. 그와 함께 있으면 웃음이 끊이지 않았고, 그의 에너지는 주변 사람들을 감염시켰다. 우리는 모두 그를 '행복한 친구'라고 불렀다. 졸업 후 몇 년이 지나, 우연히 그의 일기장을 보게 되었다. 정확히는, 그가 세상을 떠난 뒤 유품을 정리하는 자리에서였다.
7.
일기장은 충격적이었다. 거기에는 우리가 알던 그 밝은 친구가 아니라, 극심한 우울과 불안에 시달리는 한 인간의 절규가 담겨 있었다. "오늘도 웃었다. 모두가 내 웃음에 속아 넘어갔다. 나는 점점 더 능숙한 배우가 되어간다"라는 문장 앞에서, 나는 한참을 서 있어야 했다. 그는 가면을 쓴 것이 아니었다. 가면이 그가 된 것이다.
8.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은 인간의 욕망이 타자의 욕망이라고 말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실은 우리 자신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이 우리에게 원하기를 바라는 것, 혹은 타인이 원한다고 우리가 상상하는 것이라는 의미다. 현대사회에서 이 메커니즘은 극대화된다. 우리는 끊임없이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고, 그 시선이 원하는 '나'를 연기한다.
문제는 이 연기가 너무도 완벽해져서, 연기자 본인조차 자신이 연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다는 점이다. 방법론이 목적이 되고, 수단이 본질을 잠식한다. 우리는 행복해 보이기 위해 실제로 행복할 기회를 놓친다. 성공한 척 하느라 진정한 성공이 무엇인지 질문할 여유를 잃는다.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 되려다가, 정작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사랑받을 기회를 스스로 박탈한다.
9.
최근 가면 증후군(Imposter Syndrome)이라는 개념이 주목받고 있다. 자신의 성취를 인정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자신이 사기꾼인 것처럼 느끼는 심리 상태를 말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 증후군이 특히 성공한 사람들에게서 많이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객관적으로 뛰어난 성과를 이룬 사람들이 오히려 자신이 '가짜'라고 느낀다.
이것이야말로 현대적 가면의 역설이 아닐까. 우리는 가면을 완벽하게 쓸수록, 그 가면 뒤의 진짜 자신이 '가짜'처럼 느껴진다. 가면이 정체성이 되는 순간, 오히려 정체성의 위기가 찾아오는 것이다.
10.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가면을 벗어야 하는가. 하지만 앞서 말했듯, 가면과 얼굴이 이미 융합된 상황에서 '벗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오히려 이것은 잘못된 질문일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가면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아닐까. 내가 지금 연기하고 있음을, 그리고 그 연기가 나의 전부가 아님을 기억하는 것. 장 폴 사르트르의 표현을 빌리자면, 자기기만(mauvaise foi)에서 벗어나 자신의 상황을 직시하는 것.
11.
이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현대사회는 이러한 자각을 방해하는 온갖 장치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쉼 없이 울리는 알림, 끝없이 업데이트되는 피드, 숫자로 환원되는 자기가치. 이 모든 것이 우리를 표면 위에 붙들어두고, 깊이로 내려가지 못하게 막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혹 균열이 생기는 순간들이 있다. 새벽 두 시 편의점에서 도시락을 고르는 순간, 지하철에서 문득 창밖을 바라보는 순간, 샤워 중에 물줄기를 맞으며 멍하니 서 있는 순간. 이런 틈새의 시간들에서, 우리는 가면 너머를 힐끗 엿볼 수 있다.
그 순간이 불편하다면, 그것은 좋은 징조다. 불편함은 아직 우리 안에 가면과 구분되는 무언가가 남아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우리가 너무 빨리 그 불편함을 덮어버리려 한다는 것이다. 핸드폰을 꺼내들거나, 음악을 틀거나, 무언가를 먹거나.
12.
블레즈 파스칼은 《팡세》에서 "인간의 모든 불행은 방 안에 조용히 혼자 있지 못하는 데서 온다"고 했다. 그가 17세기에 이 말을 했다면, 21세기의 우리는 얼마나 더 불행한가. 우리는 혼자 있는 것을 견디지 못할 뿐 아니라, 자기 자신과 함께 있는 것조차 두려워한다.
가면은 이제 보호막이 아니라 감옥이 되었다. 우리는 그 안에 갇혀서 밖을 내다보지도, 안을 들여다보지도 못한다. 그저 가면의 표면만을 부지런히 닦고 또 닦을 뿐이다. 더 밝게, 더 매끄럽게, 더 완벽하게.
하지만 언젠가는, 그 가면에 금이 갈 것이다. 아무리 정교하게 만들어진 가면이라도 영원할 수는 없다. 문제는 그 금이 갔을 때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느냐다. 필사적으로 그 금을 메우려 할 것인가, 아니면 그 틈으로 들어오는 빛을 직시할 용기를 가질 것인가.
13.
가면의 시간은 지나가고 있다.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그리고 그 너머에 무엇이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쩌면 또 다른 가면일지도, 어쩌면 아무것도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는 질문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질문 자체가, 가면으로부터의 첫 번째 자유일 것이다.
2023. 6.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