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서고 71화
1958년 독일 연방헌법재판소는 획기적인 결정을 내렸다. Lüth 판결이라고 불리는 이 결정에서 재판소는 처음으로 "기본권의 방사효"라는 이론을 확립했다.
방사효란, 기본권을 단순히 국가가 개인을 침해하지 말아야 한다는 소극적 명령이 아니라, 국가가 기본권을 적극적으로 실현해야 한다는 적극적 명령도 포함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입법자의 역할을 근본적으로 재정의한 것이다. 다시 말해, 입법자는 단순히 법을 만들 권한만 가진 것이 아니라, 기본권을 실현할 의무를 진다는 것이다.
이 원칙은 1970년대 들어 더욱 발전했다. 재판소는 "본질성 이론"(Wesentlichkeitstheorie)을 정립하면서, 기본권에 본질적인 사항은 입법자가 스스로 결정해야 하며 행정부나 사법부에 위임할 수 없다고 판시했다. 1978년 Kalkar 결정은 이를 명확히 보여준다.
해당 결정은 원자력발전소의 안전 기준에 관한 사건이었다. 법률은 단지 "안전한 수준"이어야 한다고만 규정하고 구체적 기준은 행정부 규칙에 위임한 것이 정당한지 문제되었는바 재판소는 이것이 위헌이라고 판단했다. 원자력 안전은 국민의 생명과 건강에 본질적이므로, 입법자가 적어도 대략적인 수준은 법률에 명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결정이 주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입법자는 어려운 정책 결정을 다른 기관에 떠넘길 수 없다. 따라서 "전문가가 알아서 할 것"이라며 모든 것을 위임하는 것은 입법 의무 위반이다. 헤데만이 90년 전 도덕적·정치적 비판으로 제기했던 "도피" 문제가, 이제 헌법적 의무 위반으로 구성된 것이다. 이것이 법치국가가 입법자의 책임을 강화하는 방식이다.
한국은 어떠한가? 헌법재판소도 유사한 원칙을 발전시켜왔다. 포괄위임입법금지 원칙이 그것이다. 헌법 제75조와 제95조는 법률에서 위임받은 사항과 범위를 명확히 하도록 규정한다. 헌법재판소는 이를 근거로 예측 가능성을 요구한다. 국민이 법률로부터 어느 정도 구체적 내용을 예측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 원칙의 적용은 느슨하다. 재판소는 대부분의 위임을 합헌으로 보며, 위헌 결정은 극히 드물다. 입법자의 도피를 효과적으로 막지 못하는 것이다.
2020년 말 낙태죄 개정 시한을 넘긴 국회를 생각해보자. 헌법재판소가 명확히 개정을 명령했는데도 국회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법적 공백이 발생하여 의사들과 여성들이 불확실성 속에 놓였다. 그러나 국회의원 누구도 책임을 지지 않았다. 이것이 문제다. 입법자의 도피가 실질적 피해를 낳아도, 책임을 묻는 메커니즘이 없다. 국회의원은 다음 선거에서 심판받는다고 하지만, 유권자가 복잡한 입법 기술 문제를 평가하기는 어렵다. 그 결과 입법자는 계속해서 어려운 결정을 회피하고, 법원과 행정부에 떠넘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헤데만의 90년 전 경고는 여전히 유효하지만, 경고만으로는 부족하다. 구체적인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 입법자가 도피하면 실질적 대가를 치르게 만드는 메커니즘 말이다. 이 글은 그런 메커니즘을 세 층위에서 제안한다. 입법 단계의 예방적 통제, 사법 단계의 교정적 통제, 그리고 사후 책임 단계의 제재적 통제다.
(1) 입법단계에서는 국회의 입법영향평가를 강화해야 한다. 현재도 국회는 법안에 대해 체계심사를 하지만, 일반조항 사용의 필요성과 한계를 충분히 검토하지 않는다. 독일처럼 명확성 검토를 의무화하고, 법안에 일반조항이 포함되면 제안자가 상세한 정당화 보고서를 제출하게 해야 한다. "왜 구체적 기준을 제시할 수 없는가", "사법부나 행정부에 위임하는 범위와 한계는 무엇인가"를 명확히 설명하도록 강제하는 것이다.
(2) 사법 단계에서는 헌법재판소와 대법원이 명확성 심사를 더 엄격히 해야 한다. 특히 "확립된 판례로 명확해졌다"는 논리를 재검토해야 한다. 현재 재판소는 일반조항이라도 판례가 쌓이면 합헌으로 보는데, 이는 결과적으로 입법자의 도피를 추인한다. 오히려 "판례로 명확해질 정도라면, 입법자가 직접 그 기준을 법률에 명시해야 한다"고 보아야 한다.
(3) 사후책임 단계에서는 가장 혁신적 제안이 필요하다. 입법자가 헌법재판소의 개정명령을 무시하면 국가배상 책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독일은 입법자의 위헌적 입법이나 입법 부작위로 인한 손해에 대해 국가배상을 인정한다. 한국도 이를 도입하여 입법자에게 실질적 압박을 가해야 한다. 입법자가 도피한 대가를 국민이 아니라 입법자가 치르게 만드는 것이다.
이 글은 헤데만의 경고에서 출발하여 현대적 해결책까지 나아간다. 일반조항 문제는 해결 불가능한 딜레마처럼 보이지만, 실은 제도 설계의 문제다. 독일, 프랑스, 북유럽 국가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입법자의 책임을 강화해왔다. 한국도 이를 참고하여 우리 맥락에 맞는 제도를 발전시킬 수 있다. 법이 명확하지 않을 때 누가 결정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분명하다. 입법자가 결정해야 하고, 입법자가 도피하면 민주주의가 위험에 처한다. 이제 그 책임을 실질적으로 강제할 시간이다.
1978년 10월 8일, 독일 연방헌법재판소는 역사적 판결을 내렸다. Kalkar 결정이라고 불리는 이 판결은 원자력발전소 건설 허가를 둘러싼 사건이었다. 쟁점은 기술적으로 복잡해 보였지만, 그 이면에는 민주주의의 근본 원리가 걸려 있었다.
당시 독일 원자력법은 "원자력 시설은 현재의 과학기술 수준에 따라 필요한 예방조치가 취해진 경우" 허가될 수 있다고 규정했다. 문제는 "필요한 예방조치"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법률이 말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모든 것이 행정부 규칙과 전문가 판단에 위임되었다. 입법자는 "전문가들이 알아서 할 것"이라며 구체적 기준 제시를 회피했다.
재판소는 이를 위헌으로 판단했다. 판결문의 핵심 논리는 명확했다. "원자력 시설의 안전 기준은 국민의 생명과 건강에 직접적 영향을 미치는 본질적 사항이다. 이런 본질적 사항은 의회가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행정부나 전문가에게 완전히 위임할 수 없다. 의회는 적어도 대강의 기준을 법률에 명시해야 한다."
이것이 "본질성 이론"(Wesentlichkeitstheorie)의 탄생이었다. 재판소는 이후 이 이론을 체계화했다. 기본권에 본질적인 영향을 미치는 사항은 의회 유보(Parlamentsvorbehalt)에 속한다는 것이다. 의회가 직접 법률로 정해야 하며, 행정부나 법원에 백지위임할 수 없다는 원칙이다.
그렇다면 본질성의 판단기준은 무엇인가? 재판소는 여러 결정을 통해 이를 구체화했다. 첫째, 기본권 제한의 강도다. 기본권을 강하게 제한할수록 의회가 직접 결정해야 한다. 둘째, 영향받는 사람의 범위다. 국민 전체나 큰 집단에 영향을 미치면 의회 결정이 필요하다. 셋째, 논쟁성이다. 가치관에 따라 판단이 갈리는 사안일수록 민주적 절차가 중요하다.
구체적 사례를 보자. 학교 교육은 본질적 사항이다. 무엇을 가르칠지, 어떻게 평가할지는 아이들의 인격 발달에 직접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교육부에 백지위임할 수 없고, 의회가 법률로 대강을 정해야 한다. 세금도 본질적이다. 누구에게 얼마를 부과할지는 재산권의 핵심이다. 의회가 구체적 세율을 정해야 한다. 형벌은 당연히 본질적이다. 무엇을 범죄로 하고 어떻게 처벌할지는 자유권의 근간이다.
반면 기술적 세부사항은 본질적이지 않다. 예를 들어 의회가 "대기오염 물질 배출을 규제한다"고 정하면, 구체적 수치는 환경부 규칙으로 정할 수 있다. 과학기술 발전에 따라 기준이 변해야 하므로, 전문가에게 맡기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러나 "어느 정도 수준으로 규제할 것인가"라는 정책 방향은 의회가 정해야 한다. "엄격하게", "느슨하게", "단계적으로"라는 정도의 방향이라도 제시해야 한다.
이 이론이 주는 함의는 강력하다. 헤데만이 90년 전 도덕적 비판으로 제기했던 "도피" 문제를, 연방헌법재판소는 헌법적 의무 위반으로 구성한 것이다. 입법자는 어려운 결정을 회피할 "권리"가 없다. 기본권에 본질적인 사항을 결정하는 것은 의회의 "의무"다. 이 의무를 위반하면 법률이 위헌으로 무효가 된다.
Kalkar 결정 이후 독일 입법 문화는 변했다. 의회는 법안을 심사할 때 "이것이 본질적 사항인가"를 먼저 묻게 되었다. 본질적이면 법률에 구체적으로 규정해야 한다. 행정부에 위임하더라도 범위와 한계를 명확히 해야 한다. "적절하게", "필요한 만큼" 같은 백지위임은 허용되지 않는다.
물론 경계선은 여전히 논쟁적이다. 무엇이 "본질적"인지 객관적으로 정해지지 않는다. 재판소도 사안마다 판단이 엇갈릴 때가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물음이 제도화되었다는 점이다. 입법자도, 행정부도, 법원도 이제 "본질성"을 무시할 수 없다. 이것이 법률 초안 작성 단계부터 위헌심사까지 전 과정에 스며들었다.
한국에도 유사한 원칙이 있다. 헌법 제75조와 제95조는 "위임입법의 구체성과 명확성"을 요구한다. 헌법재판소도 포괄위임입법금지 원칙을 발전시켰다. 그러나 독일만큼 엄격하게 적용되지는 않는다. 한국 헌법재판소는 대부분의 위임을 합헌으로 본다. 위헌 결정은 극히 드물다.
차이는 어디서 오는가? 독일 재판소는 "본질성"이라는 실질적 기준을 사용한다. 위임의 문언이 명확한지보다, 위임되는 사항이 본질적인지를 본다. 본질적이면 아무리 명확히 위임해도 안 된다. 의회가 직접 결정해야 한다. 반면 한국 재판소는 주로 형식적 명확성을 본다. 위임 조항이 "대통령령으로 정한다"고 명확히 쓰여 있으면 대체로 합헌이다. 위임되는 내용이 본질적인지는 덜 따진다.
이 차이가 결과의 차이를 낳는다. 독일에서는 입법자가 본질적 사항을 회피하면 위헌 위험이 크다. 따라서 처음부터 법률에 구체적으로 쓰려고 노력한다. 반면 한국에서는 위헌 위험이 작으므로, 입법자가 "대통령령으로 정한다"는 포괄 위임을 선호한다. 낙태죄, 차별금지법, 안락사법 같은 논쟁적 사안에서 국회는 계속 결정을 미룬다. 헌법재판소가 강제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해법은 무엇인가? 한국 헌법재판소가 독일식 본질성 이론을 더 적극적으로 적용하는 것이다. 낙태 가능 주수, 차별금지 사유, 안락사 요건 같은 것들은 명백히 본질적 사항이다. 국회가 "사회적 합의 필요"라며 방치하는 것을 재판소가 용인해서는 안 된다.
"국회는 이런 본질적 사항을 회피할 수 없다. 정치적으로 어렵더라도 결정해야 한다. 그것이 민주적으로 선출된 의회의 책임이다"
라고 선언해야 한다.
이것이 사법부가 입법부를 압박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실은 민주주의를 강화하는 것이다. 선출되지 않은 행정 관료나 법관이 실질적 결정을 내리는 것보다, 선출된 국회의원이 결정하고 유권자에게 책임지는 것이 민주적이다. 본질성 이론은 권력을 입법자에게 돌려주는 것이다. 다만 그 권력과 함께 책임도 돌려주는 것이다.
Kalkar 결정이 보여준 것은 희망이다. 사법부가 입법자의 도피를 견제할 수 있고, 그것이 실제로 입법 문화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제 이 원칙을 여러 단계에서 제도화하는 구체적 방안을 탐구해보자.
문제가 발생한 후 고치는 것보다 예방하는 것이 낫다. 입법자의 도피를 막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법안 작성 단계에서부터 통제하는 것이다. 독일과 스웨덴의 경험이 좋은 참고가 된다.
(1) 독일 연방의회는 법안 심사 시 "입법영향평가"를 의무화한다. 제안자는 법안이 어떤 효과를 낳을지 미리 분석하여 제출해야 한다. 경제적 영향, 행정적 부담, 기본권 제한 정도 등을 평가한다. 그리고 여기에 "명확성 검토"(Bestimmtheitsprüfung)가 포함된다.
명확성 검토는 구체적으로 이렇게 작동한다. 법안에 일반조항이 포함되면, 제안자는 왜 구체적 기준을 제시할 수 없는지 설명해야 한다. 예를 들어 "신의성실"이라는 용어를 쓴다면, "이 용어의 의미는 무엇인가", "법원이나 행정부가 어떻게 해석할 것으로 예상하는가", "남용 위험은 없는가"를 답해야 한다. 단순히 "전문가가 판단할 사항"이라고만 쓰면 안 된다.
또한 위임 조항이 있으면 위임의 범위와 한계를 명시해야 한다. "대통령령으로 정한다"고만 쓰면 부족하다. "대통령령은 다음 기준에 따라 세부사항을 정한다"며 기준을 열거해야 한다. 예를 들어 환경 규제 법안이라면 "대통령령은 1) 인체 건강 보호, 2) 경제적 실행 가능성, 3) 기술 발전 수준을 종합 고려하여 배출 기준을 정한다"는 식으로 방향을 제시한다.
이런 정당화 의무가 있으면 입법자의 행동이 달라진다. "어차피 나중에 법원이 정리하겠지"라는 안이한 태도를 가질 수 없다. 법안 제출 전에 일반조항 사용의 필요성을 입증해야 하므로, 가능한 한 구체화하려고 노력하게 된다. 또한 의회 심사 과정에서 야당이나 전문가들이 명확성을 집중적으로 따지므로, 애매한 법안은 통과하기 어렵다.
한국 국회에도 법제사법위원회의 체계·자구 심사가 있다. 그러나 이것이 주로 형식적 검토에 그친다. "조문의 표현이 명확한가", "다른 법률과 중복되지 않는가" 정도를 본다. "이 조항이 국민에게 충분히 예측 가능한가", "입법자가 본질적 결정을 회피하는 것은 아닌가"라는 실질적 검토는 약하다.
이를 강화하려면 법제사법위원회에 "명확성 심사"를 명시적 심사 기준으로 추가해야 한다. 현재 국회법 제86조는 법사위가 "법률안의 자구·형식과 내용의 체계를 심사한다"고만 규정한다. 여기에 "법률안의 명확성과 예측가능성을 심사한다"는 조항을 추가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한 구체적 체크리스트를 만든다.
체크리스트는 이런 항목들을 포함할 수 있다.
이 체크리스트를 법안 심사 보고서에 포함하도록 의무화한다. 법사위가 "명확성 검토 결과: 합격/불합격"을 명시하는 것이다. 불합격이면 법안을 소관 상임위로 돌려보내 수정하게 한다. 이렇게 하면 처음부터 법안을 명확하게 쓰려는 유인이 생긴다.
또한 법안 제출 시 "일반조항 사용 정당화 보고서"를 첨부하도록 할 수 있다. 법안에 일반조항이 포함되면, 제안자가 왜 그것이 필요한지, 어떻게 해석될 것으로 예상하는지, 남용을 막을 장치는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별도 문서를 내는 것이다. 이것이 없으면 법안이 접수조차 안 되게 만든다.
(2) 스웨덴은 더 나아간다. 스웨덴 국회는 법안 발의 전에 "입법 품질 선언"(Legislative Quality Statement)을 요구한다. 제안자가 "이 법안은 명확하고, 일관성 있으며, 실효성이 있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 명확성 부분에서는 "이 법안의 핵심 용어들은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예상되는 해석상 논란과 그 해결 방안은 다음과 같다"를 적는다.
이 선언서는 공개되어 시민들이 볼 수 있다. 나중에 법이 시행되어 문제가 생기면, 시민들이 "제안자가 선언한 것과 다르지 않은가"라고 추궁할 수 있다. 이것이 정치적 책임성의 메커니즘이다. 국회의원들은 다음 선거에서 "당신이 만든 법이 너무 애매해서 문제가 많다"는 비판을 받는다. 따라서 처음부터 신중하게 법안을 쓰게 된다.
한국에도 이를 도입할 수 있다. 법안 발의 시 "입법 품질 선언서"를 의무 첨부 서류로 만드는 것이다. 현재 국회법 제79조는 의안 발의 시 제안 이유와 주요 내용을 적도록 한다. 여기에 "명확성 평가"를 추가한다. 제안자가 "이 법안의 주요 용어는 충분히 명확하며, 예상되는 해석 논란은 다음과 같고, 이를 해결하는 방안은 다음과 같다"고 적는 것이다.
그리고 이 선언서를 국회 홈페이지에 공개한다. 시민들이 법안을 검토할 때 이 선언서를 보고 의견을 제출할 수 있다. "이 법안의 제3조는 제안자의 설명과 달리 불명확하다. 다음과 같은 상황에서 어떻게 적용되는지 알 수 없다"는 식으로 구체적 문제점을 지적할 수 있다. 국회는 이런 의견을 고려하여 법안을 수정한다.
물론 이런 절차가 입법 과정을 복잡하게 만들고 시간을 지연시킬 수 있다. 국회의원들은 "그렇지 않아도 법안 처리가 느린데 절차를 더 추가하면 어떻게 하느냐"고 반발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단기적 불편과 장기적 이익의 균형 문제다. 처음에 시간을 들여 명확한 법을 만들면, 나중에 법 해석을 둘러싼 소송과 혼란이 줄어든다. 결과적으로 사회 전체의 비용이 감소한다.
또한 이런 절차가 정착되면 오히려 입법이 빨라질 수 있다. 명확한 법안은 심사가 빠르다. 논란이 적기 때문이다. 반면 애매한 법안은 의원들 사이에 해석이 엇갈려 심사가 지연된다. 따라서 장기적으로는 입법 효율성도 높아진다.
입법 단계의 통제는 예방적이다. 문제가 생기기 전에 막는 것이다. 그러나 완벽하지는 않다. 아무리 사전 검토를 해도 애매한 법이 통과될 수 있다. 정치적 압력이나 시간 부족 때문에 불충분한 법안이 밀려 통과되기도 한다. 따라서 사후 통제도 필요하다. 사법 단계의 통제를 보자.
만약 법이 이미 제정되어 시행 중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헌법재판소와 대법원이 개입하여 교정할 수 있다. 독일과 프랑스의 경험이 참고가 된다.
(1) 독일 연방헌법재판소는 명확성 심사를 엄격히 한다. 법률이 불명확하면 위헌으로 무효화한다. 특히 형법 영역에서 엄격하다. 기본법 제103조 제2항은 "어떠한 행위도 그 행위 이전에 법률로 처벌 가능성이 규정되어 있지 않으면 처벌될 수 없다"는 죄형법정주의를 명시한다. 재판소는 이를 근거로 불명확한 형법 조항들을 위헌으로 판단했다.
2008년 BVerfGE 120, 224 결정(Online-Durchsuchung)이 좋은 예다. 경찰이 용의자의 컴퓨터에 원격으로 접속하여 자료를 열람할 수 있도록 한 법률이 문제되었다. 법률은 "중대한 위험이 있을 때" 허용한다고 규정했다. 재판소는 "중대한 위험"이 불명확하다고 봤다. "어느 정도가 중대한가? 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에서 허용되는가? 법률이 기준을 제시하지 않아 경찰의 자의적 판단에 맡겨진다"며 위헌으로 판단했다.
이에 따라 재판소는 입법자에게 구체화를 명령했다. "위험의 종류, 정도, 긴급성을 고려한 구체적 요건을 법률에 규정하라. 그리고 법관의 영장을 받도록 하여 사법 통제를 확보하라." 입법자는 법을 개정하여 "생명, 신체, 자유에 대한 구체적 위험", "범죄 혐의를 뒷받침하는 사실적 근거", "다른 수단으로는 수사가 불가능한 경우"라는 요건을 추가했다. 이렇게 재판소가 입법자에게 구체화를 강제하는 것이다.
한국 헌법재판소도 명확성 심사를 하지만, 독일만큼 엄격하지는 않다. 헌법재판소는 "법률이 최소한의 명확성을 갖추면 충분하다"고 본다. "법관의 보충적 가치판단을 통해 의미내용을 확인할 수 있으면 된다"는 입장이다(헌재 2005헌바45). 이 기준은 상당히 느슨하다. "법관이 해석하면 알 수 있다"는 것은 결국 일반조항을 허용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더 큰 문제는 헌법재판소가 "확립된 판례가 있으면 명확하다"고 보는 경향이다. 일반조항이라도 대법원 판례가 쌓여서 해석이 어느 정도 정리되면, 그것으로 명확성이 충족된다는 것이다. 헌재 2020헌바552 결정(민법 제103조 공서양속)이 전형적이다. 재판소는 "공서양속은 추상적이지만, 오랜 판례로 의미가 구체화되었으므로 명확하다"고 봤다.
그러나 이 논리는 문제가 있다. 판례로 명확해졌다는 것은 입법자가 아니라 법원이 실질적 내용을 형성했다는 뜻이다. 입법자의 도피를 사후적으로 정당화하는 것이다. "입법자가 애매하게 만들었지만 법원이 해석해서 명확해졌으니 괜찮다"는 논리는 헤데만이 비판한 구조를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다.
생각건대 독일 재판소의 접근이 더 타당하다. 판례로 구체화되었다는 사실은 명확성 판단에서 고려 요소일 수는 있지만, 결정적이지 않다. 오히려 "판례로 구체화될 정도라면, 입법자가 처음부터 법률에 그 내용을 명시할 수 있었다"고 봐야 한다. 재판소는 "입법자는 이 정도 구체성으로 법률을 만들 수 있고 또 만들어야 한다. 판례에만 맡기지 말라"고 경고해야 한다.
(3) 한국 헌법재판소가 명확성 심사를 강화하려면 몇 가지 변화가 필요하다.
첫째, "최소한의 명확성"이라는 기준을 높여야 한다. 현재는 너무 낮다. "법관이 해석하면 된다"는 기준은 거의 모든 일반조항을 통과시킨다. "일반 시민이 법률 전문가의 조력 없이도 대략 예측할 수 있는 수준"으로 기준을 올려야 한다.
둘째, 기본권 제한의 강도에 따라 명확성 요구를 차등화해야 한다. 형법처럼 자유를 직접 박탈하는 법률은 가장 엄격하게 심사한다. 행정 규제는 중간 수준으로 심사한다. 민사법은 상대적으로 느슨하게 심사한다. 현재는 이런 차등이 약하다. 모든 법 영역에 비슷한 기준을 적용한다. 이를 체계화해야 한다.
셋째, "확립된 판례" 논리를 재검토해야 한다. 판례가 있다는 것만으로 위헌을 면할 수 없다. 재판소는 "판례로 구체화되었으나, 그 내용을 입법자가 법률에 명시하지 않은 것은 입법 책임 회피다. 입법자는 판례의 내용을 법률로 제정하라"고 명령해야 한다. 이것이 입법 촉구 결정이다.
입법촉구 결정은 독일에서 자주 사용된다. 재판소가 법률을 당장 위헌 무효로 하지는 않지만, "이 법률은 불명확성 때문에 문제가 있다. 입법자는 특정 기한 내에 개정하라. 개정하지 않으면 위헌으로 무효화하겠다"고 경고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법적 공백을 피하면서도 입법자에게 압력을 가할 수 있다.
한국 헌법재판소도 이런 방식을 더 적극 활용해야 한다. 낙태죄에서 했던 것처럼, 헌법불합치 결정과 함께 개정 기한을 명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기한을 지키지 않으면 실제로 위헌 무효로 만들어야 한다. 현재는 기한을 넘겨도 재판소가 추가 조치를 취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것이 국회의 나태를 조장한다.
대법원도 역할이 있다. 대법원은 법률 해석 과정에서 명확성 문제를 지적할 수 있다. 판결문에 "이 조항은 불명확하여 해석상 논란이 크다. 입법자의 개정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명시하는 것이다. 이것이 공식적으로 기록되면 국회에 대한 압력이 된다.
실제로 대법원이 2023다35588 전원합의체 판결(취업규칙 불이익 변경)에서 일부 대법관들은 이런 취지의 의견을 냈다. "근로기준법이 불이익 변경의 합리성 기준을 제시하지 않아 법원이 신의칙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 이는 법적 불확실성을 낳는다. 입법자가 구체적 기준을 법률에 명시해야 한다." 이런 지적이 쌓이면 여론이 형성되고, 국회가 움직이게 된다.
사법 단계의 통제는 교정적이다. 이미 만들어진 법의 문제를 고치는 것이다. 그러나 사법부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재판소와 법원은 사건이 제기되어야 판단할 수 있다. 자발적으로 모든 법률을 검토할 수는 없다. 따라서 입법자가 스스로 책임지게 만드는 메커니즘도 필요하다. 사후 책임 단계의 통제를 보자.
입법자가 도피한 결과 문제가 발생했을 때, 누가 그 비용을 부담하는가? 현재 한국에서는 주로 국민이 부담한다. 불명확한 법 때문에 불이익을 받아도, 입법자에게 책임을 물을 방법이 거의 없다. 이를 바꿔야 한다.
(1) 가장 혁신적인 제안은 입법부작위에 대한 국가배상 청구를 허용하는 것이다. 독일은 이미 이를 인정한다. 입법자가 헌법상 입법 의무를 위반하여 국민에게 손해를 입히면, 국가가 배상 책임을 진다. 연방헌법재판소가 위헌 결정을 내렸는데도 입법자가 개정하지 않으면, 그로 인한 손해를 국가가 배상해야 한다.
구체적 사례를 보자. 독일에서 한 여성이 출산 휴가 급여를 청구했는데 법적 근거가 불충분하여 적절한 금액을 받지 못했다. 나중에 연방헌법재판소가 관련 법률을 위헌으로 판단하고 입법자에게 개정을 명령했다. 입법자는 2년 후에야 법을 개정했다. 그 여성은 그 2년 동안의 손해를 국가배상으로 청구했고, 법원은 이를 인정했다.
"입법자가 재판소의 명령을 2년이나 지체한 것은 헌법상 의무 위반이다. 그 기간 동안 여성이 입은 손해는 국가가 배상해야 한다."
이 메커니즘이 주는 효과는 강력하다. 입법자는 재판소의 개정 명령을 무시하면 국가가 배상 책임을 지게 된다는 것을 안다. 국가 재정에서 배상금이 나가면, 결국 다음 예산 심의에서 문제가 된다. 국회의원들은 "우리가 법을 제때 만들지 않아서 국고에서 배상금이 나갔다"는 비난을 받는다. 이것이 정치적 압력이 된다.
한국에도 이를 도입할 수 있다. 헌법재판소가 입법 촉구 결정을 내렸는데 국회가 기한 내에 개정하지 않으면, 그로 인해 손해를 입은 국민이 국가배상을 청구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낙태죄가 좋은 예다. 헌법재판소가 2020년 말까지 개정하라고 했는데 국회가 2023년까지 방치했다. 그 기간 동안 법적 불확실성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의사나 여성들이 국가배상을 청구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배상 요건을 지나치게 넓히면 국가 재정에 부담이 된다. 따라서 엄격한 요건을 설정해야 한다.
첫째, 헌법재판소의 명시적 입법 명령이 있어야 한다. 단순히 "법이 불명확하다"는 이유만으로는 부족하고, 재판소가 "입법자는 특정 기한까지 개정하라"고 명령한 경우만 해당한다.
둘째, 기한을 상당 기간 넘겨야 한다. 몇 개월 지체는 용인하되, 1년 이상 방치하면 책임을 진다.
셋째, 실제 손해가 있어야 한다. 추상적 불편이 아니라 구체적 경제적·인격적 손해를 입증해야 한다.
이 요건들을 충족하면 배상 책구를 허용한다. 그리고 배상금은 일반 회계가 아니라 국회 예산에서 나가게 한다. 국회가 입법 책임을 방기한 대가를 국회가 직접 부담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국회의원들이 뼈저리게 느낀다. 다음 예산 심의에서 "작년에 입법부작위 배상금으로 XX억 원이 나갔습니다"라는 보고를 받으면, 국회는 더 이상 입법을 미룰 수 없게 된다.
(2) 또 다른 메커니즘은 국회의원 개인의 정치적 책임이다. 스웨덴처럼 입법 품질 선언을 공개하면, 나중에 문제가 생겼을 때 "누가 이 법안을 발의했는가", "당시 어떤 선언을 했는가"를 시민들이 확인할 수 있다. 다음 선거에서 "당신이 만든 법이 너무 애매해서 소송이 많다", "당신의 입법 품질이 낮다"는 비판이 가능하다.
이를 제도화하려면 국회가 "입법 품질 보고서"를 주기적으로 발표해야 한다. 매년 또는 매 회기마다 통과된 법률들을 평가하여 보고하는 것이다. "이번 회기에 제정된 50개 법률 중 20개에 일반조항이 포함되었고, 그 중 5개는 정당화가 불충분했다"는 식으로 통계를 내는 것이다. 그리고 법안별로 발의자와 심사 과정을 기록한다.
이 보고서를 국회 홈페이지에 공개하고, 언론에 배포한다. 시민단체들이 이를 분석하여 "입법 품질 평가"를 내놓는다. "이번 국회는 입법 품질이 낮다", "특정 의원은 애매한 법안을 많이 발의한다"는 평가가 나오면, 국회의원들은 정치적 압력을 느낀다. 다음 선거에서 불리해지기 때문이다.
(3) 또한 법학자들이 참여하는 "입법 품질 위원회"를 국회 외부에 설치할 수 있다. 이 위원회는 국회가 통과시킨 법률들을 사후 평가한다. 명확성, 일관성, 실효성을 기준으로 점수를 매기고 보고서를 발표한다. 이것이 국회에 대한 외부 감시 역할을 한다. 국회는 이 평가를 무시할 수 없다. 언론이 보도하고 여론이 형성되기 때문이다.
프랑스는 이와 유사한 제도로 "국사원"(Conseil d'État)을 활용한다. 국사원은 정부가 법안을 제출하기 전에 사전 자문을 한다. 법안의 합헌성, 명확성, 일관성을 검토하여 의견을 낸다. 이 의견은 구속력이 없지만, 정치적으로 무게가 크다. 국사원이 "이 법안은 불명확하다"고 지적하면, 정부는 수정하지 않고는 국회에 제출하기 어렵다.
한국에도 이런 기관을 만들 수 있다. "입법자문위원회"를 헌법재판소나 대법원에 설치하는 것이다. 국회가 법안을 심사할 때 이 위원회에 자문을 요청하면, 위원회가 법적 검토 의견을 낸다. 특히 명확성과 일관성을 중점적으로 본다. 이 의견은 법적 구속력이 없지만, 국회가 무시하기는 어렵다. 법률 전문가들의 공식 의견이기 때문이다.
사후 책임 메커니즘의 핵심은 입법자가 도피의 대가를 치르게 만드는 것이다. 현재는 입법자가 애매한 법을 만들어도 아무 불이익이 없다. 오히려 정치적으로 편하다. 논쟁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구조를 바꿔야 한다. 애매한 법을 만들면 국가배상 책임, 정치적 비난, 전문가 평가 등으로 불이익을 받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야 입법자가 처음부터 명확한 법을 만들려고 노력한다.
지금까지 제도적 메커니즘을 논의했지만, 가장 강력한 통제는 결국 시민의 감시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궁극적 권력은 국민에게 있다. 국민이 입법 품질에 관심을 가지고, 문제 있는 법률을 비판하며, 선거에서 책임을 물으면, 국회는 변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일반 시민이 법률의 명확성을 판단하기는 어렵다. 법률은 전문적이고 복잡하다. 시민들은 자기 일상에 바쁘다. 입법 과정을 일일이 모니터링할 시간과 능력이 없다. 따라서 시민의 감시를 가능하게 하는 도구가 필요하다.
첫째, 정보 접근성을 높여야 한다. 현재 국회는 법안과 회의록을 인터넷에 공개한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법안 원문은 전문 용어로 가득하여 일반인이 이해하기 어렵다. "평이한 언어로 된 요약본"을 함께 제공해야 한다.
영국 국회는 모든 법안에 "설명 노트"(Explanatory Notes)를 첨부한다. 이것은 법안의 내용을 쉬운 말로 풀어쓴 문서다. "이 법안은 무엇을 하는가", "누구에게 영향을 미치는가", "어떤 변화가 생기는가"를 일반인이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한다. 또한 "왜 이 법안이 필요한가", "다른 방법은 없었는가"도 적는다. 시민들은 이 설명 노트를 보고 법안을 판단할 수 있다.
한국 국회도 이를 도입해야 한다. 법안 제출 시 "시민용 요약본"을 의무 첨부하는 것이다. A4 용지 2-3장 정도로, 중학생도 이해할 수 있는 수준으로 쓴다. 전문 용어를 피하고, 구체적 예시를 든다. "예를 들어 김씨가 이런 상황이라면 이 법에 의해 어떻게 되는가"를 설명한다.
그리고 이 요약본에 명확성 평가를 포함한다. "이 법안의 제XX조는 '신의성실'이라는 일반조항을 사용합니다. 이것이 필요한 이유는 OOO이며, 구체적으로는 XXX와 같은 경우를 의미합니다"라고 적는다. 시민들은 이를 보고 "정말 그런가", "다른 해석도 가능하지 않은가"를 판단할 수 있다.
둘째, 시민 참여 플랫폼을 강화해야 한다. 현재 국회는 "국회입법예고"를 통해 시민 의견을 받는다. 그러나 이것이 형식적인 경우가 많다. 의견을 제출해도 실제 법안에 반영되는 경우가 적다. 또한 플랫폼이 사용하기 불편하여 참여가 저조하다.
대만의 vTaiwan 플랫폼이 좋은 모델이다. 이것은 온라인 시민 참여 플랫폼으로, 정부가 법안을 내기 전에 시민들과 토론한다. 누구나 의견을 내고, 다른 사람 의견에 찬반을 표시할 수 있다. AI가 의견들을 분석하여 쟁점을 정리한다. 정부는 이를 보고 시민들의 주요 우려가 무엇인지 파악한다. 그리고 그것을 반영하여 법안을 수정한다.
한국도 이런 플랫폼을 만들 수 있다. "국회입법플랫폼"을 현대화하여 쌍방향 소통이 가능하게 한다. 시민이 의견을 내면 담당 의원이나 전문위원이 답변한다. "이 의견은 타당하므로 법안에 반영하겠습니다" 또는 "이 의견은 XX한 이유로 반영하기 어렵습니다"라고 피드백을 준다. 이렇게 하면 시민들이 "내 의견이 실제로 검토되었다"고 느낄수 있으며, 참여 동기가 높아질 수 있다.
또한 명확성에 관한 의견을 특별히 취급한다. 플랫폼에 "명확성 문제 제기" 카테고리를 만든다. 시민이 "이 조항이 불명확하다"고 지적하면, 법제사법위원회가 우선적으로 검토한다. 일정 수 이상의 시민이 같은 문제를 제기하면, 자동으로 법안이 수정 절차로 들어간다.
셋째, 시민단체와 법률 전문가의 역할을 지원해야 한다. 개별 시민이 모든 법안을 모니터링하기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전문적으로 입법을 감시하는 시민단체들이 중요하다. 한국에는 이미 참여연대,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같은 단체들이 입법 감시 활동을 한다.
이들의 활동을 지원하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 예를 들어 "입법 품질 감시 보조금"을 국가나 국회가 제공할 수 있다. 시민단체가 법안을 분석하여 보고서를 내면, 일정 기준을 충족할 경우 보조금을 지급한다. 이것이 시민단체의 전문성을 높이고 지속 가능성을 확보한다.
또한 법학전문대학원 학생들이나 로스쿨 졸업생들을 활용할 수 있다. "입법 인턴" 프로그램을 만들어, 법학도들이 시민단체나 국회에서 입법 감시 활동을 경험하게 한다. 이것이 교육적으로도 의미가 있고, 인력 면에서도 시민단체를 지원한다.
넷째, 언론의 역할이 중요하다. 언론이 입법 과정을 취재하고 보도해야 시민들이 알 수 있다. 그러나 현재 한국 언론은 법안 통과 결과는 보도하지만, 법안의 내용이나 문제점은 깊이 다루지 않는 경우가 많다. 특히 명확성 문제는 기술적이라 보도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언론이 입법 품질을 보도하도록 유도하려면, "입법 품질 지표"를 개발하여 정기적으로 발표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예를 들어 법학자 그룹이나 시민단체가 분기마다 "이번 분기 입법 품질 평가"를 내놓는다. "이번 분기에 통과된 30개 법률 중 10개가 명확성 기준 미달", "XX 의원이 발의한 법안들은 평균 명확성 점수가 낮다" 같은 평가를 한다.
이런 평가가 나오면 언론이 보도한다. "입법 품질이 떨어진다"는 것은 뉴스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국회의원 개인의 입법 품질을 평가하면, 해당 의원이 해명을 내놓는다. 이것이 또 뉴스가 된다. 이렇게 선순환이 만들어진다.
다섯째, 선거에서 입법 품질을 쟁점화해야 한다. 궁극적으로 민주주의는 선거를 통해 작동한다. 유권자들이 "이 후보는 명확한 법을 만드는가, 애매한 법을 만드는가"를 따져서 투표하면, 정치인들은 행동을 바꾼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유권자들은 입법 품질보다 정책 방향을 더 중시한다.
그럼에도 입법 품질을 선거 쟁점으로 만들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시민단체들이 선거 때마다 "입법 품질 후보 평가"를 발표하는 것이다. 현역 의원 후보들의 과거 입법 활동을 분석하여 점수를 매긴다. "이 후보는 재임 중 20개 법안을 발의했는데, 그 중 8개가 명확성 문제가 있었다. 입법 품질 점수 60점"이라는 식으로 평가한다.
이 평가를 유권자들이 쉽게 볼 수 있게 배포한다. 투표소 앞에서 유인물로 나눠주거나, 인터넷에 올려서 검색 가능하게 한다. 유권자들이 "이 후보의 입법 품질은 어떤가"를 확인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영향이 작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유권자들의 인식이 바뀐다. "법을 명확하게 만드는 것도 능력이다"라는 인식이 퍼진다.
시민 차원의 감시는 느리지만 근본적이다. 제도는 시민의 요구가 있어야 만들어지고 작동한다. 시민들이 입법 품질에 무관심하면, 어떤 제도를 만들어도 형식에 그친다. 반대로 시민들이 관심을 가지고 요구하면, 정치인들은 반응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장기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시민의 법 문해력(legal literacy)을 높이는 것이다.
다른 나라들은 입법자의 도피 문제를 어떻게 다루는가? 독일 외에 프랑스와 스웨덴의 경험이 참고할 만하다.
(1) 프랑스는 "명확성과 접근가능성 원칙"(principe de clarté et d'accessibilité)을 헌법적 원칙으로 확립했다. 헌법위원회(Conseil constitutionnel)는 2006년 결정(n° 2006-540 DC)에서 이를 명시했다.
"법률의 명확성과 접근가능성은 1789년 인권선언 제4조, 제5조, 제6조에서 도출되는 헌법적 요청이다. 시민은 자신에게 적용되는 법률이 무엇인지 알 수 있어야 하고,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원칙은 두 가지 요소를 포함한다. 첫째는 "명확성"(clarté)이다. 법률의 문언이 명확해야 한다. 애매하거나 모순되어서는 안 된다. 둘째는 "접근가능성"(accessibilité)이다. 시민이 법률을 찾아볼 수 있어야 한다. 법률이 여러 곳에 흩어져 있거나, 지나치게 복잡하여 전문가도 이해하기 어려우면 안 된다.
특히 접근가능성 개념이 흥미롭다. 프랑스 헌법위원회는 법률이 명확하다고 해서 끝이 아니라, 시민이 실제로 그 법률을 찾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본다. 예를 들어 하나의 제도를 규율하는 법률이 기본법, 수정법, 시행령, 훈령, 판례에 흩어져 있으면, 아무리 각각이 명확해도 전체를 파악하기 어렵다. 이것도 접근가능성 위반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프랑스는 "법전화"(codification)를 적극 추진한다. 같은 분야의 법률들을 하나의 법전으로 통합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프랑스 노동법전(Code du travail)은 노동 관련 모든 법률을 하나로 모은 것이다. 시민이나 기업이 노동 문제로 법을 찾을 때, 이 법전 하나만 보면 된다. 여러 개별 법률을 찾아다닐 필요가 없다.
한국도 법전화를 고려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현재 노동 관련 법률은 근로기준법, 노동조합법, 산업안전보건법, 고용보험법 등 수십 개로 흩어져 있다. 이를 "노동법전"으로 통합하면 접근가능성이 높아진다. 물론 통합 작업이 방대하고 시간이 걸린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법적 명확성에 기여한다.
(2) 프랑스의 또 다른 특징은 국사원(Conseil d'État)의 역할이다. 앞서 언급했듯, 국사원은 정부 법안에 대해 사전 자문을 한다. 그런데 국사원의 자문 의견은 매우 상세하다. 법안의 합헌성뿐 아니라 명확성, 일관성, 실효성까지 검토한다. 특히 "이 조항은 다른 법률의 XX조와 모순된다", "이 용어는 YY법에서는 다른 의미로 쓰인다"는 식으로 구체적 문제점을 지적한다.
정부는 국사원의 의견을 무시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대부분 반영한다. 국사원의 의견이 나중에 공개되기 때문이다. 만약 국사원이 지적한 문제를 무시하고 법안을 밀어붙였다가 나중에 문제가 생기면, "국사원이 미리 경고했는데 정부가 무시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정치적으로 부담스럽다. 따라서 국사원의 자문이 사실상 구속력을 갖는다.
물론 한국에도 법제처가 있고 정부 법안을 심사한다. 그러나 법제처의 심사는 주로 형식적이다. 조문의 표현, 다른 법률과의 충돌 여부 정도를 본다. 실질적으로 "이 법안이 충분히 명확한가", "국민이 예측할 수 있는가"를 깊이 검토하지는 않는다. 법제처의 역할을 강화하여 프랑스 국사원처럼 실질적 검토를 하게 할 수 있다.
(3) 스웨덴은 다른 방식으로 접근한다. 스웨덴은 입법 과정 자체를 매우 신중하게 진행한다. 정부가 법안을 내기 전에 "위원회조사"(Kommitté)를 한다. 전문가, 이해관계자, 시민 대표로 구성된 위원회가 1-2년 동안 문제를 연구한다. 외국 사례를 조사하고, 여러 대안을 검토하며, 장단점을 분석한다. 그리고 수백 페이지 분량의 보고서를 낸다.
이 보고서가 공개되면 몇 개월 동안 공청회와 토론이 이어진다. 시민들, 전문가들, 이해관계자들이 의견을 낸다. 정부는 이를 모두 검토한 후에야 법안을 작성한다. 따라서 법안이 국회에 제출될 때는 이미 상당히 정제되어 있다. 주요 쟁점은 위원회 단계에서 다 논의되었고, 국회는 최종 확정만 한다.
이 과정이 시간은 걸리지만 장점이 많다. 첫째, 법안의 품질이 높다. 충분한 연구와 토론을 거쳤기 때문에 허점이 적다. 둘째, 정치적 합의가 쉽다. 주요 이해관계자들이 이미 위원회에 참여했으므로, 극심한 반대가 적다. 셋째, 법적 안정성이 높다. 잘 만든 법은 자주 개정할 필요가 없고, 해석상 논란도 적다.
한국도 중요한 법안에 대해 이런 방식을 도입할 수 있다. 현재는 정부나 국회의원이 법안을 급하게 만들어 제출하는 경우가 많다. 충분한 연구나 토론 없이 정치적 일정에 쫓겨 만든다. 그래서 문제가 많다. 낙태죄, 차별금지법, 안락사법 같은 중요하고 논쟁적인 입법은 스웨덴식으로 특별위원회를 구성하여 1-2년 연구하게 하는 것이다.
(4) 덴마크와 핀란드도 유사한 접근을 한다. 북유럽 국가들은 "합의 민주주의" 전통이 강하다. 법률을 만들 때 여야가 대립하기보다는 합의를 추구한다. 이를 위해 시간을 충분히 들인다. 급하게 밀어붙이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법의 품질이 높고, 정치적 갈등도 적다.
물론 북유럽 모델이 한국에 그대로 적용되기는 어렵다. 한국의 정치 문화는 대립적이고, 입법 일정은 빠듯하다. 그러나 최소한 핵심적인 중요 입법에서는 북유럽 방식을 참고할 수 있다. 정부나 국회가 "이 문제는 시간을 들여 제대로 연구하겠다"고 선언하고, 특별위원회를 만들어 1-2년 동안 철저히 준비하는 것이다. 그렇게 만든 법은 품질이 높아서 자주 고칠 필요가 없다. 장기적으로는 시간과 비용을 절약한다.
(5) 비교법적 교훈을 종합하면 몇 가지 공통점이 보인다. 첫째, 명확성을 헌법적 원칙으로 확립해야 한다. 독일처럼 본질성 이론, 프랑스처럼 명확성·접근가능성 원칙을 헌법재판소가 적극 적용해야 한다. 둘째, 입법 과정에서 사전 검토를 강화해야 한다. 프랑스 국사원, 스웨덴 위원회처럼 법안 제출 전에 철저히 검토하는 메커니즘이 필요하다. 셋째, 법전화 같은 방법으로 법률의 접근가능성을 높여야 한다. 넷째, 충분한 시간을 들여 합의를 만들어야 한다.
급하게 만든 법은 문제가 많다. 이제 이런 비교법적 교훈을 한국 맥락에 맞게 적용하는 구체적 로드맵을 제시해보자.
이론적 원칙들을 현실에 적용하려면 단계적 접근이 필요하다. 한꺼번에 모든 것을 바꿀 수는 없다. 정치적 저항, 예산 제약, 제도적 관성을 고려하여 실현 가능한 순서를 정해야 한다. 다음은 3단계 로드맵이다.
(1)첫 단계는 문제 인식을 확산시키고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다. 가장 먼저 할 일은 입법자의 도피 문제를 공론화하는 것이다. 법학계, 시민단체, 언론이 협력하여 이 문제를 사회적 의제로 만든다.
(2)구체적으로, 법학회들이 공동으로 "입법 품질 개선 심포지엄"을 개최한다. 헤데만의 이론을 소개하고, 한국 사례를 분석하며, 개선 방안을 논의한다. 이 심포지엄에 국회의원들과 정부 관계자들을 초청하여 함께 논의한다. 학술 행사이므로 정치적 부담이 적다. 여야가 함께 참여할 수 있다.
(3)동시에 시민단체들이 "입법 품질 감시 캠페인"을 시작한다. 최근 통과된 법률들을 분석하여 명확성 문제가 있는 조항들을 공개한다. "이번 분기에 통과된 법률 30개 중 12개에 심각한 명확성 문제가 있다"는 보고서를 내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어떤 조항이 어떻게 불명확한지 설명한다. 언론이 이를 보도하면 여론이 형성된다.
(4)법학전문대학원들이 "입법 클리닉"을 개설하는 것도 좋다. 학생들이 국회 법안을 검토하여 명확성 평가 보고서를 작성하는 실습을 하는 것이다. 이것이 교육적으로 의미 있고, 실제로 법안 검토에도 도움이 된다. 학생들의 보고서를 국회에 제출하면 참고 자료가 된다.
(5)제도적으로는 국회에 "입법 품질 향상 태스크포스"를 만든다. 여야 의원들과 전문가들이 참여하여 입법 과정 개선 방안을 연구한다. 1년 동안 외국 사례를 조사하고, 한국 실정에 맞는 제도를 설계한다. 그리고 국회법 개정안을 만든다.
(6)헌법재판소도 내부적으로 명확성 심사 기준을 재검토한다. 독일과 프랑스 사례를 연구하여, 한국에서 어떻게 적용할지 논의한다. 재판관 연구회나 헌법재판연구원이 이를 수행한다. 그리고 내부 지침을 만든다. "앞으로 명확성 심사를 이렇게 강화하겠다"는 방침을 정하는 것이다.
이 단계는 극적인 변화가 없다. 그러나 매우 중요하다. 문제 인식이 확산되고, 개선 방향에 대한 합의가 만들어지며, 제도 설계가 준비된다. 토대가 튼튼해야 다음 단계가 성공한다.
(1)두 번째 단계는 1단계에서 설계한 제도들을 실제로 도입하는 것이다. 국회법을 개정하여 명확성 심사를 제도화한다. 구체적 내용은 앞서 논의한 것들이다. 법안 발의 시 "입법 품질 선언서" 첨부 의무화, 법제사법위원회의 명확성 심사 강화, 일반조항 사용 정당화 요구 등이다.
(2)이 개정안은 여야 합의로 통과시킨다. 입법 품질 향상은 정파적 이해관계를 넘어선 문제다. 여당도 야당도 명확한 법을 만드는 것이 유리하다. 따라서 합의가 가능하다. 국회의장이 주도하여 여야 원내대표가 합의하는 방식으로 추진한다.
(3)처음에는 시범적으로 운영한다. 모든 법안에 즉시 적용하면 혼란이 생길 수 있다. 따라서 중요 법안에 먼저 적용한다. 예를 들어 "정부 제출 법안 중 기본권 제한과 관련된 법안"에 우선 적용한다. 의원 발의 법안은 아직 예외로 둔다. 1년간 시범 운영하면서 문제점을 파악하고 보완한다.
(4)헌법재판소는 명확성 심사를 단계적으로 강화한다. 먼저 형법 영역에서 엄격하게 적용한다. 형법은 자유를 직접 박탈하므로 가장 명확해야 한다. 재판소가 불명확한 형법 조항에 대해 위헌 결정을 몇 건 내면, 입법자는 경각심을 갖는다. "이제 헌법재판소가 명확성을 엄격히 본다"는 메시지가 전달된다.
(5)그 다음 행정 규제 영역으로 확대한다. 영업 제한, 재산권 제한 등의 법률에 대해 명확성을 까다롭게 심사한다. 민사법 영역은 상대적으로 느슨하게 유지한다. 이렇게 단계적으로 기준을 높여간다.
(6)시민 참여 플랫폼도 이 단계에서 구축한다. 기존 국회 홈페이지를 개편하여 시민들이 쉽게 의견을 내고, 피드백을 받을 수 있게 만든다. 대만 vTaiwan 같은 선진 사례를 참고한다. 처음에는 일부 법안에 대해 시범 운영하고, 점차 확대한다.
(7)법제처는 정부 법안에 대한 검토를 강화한다. 프랑스 국사원을 모델로, 명확성을 실질적으로 심사한다. 법제처가 "이 법안은 명확성이 부족하다"고 의견을 내면, 소관 부처가 수정해야 한다. 법제처의 권한을 강화하는 법령 개정을 추진한다.
이 단계에서 예상되는 저항도 있다. 국회의원들은 "입법 절차가 복잡해지고 시간이 걸린다"고 불평할 수 있다. 정부 부처들은 "법제처가 지나치게 간섭한다"고 반발할 수 있다. 이런 저항을 관리하는 것이 중요하다. 여론의 지지를 받으면 저항을 극복할 수 있다. 시민단체와 언론이 "입법 품질 향상은 필요하다"고 지지하면, 정치인들은 반대하기 어렵다.
(1)세 번째 단계는 제도가 안정적으로 정착되고 확대되는 단계다. 2단계에서 시범 운영한 제도들을 전면 시행한다. 모든 법안에 명확성 심사가 적용된다. 정부 법안뿐 아니라 의원 발의 법안도 포함한다.
(2)헌법재판소의 엄격한 명확성 심사가 판례로 확립된다. 몇 년간 축적된 결정들이 명확한 기준을 제시한다. "이 정도 수준의 일반조항은 허용되지 않는다", "이런 경우는 입법자가 직접 결정해야 한다"는 기준선이 만들어진다. 입법자는 이 기준을 예측하여 처음부터 법안을 잘 만든다.
(3)사후 책임 메커니즘도 이 단계에서 도입한다. 국가배상법을 개정하여 "입법 부작위로 인한 손해도 배상 대상"임을 명시한다. 헌법재판소가 입법 명령을 내렸는데 국회가 상당 기간 방치하면, 피해자가 국가배상을 청구할 수 있게 한다. 처음에는 요건을 엄격히 하여 남용을 막고, 점차 확대한다.
(4)"입법 품질 위원회"를 국회 외부에 설치한다. 법학자, 시민단체, 전문가로 구성하여 독립적으로 법률을 평가한다. 위원회는 매년 "입법 품질 보고서"를 발표하여 국회의 성과를 평가한다. 이것이 국회에 대한 지속적 압력이 된다.
(5)시민 참여가 일상화된다. 중요 법안이 나오면 자동으로 온라인 토론이 시작되고, 수천 명의 시민이 의견을 낸다. 국회는 이를 무시할 수 없다. 의원들은 "시민 의견을 얼마나 반영했는가"로 평가받는다. 입법 과정이 투명해지고 참여가 활성화된다.
(6)언론도 입법 품질을 정기적으로 보도한다. "이번 국회의 입법 품질은 지난 국회보다 향상되었다" 또는 "여전히 문제가 많다"는 평가 기사가 나온다. 선거 때는 후보자들의 입법 품질이 쟁점이 된다. "이 후보는 명확한 법을 만든다" 또는 "저 후보는 애매한 법을 많이 만들었다"는 비교가 나온다.
(7)결과적으로 입법 문화가 변한다. 국회의원들은 "법을 명확하게 만드는 것"을 자기 능력의 지표로 생각하게 된다. "내가 만든 법은 소송이 적다", "내가 만든 법은 시민들이 이해하기 쉽다"는 것을 자랑한다. 애매한 법을 만드는 것은 능력 부족의 증거로 여겨진다.
이 단계까지 오는 데 5-7년 정도 걸릴 것이다. 짧지 않은 시간이다. 그러나 이것이 현실적 일정이다. 제도와 문화는 하루아침에 바뀌지 않는다. 그러나 한 번 바뀌면 지속된다. 독일이 Kalkar 결정 이후 40년 넘게 본질성 이론을 유지하듯, 한국도 한 번 입법 품질 체계를 확립하면 장기적으로 유지될 수 있다.
물론 이 로드맵이 순탄하게 진행된다고 보장할 수 없다. 정치적 변동, 경제 위기, 사회 갈등 같은 변수들이 계획을 방해할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방향을 설정하고 꾸준히 나아가는 것이다. 한 걸음씩 진전하다 보면, 결국 목표에 도달한다.
그리고 이것은 단순히 기술적 개선이 아니다. 민주주의의 질을 높이는 것이다. 입법자가 책임을 지고 명확한 법을 만들면, 시민은 법을 예측할 수 있다. 법원은 자의적 해석을 할 수 없다. 행정부는 재량을 남용할 수 없다. 권력이 분산되고 견제되며, 법의 지배가 실현된다. 이것이 헤데만이 90년 전 꿈꾼 것이고, 우리가 21세기에 실현해야 할 것이다.
1933년 헤데만이 "일반조항으로의 도피"를 경고했을 때, 그는 바이마르 공화국 말기의 혼란을 목격하고 있었다. 정치는 분열되었고, 국회는 결정을 내리지 못했으며, 입법자는 어려운 문제를 법원에 떠넘겼다. 불과 몇 년 후, 나치가 집권하여 그 일반조항들을 억압의 도구로 전용했다. 헤데만의 경고는 비극적으로 현실이 되었다.
90년이 지난 지금, 그의 경고는 여전히 유효하다. 2020년대 한국에서도 국회는 낙태, 차별금지, 안락사 같은 논쟁적 문제에서 구체적 기준 제시를 회피한다. "사회적 합의 필요", "시기상조"라는 말로 결정을 미룬다. 경제 규제, 노동법, 환경법에서도 "대통령령으로 정한다"는 포괄 위임이 남발된다. 입법자의 도피는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역사는 단순히 반복되지 않는다. 인류는 과거로부터 배운다. 나치 경험 후, 독일은 본질성 이론으로 입법자를 통제하는 제도를 만들었다. 프랑스는 명확성과 접근가능성을 헌법 원칙으로 확립했다. 북유럽 국가들은 신중한 입법 과정으로 법의 품질을 높였다. 한국도 이들의 경험에서 배울 수 있다.
이 글에서 제시한 방안들, 입법 단계의 명확성 검토, 사법 단계의 엄격한 심사, 사후 책임의 제도화, 시민 감시의 활성화는 모두 실현 가능하다. 정치적 의지와 시민의 요구가 있으면 된다. 독일, 프랑스, 스웨덴이 할 수 있었던 것을 한국이 못 할 이유가 없다.
근본적으로, 입법자의 도피 문제는 민주주의의 본질적 긴장을 드러낸다. 민주주의는 다양한 가치관과 이해관계를 가진 사람들이 함께 사는 체제다. 낙태, 차별금지, 안락사 같은 문제에서 합의를 만들기는 어렵다. 입장이 첨예하게 대립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입법자는 결정을 회피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입법자가 결정해야 한다. 민주적으로 선출된 대표만이 정치적 책임을 지면서 가치 선택을 할 수 있다. 법관이나 관료가 대신 결정하면, 민주적 정당성이 결여된다. 시민은 누구에게 책임을 물어야 할지 모른다. 이것이 헤데만의 통찰이었고, 여전히 유효한 원칙이다.
입법의 명확성과 유연성 사이의 긴장은 해소될 수 없다. 법은 구체적이어야 예측 가능하지만, 너무 구체적이면 경직된다. 일반조항은 유연성을 주지만, 너무 많으면 불확실해진다. 완벽한 균형점은 없다. 항상 이쪽과 저쪽 사이에서 조정해야 한다.
그러나 이 긴장은 관리할 수 있다. 입법자에게 명확성 의무를 부과하고, 사법부가 이를 감독하며, 시민이 감시하면, 긴장이 파괴적이 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독일이 40년 넘게 본질성 이론으로 이 긴장을 관리해왔듯이, 한국도 할 수 있다.
헤데만이 90년 전 남긴 유산은 경고이자 과제다. "일반조항으로의 도피"는 민주주의와 법치주의에 대한 위협이다. 그러나 이 위협은 제도와 문화로 극복할 수 있다. 입법자가 책임을 지고, 법원이 견제하며, 시민이 감시하는 체계를 만들면 된다. 그것이 법과 국가를 지키는 길이다.
법이 명확하지 않을 때, 누가 결정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분명하다. 입법자가 결정해야 한다. 그리고 입법자가 도피하면, 우리 모두가 대가를 치른다. 이제 우리는 이 진실을 알았다. 남은 것은 행동이다.
윤철홍, "헤데만의 '일반조항으로 도피'에 대한 수용적 고찰", 「법학논총」 제39권 제3호, 숭실대학교 법학연구소, 2019.
강우예, "대법원 판결에 나타난 '전체 법질서' 개념의 의미와 성격", 「법철학연구」 제27권 제2호, 한국법철학회, 2024.
독일 - 본질성 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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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rebs, Peter, "Die Bestimmtheit von Generalklauseln und der Grundsatz der Gewaltenteilung", AcP 211,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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