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고지기의 생각, 제2면
내담자 — 검은색, 흰색. 어떤 것이 옳은 것인지는 차치하더라도, 어떤 것이 옳지 않은 것인지는 구분할 수 있을까요?
상담자 — 극단에서는 가능하겠지요. 칠흑은 칠흑이고, 순백은 순백이니까. 그런데 선생님이 묻고 계신 건 극단이 아니라, 그 사이 어딘가 아닌가요.
내담자 — 그렇습니다. 문득, 양과 질, 관계, 양상… 칸트의 범주론이 떠올랐습니다. 오래전 수업시간에 스쳐 지나간 것인데, 왜 하필 오늘 떠오르는 건지.
상담자 — 혼돈에 격자를 씌우고 싶을 때, 범주는 자연스럽게 소환되는 것 같습니다. 무엇이 선생님을 그 혼돈 앞에 세운 건지, 여쭤봐도 될까요.
내담자 — 마치 팔레트 위의 물감처럼요. 검은색 물감을 짜내어 흰 종이를 수채화마냥 적시기 시작한다면, 언제부터 그것은 더 이상 검은색이 아니게 될까요. 되긴 할까요.
상담자 — 소리테스의 더미가 떠오릅니다. 모래알 하나를 빼도 여전히 더미이고, 또 하나를 빼도 여전히 더미인데, 어느 순간 더미가 아니게 된다. 그 "어느 순간"은 누구도 지목할 수 없지요.
내담자 — 네. 더미의 역설이 떠오르기도 하고, 다른 관점에서는 미끄러운 경사길의 오류가 생각나기도 합니다. 한편으로는 A설, B설, 그리고 절충설. 예전에 쓴 글이 있습니다. "종합판단이란 곧 원칙의 상실이다."
상담자 — A와 B 사이 어딘가에 선을 긋는 행위가, 결국 A도 B도 포기하는 행위가 되어버리는.
내담자 — 그런 역설이지요. 그런데 선생님, 저는 대체 무엇을 쓰고 싶은 걸까요. 이틀간 병상에 누워 있었습니다. 온갖 생각으로부터 벗어난 줄 알았는데, 책상에 다시 앉으니 상념이 또 차오릅니다.
상담자 — 비운 것이 아니라 가라앉았던 것은 아닐까요. 병상이 사유를 멈춘 것이 아니라, 오히려 숙성시킨 것일 수 있습니다.
내담자 — (……) 숙성이라는 관점은, 솔직히 조금 안도가 됩니다.
상담자 — 지금 선생님이 쓰고 싶은 것은 아마 결론이 아닐 겁니다. 경계가 불분명한 세계에서 그래도 무언가를 판별해야 하는 존재의 곤혹, 원칙이 녹아내리는 지점에서 그래도 원칙을 붙잡으려는 손의 감각. 떠도는 감각 그 자체가 아닐까요.
내담자 — 떠도는 감각 그 자체라. 어쩌면 그 말에서 방향이 조금 보이는 것 같습니다. 경계, 범주, 그 사이에서 떠도는 무언가. 문득, 에리히 프롬이 떠오릅니다.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기를 희망하는 대중들.
상담자 — 경계가 불분명한 곳에 서 있다는 것은 곧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그 비소속의 상태가 주는 무게를 프롬은 정확히 짚었지요. 자유란 무언가로부터의 해방인 동시에, 그 해방된 자리가 텅 비어 있다는 공포이기도 하니까요. 그래서 사람들은 스스로 판단하는 자유를 내려놓고, 이미 그어진 선 안으로 들어가려 합니다. 권위든, 집단이든, 확정된 범주든.
내담자 — (……)
상담자 — 그런데 선생님이 지금 하고 계신 것은 그 반대 방향 아닌가요. 검은색과 흰색 사이의 경계가 지목 불가능하다는 걸 알면서도, 그렇다고 아무 선이나 받아들이지도 않으면서, 그 불확정의 자리에 머물러 보려는 시도.
내담자 — 자유의 무게를 견딘다는 표현이 크게 와닿습니다. 그렇습니다. 견딘다는 것, 이성을 향유한다는 것이 얼마나 피곤하고 힘들고 고역스러운지. 그럼에도 저는 그걸 포기할 수 없습니다.
상담자 — (……)
내담자 — 이틀간의 병상생활은 조금이나마 책장으로부터 물리적 거리를 둘 수 있었습니다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시적일 뿐. 돌아와야 했습니다. 하기 싫다는 것은 아닙니다. 견디는 것도, 저는 참을 수 있습니다. 어쩌면 이틀의 부재가 그 다짐을 다시금 갖게 된 계기가 되었을지도 모르겠지요.
상담자 — 도피하지 않고 있다는 것, 그 자체가 이미 무게를 정직하게 느끼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다만 — 견디는 것과 혼자 짊어지는 것은 다른 일이기도 합니다.
내담자 — 네. 알겠습니다. 너무 힘들었습니다. 그래도 저는 하고 싶습니다. 이성을.
상담자 — (……)네.
검은 물감은 번진다. 흰 종이 위로 한없이 번져, 어느 지점에서 더 이상 검은색이라 부를 수 없게 된다. 그 지점을 누구도 지목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자리에 서서 눈을 감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자유의 무게를 견디는 사람들. 이성이라는 고역을, 그래도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
2026. 2.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