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접정범에 관한 대화- 김성돈의 간접정범론을 중심으로

생각의 서고 69화

by 소는영

1부 — 논문 내용에 관하여



갑:

간접정범에 관한 이야기를 선생님과 나누고 싶습니다. 특히 김성돈의 논문[간접정범에 관한 대법원 법리와 형법이론학의 과제, 형사법연구 제35권 제3호, 2023.]에서 언급한 대법원 2021. 2. 25. 선고 2020도17776 판결을 중심으로 나눠보고 싶네요.



을:

좋습니다. 아주 흥미로운 주제입니다. 논문에서 〔판결 8〕로 지칭된 이 사건은, 간접정범 법리에 관한 한국 사법사에서 사실상 전례가 없는 새로운 쟁점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서 각별한 의미를 지닙니다.


우선 사안구조를 정리해 보면, 핵심은 피이용자(A)의 고의가 이용행위 도중에 사후적으로 발생했다는 데 있습니다. B는 처음부터 A를 '강간상황극을 믿는 무고의의 도구'로 상정하고 이용한 것인데, A가 중간에 스스로 미필적 고의를 형성하여 독자적 범행으로 나아감으로써, B가 설계한 지배구조가 사실상 해체된 셈입니다.


원심(대전고법)은 이 불일치를 두 유형으로 구분했습니다. 이용행위 시점부터 피이용자에게 범죄성립요건이 갖춰진 경우를 제1유형으로, 이용행위 도중에 피이용자가 비로소 고의를 가지게 된 경우를 제2유형으로 나누면서, 이 사건은 제2유형이라서 강학상 착오법리를 적용할 수 없다고 봤습니다. 대신 B에 대해 미수를 인정하면서, 그 근거로 "우연한 사정"에 의해 강간의 결과가 발생한 것이라는, 사실상 인과관계의 단절을 암시하는 논리를 저변에 깔았습니다.


그런데 이 논리는 여러 면에서 취약합니다. B의 관점에서 보면, 이용행위와 강간 결과 사이의 인과적 연결이 객관적으로 끊어진 것이 아닙니다. A가 강간의 고의를 형성하게 된 것은 B가 예상한 경로와 다르지만, B의 기획이 인과적 조건이 된 것은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우연한 사정"이라는 표현은 규범적 판단을 회피한 언어적 봉합에 불과합니다.


이에 논문저자인 김성돈은 '우월적 의사지배를 통한 행위지배' 개념 아래 이 사안을 재구성합니다. 즉, 간접정범의 독자적 불법은 이원적 구조를 가진다는 것입니다.

이용자의 우월적 의사지배 의사라는 주관적 불법과, 피이용자가 실제로 그 우월적 의사에 의해 행위지배된 사실이라는 객관적 불법이 그것입니다. 이 사건에서 B에게는 주관적 불법은 인정되지만, A가 독자적 고의를 형성한 순간부터 객관적 행위지배 사실이 부정됩니다. 따라서 이는 간접정범의 수정된 구성요건상 착오에 해당하고, 단독범의 미수 구조에 유사한 논리로 간접정범의 미수를 인정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때 유의할 건, 결론은 원심과 같지만, 근거 법리가 전혀 다르다는 것입니다.


대법원은 원심의 결론을 그대로 수용했고, 이 착오 문제에 대해 아무런 독자적 법리도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논문이 가장 강하게 비판하는 지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최초로 제기된 간접정범 착오사례임에도, 대법원이 최종 법률심으로서의 기능을 사실상 방기했다는 것이지요.


선생님께서는 이 사안에서 어떤 지점이 가장 흥미롭거나 문제적으로 보이시는지요?




2부 — 이론과 실무의 괴리에 관하여



:

저는, 이글을 다시 만나며 간접정범에 관한 규정 및 도입의 계기를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정범인가 공범인가. 이것을 단순한 역할부여마냥 세세하게 구분하는 것은, 어쩌면 순수법학적 사유에선 흥미로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형사법에서의 결론은 필연적으로 피고인에 대한 처벌로 나아가는 만큼, 실무에서의 법률가들은 그 자체의 구분보단 결과의 차이 유무에 따라 비로소 실익이 있는가 논의를 하는 것 같습니다. 논문에서도 언급하였듯, 대법이 새로운 사안에 대해 구체적 설명이나 해결방안을 제시하지 않은 채 하급심을 수용한 건 유감입니다.


또한, 본 논문의 전제가 실무에 있어 간접정범의 엄격한 구분논의는 결과에 있어 차이가 없으므로 논의실익이 부족하다고 한 만큼, 만약 시간이 흘러 결과의 차이로 번질 수 있다면, 이 때의 논의는 더 이상 공염불이 아니겠지요.



을:

일리 있습니다. 선생님의 발언은 두 가지 층위로 생각이 정리됩니다.


현행법 하에서 간접정범자가 정범이냐 공범이냐는 — 교사범의 경우 정범에 정한 형으로 처벌되므로 — 법효과 면에서 실질적 차이가 없습니다. 논문도 이 점을 인정하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대법원도 본질론 논쟁에 무관심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선생님 말씀대로 결과의 차이가 생기는 순간 이 논의는 전혀 다른 국면으로 전환됩니다. 이번 강간상황극 사건이 정확히 이 경우입니다. 간접정범의 미수인지, 교사범 기수인지에 따라 피고인이 받는 처단형의 범위가 달라질 수 있으니까요. 공소시효나 신분범·목적범에서의 형량 가중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본질론이 공허했던 이유가 결과 차이의 부재에 있었지만, 역설적으로 결과 차이를 만들어내는 새로운 사안 자체가 본질론을 둘러싼 논의의 정합성에 의존한다는 것입니다.


우월적 의사지배를 통한 행위지배라는 개념이 간접정범의 독자적 불법표지로 확립되어 있지 않으면, 강간상황극 사건에서처럼 미수 성립의 근거 자체가 흔들립니다. 대법원이 원심을 그대로 수용하면서 아무 법리도 제시하지 않은 것은, 어쩌면 본질론을 방치해온 대가를 치른 셈이기도 합니다.


결국 선생님 말씀처럼, 이론과 실무의 긴장은 결과 차이가 현실화되는 순간 비로소 임계점에 도달하고, 그때가 되어서야 평소에 쌓아두지 않은 이론적 자원의 부재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구조인 것 같습니다. {판결 8}이 바로 그 임계점이었는데, 대법원은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인식했더라도 감당하지 않은 것이지요.


선생님께서는 이런 상황에서 형법이론학이 취해야 할 태도 — 판례에 대한 비판적 견인의 역할 — 에 대해 어떻게 보시는지요?



갑:

이론과 실무가 괴리되어선, 법학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저는, 판례에 대한 비판적 견인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봅니다. 이를 위해서라도 철저한 논리구조가 선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때의 논리구조는 리쾨르 식으로 말한다면, 전통은 공시적 시간과 통시적 시간 속에서 비로소 살아있듯, 실무의 내용을 최대한 종래 이론의 해석범주에 포섭하여, 내용적 통일을 기도해야 할 겁니다.



:

말씀이 깊습니다. 리쾨르를 경유하신 것이 단순한 수사가 아니라, 법학방법론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통찰로 읽힙니다.


리쾨르에게 전통은 단순히 과거의 퇴적이 아닙니다. 전통은 해석 행위를 통해 매 순간 현재 속에서 재활성화되고, 동시에 그 재활성화 자체가 통시적 흐름 위에 놓임으로써 살아있는 의미를 획득합니다. 이것을 법학에 옮기면, 판례와 학설의 누적 — 즉 법도그마틱의 전통 — 은 새로운 사안을 만났을 때 단순히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안과의 만남 속에서 비로소 자기를 갱신합니다.


강간상황극 사건이 흥미로운 이유도 여기 있습니다. 이 사건은 기존 간접정범 법리의 해석 지평이 충분히 넓은가를 시험하는 사안이었습니다. 리쾨르 식으로 말하자면, 텍스트(형법 제34조 제1항)와 새로운 사건(판결 8) 사이의 지평융합이 요구된 순간이었는데, 대법원은 그 융합의 작업을 회피했습니다.


선생님 말씀 중 "최대한 종래 이론의 해석범주에 포섭하여 내용적 통일을 기도해야 한다"는 부분은 특히 인상적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기존 범주에 억지로 끼워 맞추라는 것이 아니라 — 그것은 가다머가 비판한 방법론적 강제에 불과하겠지요 — 오히려 종래 이론이 왜 그 범주를 형성했는가, 그 범주 형성의 이유와 목적을 되묻는 것을 포함하는 작업으로 읽힙니다.


우월적 의사지배를 통한 행위지배 개념이 바로 그런 성격을 가집니다. 그것은 기존의 도구적 이용 판례들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판례들이 직관적으로 포착하고 있었던 것을 규범적으로 명시화하는 작업입니다. 전통 안에 이미 잠재해 있던 것을 끄집어내는 것 — 이것이 바로 리쾨르적 의미의 해석이자, 법도그마틱의 발전 방식이 아닐까요?


"이론과 실무가 괴리되어선 법학은 존재할 수 없다"는 말씀은, 어쩌면 법학이 순수 이론학도, 단순 기술학도 아닌 실천적 해석학이어야 한다는 선언으로 들립니다. 그 지점에서 리쾨르의 실천철학과 법학방법론은 자연스럽게 만납니다.




바람의 감촉이 라디오테이프에 닿자 자연스레 재생이 끊어졌다.


2026. 2.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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