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언의 구속과 해석의 자유, 배임죄와 배신설에 관하여

생각의 서고 68화

by 소는영


국문초록


본 글은 김신 전 대법관의 논문 「배신설 혹은 신임관계가 배임죄 해석에 미친 영향」(형사법연구 제37권 제4호, 2025)에 대한 학술적 논평을 목적으로 작성하였다.


김신의 논문은 한국 배임죄(형법 제355조 제2항)의 해석이 독일형법상 배신설(Treubruchstheorie)과 신임관계(Treueverhältnis) 개념에 의해 왜곡되어 왔음을 지적하고, 문언에 충실한 엄격해석으로의 귀환을 주장한다.


본 연구자는 이 논지를 기본적으로 수용하면서, 세 가지 관점에서 분석을 심화하고자 한다.


첫째, 가다머의 선이해 이론과 리쾨르의 텍스트 자율성 개념을 원용하여, 배신설이 배임죄 해석의 도그마적 선입견으로 기능해 온 구조를 해석학적으로 분석한다. 배신설은 정당한 선이해에서 부당한 선입견으로 전락하였으며, 해석학적 순환을 병리적 방향으로 고착시켰음을 논증할 것이다.

둘째, 대법원 2006도4876, 2019도9756, 2020도8682 전원합의체 판결의 논증구조를 분석하여, 배신설에 기초한 확장해석에서 문언에 기초한 엄격해석으로 이행하는 판례의 궤적을 추적한다.

셋째, 배임죄에서의 배신설 수용 문제를 한국 형법학의 독일형법 도그마틱 의존이라는, 보다 일반적인 법계수 방법론의 문제로 확장하여 검토한다. 아울러 부동산 이중매매에 관한 판례의 잔존, 문언주의의 한계, 배임죄 개정 논의와의 관계 등 논문이 남긴 문제들을 검토하도록 한다.


주제어
배임죄, 배신설, 신임관계, 문언주의, 죄형법정주의, 법해석학, 선이해, 텍스트 자율성, 법계수, 전원합의체 판결



I. 서론: 퇴임한 대법관의 발언이 갖는 무게


이 논문은 김신 전 대법관이 형사법연구에 기고한, 배임죄 해석론에 관한 하나의 선언문이다. 그의 논지는 분명하다. 배임죄의 본질이 신임관계에 대한 배신에 있다는 도그마가 배임죄의 구성요건 해석을 왜곡해왔으며, 이를 시정하기 위해서는 형법 제 355조 제2항의 문언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 주장 자체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학계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유사한 비판이 제기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논문이 갖는 의의는 주장의 새로움이 아니라 발언자의 경험, 바로 그가 역임한 위치에서 비롯된다. 그는 대법관 재임시절 배임죄에 관한 다수의 전원합의체 판결에 관여했던 인물이다.

그가 퇴임 후에야 비로소 배임죄 해석의 근본적 문제점을 체계적으로 지적하고 있다는 사실은, 현직 법관이 가진 제도적 제약과 퇴임 후의 학문적 자유 사이의 긴장을 드러낸다. 현직에서는 판결문이라는 형식적 제약 안에서만 발언할 수 있었던 사람이, 학술논문이라는 형식을 빌려 자신의 해석철학 전체를 전면에 내놓고 있는 것이다.

논문이 다루는 문제의 실천적 중요성도 크다. 김신이 직접 밝히듯, 《배임죄 판례백선》에서 평석대상으로 삼은 100 건의 판결 중 원심을 파기한 사건이 58 건에 이른다. 배임죄에 관한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이 16건에 달한다는 것은 다른 어떤 범죄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수치이며, 배임죄 해석의 불안정성을 수치로 직간접적 증명하는 것이라 사료된다.

본 글은 이 논문의 논지를 수용하면서, 그 주장이 갖는 해석학적 함의를 검토하고, 논문이 남긴 몇 가지
문제를 짚어보고자 한다.




II. 논문의 구조와 핵심 논지

1. 논문의 구성

논문은 서론(I), 배임죄 본질 논쟁의 함정(II), 타인의 사무를 처리하는 자(III), 임무위배행위(IV), 재산상
손해(V), 마무리(VI)의 6 개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별표로 배임죄에 관한 전원합의체 판결 16 건의 목록을
첨부하고 있다.


구성의 특징은 배임죄의 세 가지 구성요건, 즉 주체요건(타인의 사무를 처리하는 자), 행위요건(임무위배행위), 결과요건(재산상 손해)을 각각 독립된 장으로 다루면서, 각 구성요건의 해석에 배신설이 어떻게 침투하여 왜곡을 초래했는지를 순차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배신설의 악영향이 하나의 구성요건에 국한되지 않고 배임죄 전체에 걸쳐 관철되고 있다는 점을 구조적으로 드러내는 구성이다.



2. 핵심 논지

논문의 핵심 논지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우리 형법의 배임죄 규정은 독일 배임죄와 다르다. 독일 형법 제266조 제1항은 권한남용 (Missbrauch)과 배신(Treubruch)을 모두 처벌하는 이중구조를 취하고 있고, 특히 후단에서 신뢰관계 (Treueverhaeltnis)를 명시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 형법 제355조 제2항에는 신뢰관계나 신임관계에 해당하는 문언이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 배임죄가 배신설에 입각하고 있다는 전제 자체가 연혁적, 역사적 근거를 결여하고 있다.

둘째, 배신설에 기초한 해석은 배임죄의 각 구성요건을 피고인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확장해석하거나 유추해석하는 결과를 초래해 왔다. 주체요건에서는 '타인의 사무'를 '타인을 위한 사무'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확장하였고, 행위요건에서는 법령이나 계약 위반이 아닌 신임관계 위반까지 임무위배행위로 포섭하였으며, 결과요건에서는 현실적 손해가 아닌 손해 발생의 위험만으로도 기수를 인정하였다.


셋째, 따라서 배임죄의 해석은 배신설이라는 도그마를 버리고, 형법 제355조 제2항의 문언에 충실한 엄격해석으로 돌아가야 한다. '타인의 사무를 처리하는 자'는 타인의 재산관리에 관한 사무를 대행하는 사람만을 의미하고, 임무위배행위는 위임의 취지에 반하는 행위로 한정되어야 하며, 재산상 손해는 현실적 손해를 의미하여야 한다.




III. 배신설의 해석학적 구조: 도그마로서의 선이해

1. 선이해로서의 배신설

논문의 핵심적 통찰은 배신설이 배임죄 해석의 '선이해'(Vorverstaendnis)로 기능하고 있다는 점을 드러내는 데 있다. 가다머의 철학적 해석학에 따르면, 모든 이해는 선이해에 의해 매개된다. 해석자는 백지상태로 텍스트에 접근하지 않으며, 이미 가지고 있는 이해의 구조가 텍스트의 의미를 열어주는 동시에 제한한다. 배임죄의 해석에서 배신설은 바로 이러한 선이해의 역할을 수행해 왔다.


학계와 법원은 '배임죄의 본질은 신임관계에 대한 배신이다'라는 전제를 해석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이 전제는 형법 교과서의 배임죄 항목에서 구성요건 분석에 앞서 배치됨으로써, 이후의 모든 구성요건 해석을 방향지우는 기능을 담당하였다. 저자가 지적하듯, 대부분의 형법 교과서는 유독 배임죄 항목을 시작하면서 구성요건에 앞서 배임죄의 본질이 무엇이냐에 대해 매우 상세하게 기술하는 이례적인 태도를 보인다.


문제는 이 선이해가 텍스트 자체로부터 도출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한국 형법 제355조 제2항의 문언에는 신임관계나 신뢰관계에 해당하는 표현이 없다. 배신설이라는 선이해는 독일 배임죄의 역사적 맥락에서 형성된 것이며, 그것이 한국 배임죄의 해석에 무비판적으로 이식된 것이다.



2. 선입견과 선이해의 구별

이 지점에서 가다머의 선입견(Vorurteil) 이론을 보다 정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가다머에게 선입견은 그 자체로 부정적인 것이 아니다. 선입견이란 본래 선판단(Vor-urteil), 즉 최종적 판단에 앞서 이루어지는 잠정적 판단을 의미한다. 계몽주의가 모든 선입견을 편견으로 격하시킨 것과 달리, 가다머는 선입견이 이해의 불가피한 조건이라고 본다. 해석자는 선입견 없이 텍스트에 접근할 수 없으며, 선입견이야말로 텍스트에 대한 물음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선입견이 동등한 것은 아니다. 가다머는 정당한 선입견과 부당한 선입견을 구별한다. 정당한 선입견은 텍스트와의 만남을 통해 검증되고 교정될 수 있는 것이다. 해석자가 텍스트에 자신의 선이해를 가지고 접근하되, 텍스트가 자신의 선이해와 다른 것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할 때, 선이해는 교정된다. 이것이 해석학적 순환의 생산적 측면이다. 반면 부당한 선입견은 이러한 교정의 가능성을 차단하는 것이다.

해석자가 자신의 선이해에 집착하여 텍스트가 말하는 것을 듣지 못할 때, 선이해는 도그마로 전락한다. 배임죄 해석에서 배신설은 정확히 이러한 도그마적 선입견의 양태를 보여준다. 배신설을 선이해로 가지고 형법 제355조 제2항에 접근한 해석자는, 그 조문이 신임관계에 대하여 아무것도 말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인식하였어야 했다. 텍스트가 선이해와 다른 것을 말하고 있다는 신호가 문언 자체에서 발신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해석자들은 이 신호를 무시하였다. 텍스트가 침묵하고 있는 것을 텍스트가 전제하고 있는 것으로 읽어냄으로써, 선이해를 텍스트에 투사하였다. 이로써 배신설은 정당한 선이해에서 부당한 선입견으로, 나아가 도그마로 굳어졌다.



3. 해석학적 순환과 그 교정

가다머의 해석학적 순환(hermeneutischer Zirkel) 개념은 배임죄 해석의 구조적 문제를 더욱 명료하게 보여준다. 해석학적 순환이란 부분의 이해가 전체의 이해에 의존하고, 전체의 이해가 다시 부분의 이해에 의존하는 구조를 말하며, 이때의 순환은 악순환이 아니다. 해석자가 부분과 전체 사이를 오가며 이해를 심화시키는 생산적 순환이다.


배임죄의 해석에서 이 순환은 다음과 같이 작동하여야 한다. 해석자는 배임죄의 전체적 의미에 대한 선이해를 가지고 개별 구성요건의 문언에 접근한다. 개별 구성요건의 문언을 해석하면서, 전체에 대한 선이해가 개별 문언과 부합하는지를 검증한다. 만일 부합하지 않으면, 전체에 대한 선이해를 수정한다. 수정된 선이해를 가지고 다시 개별 문언에 접근한다. 이러한 왕복 운동을 통해 이해는 점차 심화되고, 최종적으로 전체와 부분이 정합적으로 통합되는 이해에 도달한다.


그러나 배임죄의 해석에서는 이 순환이 왜곡되었다. 배신설이라는 선이해가 전체로서 확정된 후, 개별 구성요건은 이 전체에 맞추어 해석되었다. '타인의 사무'는 신임관계에 맞추어 확장되고, '임무위배행위'는 신임관계 위반으로 정의되며, '재산상 손해'는 위험범적으로 파악되었다. 개별 구성요건의 문언이 전체에 대한 선이해와 부합하지 않는 경우에도, 선이해가 수정되는 대신 문언이 선이해에 맞추어 재해석되었다. 순환이 교정적으로 작동하지 않고, 선이해를 확증하는 방향으로만 작동한 것이다. 이는 해석학적 순환의 병리적 형태이다.


저자의 논문은 이 병리적 순환을 끊으려는 시도이다. 배신설이라는 전체에 대한 선이해를 일단 괄호에 넣고, 개별 구성요건의 문언 자체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먼저 확인하자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타인의 사무'라는 문언은 신임관계를 전제하지 않고도 해석될 수 있으며, 오히려 신임관계 없이 해석하는 것이 문언에 더 충실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이것이 해석학적 순환의 교정이다.



4. 텍스트의 자율성과 형벌법규

리쾨르의 해석학은 텍스트의 자율성(autonomie du texte) 개념을 통해 이 문제에 또 다른 조명을 제공한다. 리쾨르에 따르면, 텍스트는 일단 기록되면 저자의 의도로부터, 원래의 수신자로부터, 그리고 원래의 상황적 맥락으로부터 독립하여 자율적 의미를 갖게 된다. 이를 리쾨르는 '의미론적 자율성'이라고 부른다. 텍스트의 의미는 저자가 의도한 것과 동일하지 않으며, 텍스트가 열어놓는 의미의 지평은 저자의 의도를 초과한다.


이 개념을 법률 텍스트에 적용하면, 형법 제355조 제2항은 입법자의 의도로부터, 입법 당시의 비교법적 참조 대상으로부터, 그리고 입법 당시의 역사적 맥락으로부터 독립하여 자율적 의미를 갖는다. 설사 입법자가 독일 배임죄의 배신설을 참조하여 이 조문을 만들었다 하더라도, 완성된 조문의 의미는 입법자의 참조 의도에 구속되지 않는다. 조문의 문언이 허용하는 의미 범위 안에서 해석되어야 하며, 문언이 허용하지 않는 의미는 입법자의 의도를 근거로 하더라도 부여될 수 없다.


이 점에서 형벌법규의 해석은 리쾨르의 텍스트 자율성 테제가 가장 강하게 관철되어야 하는 영역이다. 일반적인 법률 해석에서는 입법 목적이나 입법자의 의도가 해석의 중요한 자료가 될 수 있다. 그러나 형벌법규의 해석에서는 죄형법정주의에 의해 문언의 가능한 의미가 해석의 절대적 한계를 구성한다. 형벌법규의 텍스트는 다른 어떤 법률 텍스트보다 강한 자율성을 갖는다. 해석자는 텍스트가 말하는 것 이상을 텍스트에서 읽어낼 수 없으며, 텍스트가 침묵하는 것을 텍스트가 전제하고 있다고 주장할 수 없다.



5. 해석의 갈등과 배임죄

리쾨르의 또 다른 핵심 개념인 '해석의 갈등'(conflit des interpretations)은 배임죄 해석의 현재적 상황을 기술하는 데 유용하다. 리쾨르에 따르면, 동일한 텍스트에 대해 복수의 해석이 경합할 수 있으며, 이 경합 자체가 해석의 본질적 조건이다. 해석의 갈등은 해소되어야 할 결함이 아니라, 텍스트의 의미가 풍부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불가피한 현상이다.


배임죄의 해석에서도 해석의 갈등이 존재한다. 배신설에 기초한 해석과 문언주의에 기초한 해석이 동일한 조문을 놓고 경합하고 있다. 그러나 이 갈등이 리쾨르가 말하는 생산적인 해석의 갈등인지는 의문이다. 리쾨르에게 해석의 갈등이 생산적인 것은, 각 해석이 텍스트의 의미를 서로 다른 측면에서 조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배임죄의 경우, 배신설에 기초한 해석은 텍스트의 의미를 조명하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에 존재하지 않는 의미를 부가하는 것이다. 이는 해석이 아니라 입법이다.


리쾨르는 설명(expliquer)과 이해(comprendre)의 변증법을 통해 해석의 갈등을 조정하려 하였다. 텍스트의 구조적 분석(설명)과 해석자의 의미 이해(이해)가 상호 보완적으로 작용하여, 보다 적절한 해석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배임죄의 경우, 형법 제 355 조 제 2 항의 문언적, 체계적 분석(설명)은 배신설이 텍스트에 근거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가리킨다. 이 결론과 배신설이라는 전통적 이해(이해) 사이에 갈등이 있다면, 설명의 결과가 이해를 교정하여야 한다. 이것이 리쾨르적 해석학이 배임죄의 해석에 대해 제시하는 방향이다.



6. 전통의 권위와 도그마의 경계

배신설이 오랫동안 유지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가다머가 말하는 '전통의 권위'(Autoritaet der Ueberlieferung)이다. 가다머에 따르면, 전통은 해석자에게 의미 있는 선이해를 제공하는 원천이며, 전통의 권위는 맹목적 복종이 아니라 이성적 승인에 기초한다. 해석자가 전통의 내용을 검토하고, 그것이 합리적이라고 판단하여 수용하는 것이 전통의 권위이다.


배신설은 독일 형법학의 전통에서 유래하여 일본을 거쳐 한국에 전해진 것이다. 이 전통이 한국 형법학에서 수십 년간 유지되어 왔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일정한 권위를 부여한다. 그러나 전통의 권위가 정당한 것이려면, 그 전통의 내용이 이성적 검토를 견딜 수 있어야 한다. 배신설이 한국 형법 제355 조 제2항의 문언에 근거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드러난 이상, 배신설이라는 전통은 더 이상 이성적 승인을 주장할 수 없다. 전통의 권위는 도그마적 권위로 전락한 것이다.


저자의 논문이 수행하는 작업은, 가다머적 의미에서, 전통의 권위와 도그마적 권위를 구별하고, 배신설이 후자에 해당함을 논증하는 것이다. 이 구별은 단순히 배임죄 해석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한국 형법학이 외래 이론을 수용하는 방식 전반에 대한 반성을 촉구한다.



7. 본질론의 함정

저자가 '배임죄 본질 논쟁의 함정'이라고 명명한 것은 정확한 진단이다. 범죄의 본질이라는 것은 해당 범죄의 구성요건을 해석한 결과로서 도출되는 것이지, 구성요건 해석에 선행하여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배임죄에서는 이 순서가 전도되어 있었다. 본질론이 먼저 확정되고, 그 본질론에 따라 구성요건이 해석되었다. 이는 논리적으로 순환이다.


다른 범죄에서는 이러한 본질론이 구성요건 해석에 앞서 제시되는 경우가 드물다. 유독 배임죄에서만 이러한 태도가 관행으로 자리 잡았다는 것은, 배신설이라는 선이해가 얼마나 깊이 뿌리내려 있는지를 보여준다. 해석학적으로 말하면, 본질론이 선이해로 기능하면서 해석학적 순환을 병리적 방향으로 고착시킨 것이다.





IV. '타인의 사무' 개념의 해체와 재구축

1. 확장의 궤적

논문은 '타인의 사무' 개념이 판례에 의해 어떻게 확장되어 왔는지를 추적한다. 본래 '타인의 사무'란 타인에게 귀속되어 있어 타인이 처리하여야 할 사무의 전부 또는 일부를 대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문언의 자연스러운 의미에 부합한다. 그러나 판례는 이를 두 방향으로 확장하였다.


첫째, 타인의 재산보전행위에 협력하는 사무, 즉 협력사무도 타인의 사무에 포함된다고 하였다. 둘째, 일정한 경우 '타인을 위한 사무'도 '타인의 사무'에 해당한다고 하였다. 이 두 가지 확장은 모두 신임관계를 매개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확장의 대표적 사례가 부동산 이중매매이다. 판례는 부동산 매도인의 소유권이전등기의무가 자기의 사무이면서 동시에 매수인의 재산보전에 협력하는 타인의 사무라는 이중적 성격을 가진다고 하였다. 이 법리는 부동산에 관한 각종 권리의 이전 및 설정의무, 나아가 동산, 채권, 면허권 등 다른 재산권에 대한 이전의무로까지 확대되었다.



2. 확장 논리에 대한 비판

저자는 이러한 확장이 배임죄의 문언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매도인의 재산권이전의무나 매수인의 대금지급의무는 모두 매매계약에 의하여 발생한 것으로, 본래 상대방이 처리하여야 할 사무가 아니다. 매매계약에서 당사자들은 각자의 계약상 권리의 만족을 위해 상대방에게 반대급부를 이행하여야 하는 대향적 거래관계에 있을 뿐이다. 설사 매도인에게 등기협력의무가 있다 하더라도 그 협력의무의 본질은 소유권이전의무를 달리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 비판은 타당하다. '타인의 사무'와 '타인을 위한 사무'는 문언상 구별된다. 한국 형법은 '타인의 사무를 처리하는 자'라고 규정하고 있지, '타인을 위하여 사무를 처리하는 자'라고 규정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일본 형법 제247조가 '타인을 위하여 사무를 처리하는 자'라고 규정하고 있는 것과 대비된다. 양자의 문언이 다른 이상, 양자의 의미도 다르게 해석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럼에도 판례가 양자를 동일하게 취급한 것은 문언의 차이를 무시한 것이다.



3.축소의 궤적

논문은 이러한 확장일로에 있던 판례가 2011년부터 균열되기 시작하였음을 추적한다. 동산 이중양도에 관한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이 최초의 균열이었다. 이후 부동산 대물변제예약, 동산 양도담보, 부동산 이중저당, 동산 담보권, 자동차 저당 및 이중양도, 자동차 양도담보 사건을 거치면서 판례는 타인의 사무의 범위를 점진적으로 축소해 왔다.


이 축소의 과정은 결국 타인의 사무를 대행하는 경우만이 배임죄의 주체요건을 충족한다는 방향으로 수렴하고 있다. 저자는 이러한 판례의 변화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아직 부동산 이중매매에 관한 종전 판례가 유지되고 있는 점을 비판한다.



4. 남은 모순: 부동산 이중매매

논문이 지적하는 가장 근본적인 모순은 부동산 이중매매에 관한 대법원 2017도4027 전원합의체 판결이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 판결은 계약이 본격적으로 이행되는 단계에 이른 경우 매도인이 '타인의 사무를 처리하는 자'에 해당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 논리는 2020 년 이후의 전원합의체 판결들과 정합적이지 않다. 부동산 저당권설정의무가 자기의 사무라면, 소유권이전등기의무도 마찬가지여야 한다. 대법원 자신도 거래 현실의 특수성을 고려한 것이라고 그 이유를 밝혔는데, 이는 법리적 판단이 아니라 정책적 판단이다.




V. 전원합의체 판결에 나타난 배신설의 침투와 후퇴

1. 2006도4876 전원합의체 판결: 확장의 정점

2008년 전원합의체 판결은 배신설에 기초한 확장해석의 정점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이 판결에서 다수의견은 부동산 매도인의 소유권이전등기의무가 단순한 채무이행의 문제가 아니라, 매수인과의 신임관계에 기초한 타인의 재산보전에 협력할 의무라고 판시하였다. 핵심적인 논증구조는, 중도금 지급 이후 매도인과 매수인 사이에는 단순한 채권채무관계를 넘어서는 신임관계가 형성된다는 것이었다.


이 판결의 논증을 분석하면, 배신설이 어떻게 순환논법으로 기능하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다수의견은 먼저 배임죄의 본질이 신임관계의 위반에 있다고 전제한 후 , 매매계약에서 신임관계가 존재하는지를 판단하고 , 신임관계가 존재한다면 그 위반이 배임죄를 구성한다고 결론 내렸다. 그러나 매매계약에서 신임관계가 존재하는지 여부는 배임죄의 성립 여부와 독립적으로 판단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신임관계의 존재는 배임죄의 구성요건이 아니라 배임죄의 성립을 위해 사후적으로 구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반대의견은 이 점을 정확히 지적하였다. 매도인의 소유권이전등기의무는 매매계약에 기한 자기의 채무이행의 문제일 뿐, 타인의 사무를 대행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 매도인이 이중매매를 하는 것은 계약위반이지, 위임받은 사무를 저버리는 것이 아니다. 반대의견의 이 논리는 저자의 현재 주장과 정확히 일치한다. 저자가 현직 시절 어떤 의견을 개진하였는지는 판결문에서 확인할 수 없으나, 적어도 반대의견의 논리적 구조는 저자의 문언주의적 입장과 정합적이다.



2. 2019도9756 전원합의체 판결: 전환의 계기

2020년의 이 전원합의체 판결은 배임죄 해석의 전환점이 된 판결이다. 사안은 동산 양도담보 설정자가 목적물을 제3자에게 처분한 것이 배임죄에 해당하는지의 문제였다. 다수의견은 종전 판례를 변경하여, 양도담보 설정자는 담보물의 담보가치를 유지, 보전할 의무를 부담하지만 이는 양도담보 설정계약이라는 자기의 계약에 따른 자기의 의무일 뿐 타인의 사무가 아니라고 판시하였다.


이 판결의 논증구조에서 주목할 점은, 다수의견이 '타인의 사무'의 의미를 한정하는 기준으로 문언의 통상적 의미를 원용하였다는 것이다. 다수의견은, '타인의 사무를 처리하는 자'란 타인의 재산관리에 관한 사무를 대행하는 경우를 의미한다고 하면서, 계약의 일방 당사자가 상대방에 대하여 부담하는 급부의무는 원칙적으로 자기의 사무라고 판시하였다. 이는 배신설에 의해 매개되지 않은, 문언 자체에 충실한 해석이다. 배임죄의 본질에 대한 선언 없이, 구성요건의 문언으로부터 직접 결론을 도출하고 있다.


이 판결은 또한 민사상 채무불이행과 형사상 배임죄의 구별 기준을 보다 명확히 하였다. 다수의견은 채권관계에서 발생하는 의무는 원칙적으로 자기의 의무이며, 그 불이행이 민사상 책임을 발생시킬 수 있지만 곧바로 형사상 배임죄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이로써 민사의 형사화에 대한 방벽이 구축되기 시작하였다.



3. 2020도8682 전원합의체 판결: 축소의 완성

2022년의 이 전원합의체 판결은 배임죄 축소해석의 현재적 도달점을 보여준다. 사안은 자동차 양도담보 설정자가 목적물을 처분한 사건이었다. 다수의견은 2019도9756 판결의 법리를 재확인하면서, 양도담보 설정자의 담보가치 유지의무는 양도담보 설정계약에 기한 자기의 의무일 뿐 타인의 사무가 아니라고 판시하였다.


이 판결에서 특히 주목할 것은 다수의견의 보충의견이다. 보충의견은 종래 판례가 '타인의 사무'를 지나치게 넓게 인정하여 본래 민사적으로 해결되어야 할 분쟁에까지 형벌권이 개입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고 비판하였다. 이는 저자가 논문에서 제기하는 비판과 거의 동일한 내용이다. 판결문의 형식 안에서 표현된 것이지만, 배신설에 대한 근본적 문제 인식이 대법원 내부에서도 공유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상의 세 판결을 통시적으로 조망하면, 대법원의 배임죄 해석이 배신설에 기초한 확장해석에서 문언에 기초한 엄격해석으로 이행하고 있는 궤적이 확인된다. 2006도4876 에서의 확장, 2019도9756 에서의 전환, 2020도8682 에서의 확립이라는 삼단계가 그것이다. 저자의 논문은 이 궤적의 종착점을 학술적으로 정식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부동산 이중매매에 관한 2017도4027 판결이 이 궤적에서 벗어나 있다는 점이 체계적 정합성을 저해하고 있다.




VI. 임무위배행위의 경계: 형사법과 사법의 교차

1. 신임관계를 매개로 한 임무위배행위의 확장

논문이 지적하는 두 번째 왜곡은 임무위배행위의 정의에 관한 것이다. 판례는 임무에 위배하는 행위란 ' 처리하는 사무의 내용, 성질 등 구체적 상황에 비추어 법률의 규정, 계약의 내용 또는 신의칙상 당연히 할 것으로 기대되는 행위를 하지 않거나 당연히 하지 않아야 할 것으로 기대되는 행위를 함으로써 본인과의 신임관계를 저버리는 일체의 행위를 포함한다'고 정의한다.


이 정의에서 핵심적 문제는 두 가지이다. 첫째, 법률의 규정과 계약의 내용을 넘어서 '신의칙상 당연히 할 것으로 기대되는 행위'까지 임무위배행위에 포함시킴으로써 그 범위가 무한정 확장될 수 있다는 점이다. 둘째, 최종적 판단 기준인 '본인과의 신임관계를 저버리는' 것의 내용 자체가 확정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저자의 비판은 타당하다. 계약관계에 있는 당사자들은 거의 언제나 상대방을 배려할 신의칙상 의무를 부담하고 있다. 만일 신의칙 위반이 곧 임무위배행위가 된다면, 사실상 모든 계약상 의무 위반이 배임죄의 구성요건을 충족할 수 있게 된다. 이는 민사상 채무불이행과 형사상 배임죄의 구별을 무의미하게 만든다.



2. 민사의 형사화 문제

이 문제는 민사의 형사화라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와 연결된다. 대법원 2019도14340 전원합의체 판결의 보충의견도, '법령이나 사법상의 계약에 위반하는 행위를 모두 배임죄로 처벌할 수 있는 것으로 해석하게 된다면, 이는 민사사건의 전면적인 형사화를 초래하는 것으로서 허용될 수 없다 '고 명시하였다. 28 그러나 판례가 임무위배행위를 신임관계 위반으로 정의하는 한, 민사와 형사의 경계는 언제나 불안정할 수밖에 없다.


저자가 제시하는 대안은 명쾌하다. 임무위배행위는 타인의 사무를 대행하는 자가 그 위임의 취지에 반하여 하는 행위라고 정의하면 된다. 이렇게 하면 판단 기준은 법률, 계약, 내부규정 등 객관적으로 확정 가능한 것이 된다.



3. 규범적 판단의 불가피성

다만, 저자의 대안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아니다. 위임의 취지에 반하는 행위인지 여부도 결국 규범적 판단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이러한 규범적 판단의 불가피성이 신임관계라는 추상적 기준을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위임의 취지에 기초한 판단은 적어도 판단의 출발점이 명확하다. 위임의 근거가 되는 법률, 계약, 정관 등이 존재하고, 그것의 해석이 판단의 기초가 된다. 반면 신임관계에 기초한 판단은 출발점 자체가 불명확하다. 이는 판단의 근거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판단해야 할 문제를 하나 더 추가하는 것이다.




VII. 재산상 손해: 위험범인가 침해범인가

1. 위험범설의 문제

논문이 지적하는 세 번째 왜곡은 재산상 손해의 해석에 관한 것이다. 판례는 배임죄에서의 재산상 손해에는 현실적인 손해가 발생한 경우뿐만 아니라 재산상 실해 발생의 위험을 초래한 경우도 포함된다고 한다. 이는 배임죄를 위험범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저자는 이에 대해 세 가지 비판을 제기한다


첫째, 형법 제355조 제2항은 '타인에게 손해를 가하는 때'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 문언은 현실적 손해의 발생을 의미하는 것이지, 손해 발생의 가능성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해석되지 않는다. 손해 발생의 위험을 현실적 손해와 동일하게 취급하는 것은 문언에 반하는 확장해석이다.


둘째, 우리 형법은 독일과 달리 배임죄의 미수범을 처벌하는 규정을 두고 있다(형법 제359조). 이는 임무위배행위로 현실적 손해를 가한 때를 기수로, 그 이전 단계를 미수로 구분하여 처벌하겠다는 입법적 결단이다. 만일 손해 발생의 위험만으로도 기수가 성립한다면, 미수 규정은 적용될 여지가 거의 없게 된다. 이는 미수 규정을 사문화시키는 해석이다.


셋째, 우리 배임죄는 본인에게 재산상 손해를 가할 뿐만 아니라 행위자 스스로 재산상 이익을 취득하거나 제3자로 하여금 재산상 이익을 취득하게 할 것을 요건으로 한다. 재산상 이익의 취득은 이익의 현실적 취득을 의미한다. 손해 발생의 위험이 있더라도 이익을 현실적으로 취득하지 않았다면 기수가 성립하지 않는다 . 이 점에서 재산상 이익 취득 요건은 배임죄의 과잉 적용을 방지하는 안전판 기능을 한다.



2. 독일법의 무비판적 수용

저자는 위험범설의 뿌리가 독일 배임죄의 해석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데 있다고 진단한다. 독일 형법에는 배임죄의 미수를 처벌하는 규정이 없다. 따라서 독일에서는 손해 발생의 위험만 초래한 경우도 처벌하기 위하여 배임죄를 위험범으로 파악하는 해석론을 발전시켰다. 그러나 미수 처벌 규정이 있는 우리 형법에서는 이러한 해석론이 필요하지 않다.


이 지적은 비교법적 계수의 방법론적 문제를 제기한다. 외국 법제의 해석론을 수용할 때는 그 해석론이 성립한 제도적 맥락을 함께 고려하여야 한다. 독일에서 위험범설이 발전한 것은 미수 처벌 규정의 부재라는 공백을 메우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한 공백이 존재하지 않는 한국에서 동일한 해석론을 채용할 이유는 없다.



3. 배신설과의 연결

저자는 위험범설이 궁극적으로 배신설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본다. 독일 배임죄가 배신행위 자체를 처벌하는 데서 출발하였기 때문에, 행위가 중심이 되고 결과는 부차적으로 취급되었다는 것이다. 이 분석은 배신설이 배임죄의 개별 구성요건 해석에 미치는 영향이 단편적인 것이 아니라 체계적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배신설은 주체요건에서 타인의 사무의 범위를 확장하고, 행위요건에서 임무위배행위의 범위를 확장하며 , 결과요건에서 손해의 의미를 확장한다. 세 가지 확장이 하나의 뿌리에서 비롯된 것이다.




VIII. 비교법적 계수의 해석학적 문제

1. 법계수와 해석의 자율성

생각건대 저자가 논문에서 제기한 문제는 배임죄에 국한되지 않는, 보다 일반적인 방법론적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한국 형법은 독일과 일본의 형법을 참조하여 제정되었다. 이러한 법계수(Rechtsrezeption)의 상황에서, 모법(母 法)의 해석론을 계수법(繼受法)의 해석에 어느 범위까지 원용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가 제기된다.


저자의 입장은 명확하다. 우리 배임죄와 문언을 달리하는 독일이나 일본의 배임죄나 그 나라에서의 해석을 우리 배임죄의 해석에 그대로 가져오려는 태도는 매우 부적절하다. 형벌법규는 그 문언을 엄격하게 해석하여야 하므로, 해석의 출발점은 해당 국가의 형벌법규 문언이어야 하고 , 비교법적 자료는 참고가 될 수 있을 뿐 독자적인 해석의 근거가 될 수는 없다.



2. 문언의 차이와 해석의 차이

구체적으로, 독일 형법 제266조 제1항은 '신뢰관계(Treueverhaeltnis)에 의하여 타인의 재산상 이익을 보호하여야 할 의무를 위반'하는 것을 명시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 규정이 있기 때문에 독일에서는 신뢰관계가 배임죄의 구성요건요소로 기능한다. 그러나 한국 형법 제355조 제2항에는 이에 상응하는 규정이 없다. '타인의 사무를 처리하는 자가 그 임무에 위배하는 행위로써 재산상의 이익을 취득하거나 제3자로 하여금 이를 취득하게 하여 본인에게 손해를 가한 때'라는 규정에서 신뢰관계나 신임관계의 존재를 읽어내는 것은 문언의 범위를 벗어나는 것이다.


일본 형법 제247조도 '타인을 위하여(他人のために) 사무를 처리하는 자'라고 규정하고 있어 한국 형법의 '타인의 사무를 처리하는 자'와 문언이 다르다. '타인을 위하여'라는 표현은 자기의 사무이더라도 타인을 위한 성격을 가지면 족하다는 해석을 허용할 수 있으나, '타인의 사무'라는 표현은 사무의 귀속 자체가 타인에게 있을 것을 요구한다. 이 문언의 차이를 무시하고 일본의 해석론을 그대로 가져오는 것도 부적절하다.



3. 법계수의 방법론적 원칙

이상의 논의로부터 법계수 상황에서의 해석 방법론에 관한 몇 가지 원칙을 도출할 수 있다.


첫째, 해석의 출발점은 언제나 계수법의 문언이다. 둘째, 모법과 계수법의 문언이 다른 경우, 모법의 해석론을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허용되지 않는다. 셋째, 모법의 해석론을 원용하려면, 그 해석론이 성립한 제도적 맥락과 계수법의 제도적 맥락이 동일하거나 유사한지를 먼저 확인하여야 한다. 넷째, 특히 형벌법규의 해석에서는 피고인에게 불리한 방향으로의 비교법적 원용은 더욱 엄격하게 제한되어야 한다. 배임죄의 해석에서 배신설의 수용은 이 원칙들에 모두 위배된다.



4. 한국 형법학의 독일 의존과 그 구조적 문제

배임죄에서의 배신설 수용은 한국 형법학이 독일 형법 도그마틱에 의존해 온 역사의 한 단면이다. 한국 형법은 1953년 제정 당시 독일과 일본의 형법을 주요 참조 모델로 삼았으며, 이후 형법학의 이론적 기초도 상당 부분 독일 형법학에서 차용하였다. 이러한 의존은 비단 배임죄에 국한되지 않는다.


횡령죄에서의 '보관' 개념 해석에서도 유사한 문제가 확인된다. 독일 Unterschlagung의 해석론이 한국 횡령죄의 보관 개념에 영향을 미쳤으며, 사기죄에서의 기망행위 범위에 관해서도 독일의 논의가 원용되어 왔다. 이러한 사례들은 한국 형법학이 독일 이론을 수용할 때, 양국 법률의 문언적 차이와 제도적 맥락의 차이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는 경향이 있음을 시사한다. 배임죄에서의 배신설 문제는 이 구조적 경향의 가장 극단적이고 가장 가시적인 사례인 것이다.




IX. 남은 문제들

1. 현직의 침묵과 퇴임 후의 발언

이 논문을 읽으면서 떠오르는 첫 번째 물음은, 저자가 현직 대법관 시절에 이러한 주장을 어느 정도까지 판결문에 반영할 수 있었는가라는 것이다. 별표에 열거된 16건의 전원합의체 판결 중 상당수에 저자가 관여하였을 것이다. 그 판결들 중에는 저자의 현재 주장과 정합적인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이러한 긴장은 법관이 합의체의 일원으로서 다수의견에 따라야 하는 제도적 제약에서 비롯된다. 퇴임 후에야 비로소 자신의 해석철학을 형식적 제약 없이 전개할 수 있다는 것은, 현직 법관의 학문적 표현의 자유가 구조적으로 제한되어 있음을 시사한다.



2. 문언주의의 한계와 가능성

저자의 논문은 일관되게 문언주의를 관철한다. 형벌법규의 해석은 그 문언을 따라 엄격하게 해석하여야 하고, 문언의 가능한 의미를 벗어나 피고인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확장해석하거나 유추해석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이 원칙은 죄형법정주의의 당연한 귀결이다. 그러나 문언주의가 모든 해석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한다. '타인의 사무'가 무엇인지, '임무에 위배하는 행위'가 무엇인지는 문언 자체만으로는 확정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다만, 논문의 주장은 문언해석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문언에 존재하지 않는 요소를 해석론으로 창설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존재하지 않는 요소를 해석론으로 만들어내는 것과, 존재하는 문언의 의미를 다양한 해석방법을 통해 확정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3. 배임죄 개정 논의와의 관계

논문의 마지막 부분에서 저자는 배임죄 개정 논의에 대해 언급한다. 벌칙규정의 완화, 경영판단에 대한 면책규정 신설, 심지어 배임죄 폐지론까지 다양한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이에 대해 저자는 문제의 본질이 입법의 잘못이 아니라 해석의 잘못에 있다고 진단한다. 만일 배임죄의 문제가 해석의 잘못에 기인하는 것이라면, 해석을 교정하면 되는 것이지 법률을 개정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수십 년간 축적된 잘못된 해석을 교정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한지에 대해서는 회의적 시각도 있을 수 있다. 부동산 이중매매의 사례에서 보듯 정책적 고려가 문언주의를 압도하는 경우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4. 실해와 손해: 용어의 정치학

논문에서 주목할 만한 세부적 지적이 있다. 저자는 대법원이 법률상의 단어인 '손해' 대신 '실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하면서, 이것이 손해 발생의 위험에 불과한 것을 마치 현실적 손해가 발생하였다는 인상을 주려는 의도로 사용되는 것으로 보인다고 비판한다. 동일한 법적 현상을 지칭하는 데 있어 어떤 용어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해석의 방향이 달라질 수 있다. 법률 용어의 사용에 있어서도 법률의 문언에 충실할 필요가 있다.




X. 결론: 활자의 감옥으로의 귀환

김신 전 대법관의 이 논문은 배임죄 해석론에 대한 체계적 비판이자, 형벌법규 해석의 기본원칙으로의 귀환을 촉구하는 글이다. 그 핵심 주장은, 배임죄의 본질이 신임관계에 대한 배신에 있다는 도그마가 배임죄의 문언에 근거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구성요건 해석 전반을 지배해 왔으며, 이를 시정하기 위해서는 문언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해석학적으로 보면, 왜곡된 선이해를 교정하고 텍스트의 자율성을 회복하려는 시도이다. 배신설이라는 선이해가 도그마로 굳어져 텍스트가 말하는 것을 듣지 못하게 만들었다면, 그 도그마를 해체하고 텍스트 자체로 돌아가는 것이 필요하다. 가다머의 해석학적 순환은 선이해가 텍스트와의 대화를 통해 교정될 것을 요구하며, 리쾨르의 텍스트 자율성 테제는 텍스트의 문언이 해석자의 선입견보다 우위에 있을 것을 요구한다. 배임죄의 역사는 이 두 요구가 충족되지 않았을 때 어떤 결과가 초래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비교법적 관점에서 이 논문은 법계수 상황에서의 해석 방법론에 관한 중요한 교훈을 제공한다. 독일 배임죄에 명시적으로 규정되어 있는 신뢰관계가 한국 배임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독일에는 배임죄 미수 처벌 규정이 없고 한국에는 있다는 사실은 양국의 배임죄 해석이 동일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2020 년 이후의 일련의 전원합의체 판결들이 저자의 주장과 같은 방향으로 판례를 변경해 왔다는 사실은 고무적이나, 부동산 이중매매에 관한 판례가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는 점은 문언주의와 정책적 고려 사이의 긴장이 완전히 해소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법관은 법률의 문언이라는 감옥에 갇혀 있다. 그러나 그 감옥은 법관을 구속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보호하는 것이다. 문언의 구속을 받음으로써 법관은 정치적 압력으로부터, 여론의 호오로부터, 자신의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배임죄의 역사는, 그 벽을 허물었을 때 법관이 자유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임관계라는 더 모호한 기준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됨을 보여준다. 문언이라는 감옥은 부자유가 아니라, 법적 안정성이라는 이름의 자유이다. 김신 전 대법관은 퇴임 후에야 이 감옥의 의미를 온전히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그가 형사법연구에 기고한 이 논문은, 한 법관이 평생에 걸쳐 축적한 문언주의적 확신의 체계적 표명이다. 나는 그 확신이 옳다고 생각한다.




2026. 2. 20.



참고문헌


김신, "배신설 혹은 신임관계가 배임죄 해석에 미친 영향", 형사법연구 제37권 제4호, 한국형사법학회, 2025.

김신, 배임죄 판례백선, 법문사, 2021.

김신, "배임죄에 대한 몇 가지 오해", 법문사, 2020.

김신, "부동산 이중매매와 제 1 매수인의 보호", 배임죄에 대한 몇 가지 오해, 법문사, 2020.

문형섭, "배임죄의 본질과 주체의 범위", 법조 제 544 호, 2002.

신동운, 형법각론, 법문사, 2017. 이상돈, 법이론, 박영사, 2019. 임웅, 형법각론(제 9 정판), 법문사, 2018.

허일태, "배임죄 해석의 나아갈 방향", 형사법연구 제27권 제1호, 2015.

Emilio Betti, Die Hermeneutik als allgemeine Methodik der Geisteswissenschaften, 1962.

Hans-Georg Gadamer, Wahrheit und Methode, 1960. Arthur Kaufmann, Analogie und "Natur der Sache", 2. Aufl., 1982. Karl Larenz, Methodenlehre der Rechtswissenschaft, 6. Aufl., 1991.

Paul Ricoeur, Le conflit des interpretations, 1969.

Paul Ricoeur, Du texte a l'action: Essais d'hermeneutique II, 1986.
















월, 수, 금,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