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의 감옥과 자유: 김신 대법관의 침묵하는 문언주의

생각의 서고, 19화

by 소는영



0. ​서문: 법학관의 창가에서



​늦가을의 캠퍼스는 쓸쓸하다. 은행잎이 노랗게 질려 아스팔트 위로 투신할 때, 나는 연구실 창가에 서서 오래된 판결문 한 장을 넘긴다. 법학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차가운 이성을 가장한 뜨거운 욕망의 조율인가, 아니면 신이 남긴 침묵의 계시를 해독하는 고고학인가. 나는 오늘,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해 한 명의 고독한 수도승을 떠올린다. 법복을 입은 수도승, 김신 대법관이다.


​그는 문언(文言)주의자였다. 사람들이 '정의'와 '형평', '시대정신'이라는 화려한 수사로 법을 치장하려 할 때, 그는 묵묵히 법전의 활자 그 자체를 응시했다. 글자 밖으로 나가는 것을 죄악시했고, 글자 안에서만 자유를 찾으려 했다. 그 모습은 때로 답답하리만치 고집스러웠고, 때로는 서늘할 만큼 엄격했다. 나는 오늘 그의 궤적을 쫓으며, 그와 닮은 듯 다른 길을 걸었던 또 한 명의 텍스트 신봉자, 조희대 대법관의 그림자를 함께 겹쳐보려 한다. 이 글은 법학 논문의 탈을 쓴 나의 사적인 고백이자, 두 대법관이 활자의 숲에서 벌였던 치열한 사유의 기록이다.





​1. 문언(文言)이라는 이름의 미로



​우리는 흔히 법관을 '법의 입'이라고 부른다. 몽테스키외가 말한 그 수동적 존재로서의 법관 말이다. 그러나 현대의 사법(司法)은 그 겸손함을 잃은 지 오래다. 법관들은 법문에 숨결을 불어넣어 살아 움직이게 하고, 때로는 입법자가 상상조차 하지 못한 낯선 괴물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우리는 그것을 '법형성'이라 부르며 칭송하거나, '사법적극주의'라 부르며 경계한다.


​이 소란스러운 해석의 장터에서 김신 대법관은 유독 눈에 띄는 존재였다. 그는 법현실주의(Legal Realism)라는 거대한 파도에 맞서, 법실증주의(Legal Positivism)의 닻을 내리고 버텼다. 그에게 법은 '해석되어야 할 텍스트'가 아니라, '준수되어야 할 명령'이었다. 그 명령은 오직 문언이라는 그릇에 담겨 있었다.


그러나 문언주의(Textualism)라는 단어는 하나로 정의되기엔 너무나 복잡하다. 미국의 그로브(Grove) 교수가 지적했듯, 문언주의 안에도 여러 갈래가 있다. 단어의 의미론적 맥락에 천착하는 '형식주의적 문언주의'가 있는가 하면, 사회적 맥락까지 고려하는 '유연한 문언주의'도 존재한다. 나는 김신 대법관과 조희대 대법관의 판결들을 비교하며, 이 두 가지 문언주의가 한국의 대법원 전원합의체라는 무대 위에서 어떻게 충돌하고 화해했는지를 복기해보고자 한다.





​2. 동행(同行): 활자의 숲을 함께 걷다


​김신과 조희대. 두 사람은 2014년부터 2018년까지 대법원이라는 한 지붕 아래 머물렀다. 그들은 자주 같은 곳을 바라보았다. 그들이 공유한 시선은 '법적 안정성'이라는 견고한 성채였다.




​가. 약속은 지켜져야 한다. 변호사 보수 감액 사건


​2018년 5월, 대법원은 흥미로운 사건을 마주했다. 소송에서 패소한 의뢰인이 변호사에게 약정된 성공보수금을 주지 않으려 한 사건이었다. 다수의 대법관들은 민법 제2조의 '신의성실의 원칙(신의칙)'을 꺼내 들었다. 변호사 보수가 너무 과하다면, 신의칙과 형평의 관념에 따라 법원이 이를 감액할 수 있다는 논리였다. 이는 구체적 타당성을 중시하는 전형적인 법현실주의적 태도였다.

​하지만 김신과 조희대, 두 대법관은 고개를 저었다. 그들의 별개의견은 서늘했다.


"민법은 반사회질서 행위나 불공정한 법률행위를 무효로 하는 규정을 따로 두고 있다. 신의칙은 권리 행사와 의무 이행의 방법일 뿐, 계약 자체를 무효로 만들 수 있는 도깨비 방망이가 아니다."


​이 문장은 법학도인 나에게 전율을 일으킨다. 그들은 헌법상 사적 자치의 원칙과 시장경제 질서를 방패로 삼아, 법원이 자의적인 잣대(형평)로 개인 간의 계약에 개입하는 것을 거부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변호사가 돈을 너무 많이 받는다'는 감정적 호소가 아니라, '법률에 규정되지 않은 사유로 계약을 무효화할 수 있는가'라는 형식 논리였다. 여기서 두 사람의 문언주의는 완벽한 화음을 이루었다. 텍스트에 없는 권한을 행사하지 않겠다는, 사법권의 겸양이었다.



​나. 배임죄의 늪에서: 대물변제예약 사건


​형법의 세계로 넘어오면 그들의 문언주의는 더욱 날카로워진다. '타인의 사무를 처리하는 자'. 배임죄의 주체를 규정하는 이 문구는 한국 법조계의 오랜 골칫거리였다. 돈을 빌리며 부동산을 담보로 주기로 예약한 채무자가, 그 부동산을 다른 사람에게 팔아버렸을 때 배임죄가 성립하는가?


​기존 판례는 '그렇다'고 했다. 등기를 넘겨줄 의무는 채권자의 이익을 위한 것이니 '타인의 사무'라는 것이다. 하지만 김신과 조희대는 다수의견에 대한 보충의견을 통해 이 논리를 정면으로 반박했다.


"매도인이 등기를 넘겨주는 것은 자기의 계약상 의무를 이행하는 것일 뿐이다. 타인을 위해 협력한다고 해서 그것이 곧바로 타인의 사무가 되는가? 죄형법정주의는 유추해석과 확장해석을 금지한다. '타인의 사무'는 문언 그대로 타인의 일을 대신해주는 경우에 한정되어야 한다."

여기서 그들은 문언의 엄격한 해석을 통해 형벌권의 확장을 경계했다. 이는 법치주의의 보루인 죄형법정주의를 지키기 위한 투쟁이었다. 문언이 허용하는 범위를 넘어서는 처벌은, 그것이 아무리 나쁜 놈을 잡기 위한 것이라 해도 '법'이 아니라는 선언이었다.



​다. 1주는 7일인가, 5일인가: 휴일근로수당 사건


​하지만 두 사람의 동행 속에서도 미세한 균열은 감지되었다. 2018년 휴일근로 중복 할증 사건에서 그 균열의 조짐이 보인다. 근로기준법상 '1주'에 휴일이 포함되는가? 다수의견은 입법 연혁과 노사 관행을 들어 휴일은 1주(평일 5일)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그래야 휴일근로가 연장근로 한도에 포함되지 않아, 당시의 장시간 노동 관행을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김신과 조희대는 반대했다. "1주는 당연히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7일이다." 너무나 자명한 문언적 해석이었다. 그러나 김신 대법관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독자적인 보충의견을 냈다.


"설령 개정된 근로기준법이 이 해석과 충돌할지라도, 구법의 문언이 명백하다면 입법 취지나 정치적 타협을 고려해 정당한 법해석을 포기할 수 없다"


그는 일갈했다. 그는 문언이 명료할 때, 그 어떤 외부적 고려도 배격했다. 조희대 대법관이 침묵할 때, 김신 대법관은 펜을 꺾지 않고 끝까지 문언의 순수성을 옹호했다.






​3. 이로(異路): 갈라지는 길



​두 대법관이 항상 같은 길을 걸은 것은 아니다. 문언주의라는 지도를 손에 쥐고 있었지만, 그들이 도달한 목적지는 종종 달랐다. 그리고 그 차이는 그들이 텍스트 너머의 무엇을 보고 있었는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가. 땅 위의 비행기: 항공기 회항 사건


​일명 '땅콩 회항' 사건. 2017년 대법원은 항공보안법상 '항로'의 의미를 두고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비행기가 이륙하기 전 지상에서 이동한 경로가 '항로'에 해당하는가? 김신 대법관(다수의견)은 국어사전을 펼쳤다.


"'항로'의 사전적 의미는 항공기가 다니는 공중의 길(空路)이다. 지상의 길을 항로라고 부르는 것은 문언의 가능한 의미를 벗어난다."


그는 텍스트의 사전적 정의라는 성벽 안에 머물렀다. 피고인의 행위가 아무리 괘씸해도, 법문에 없는 죄를 물을 수는 없다는 죄형법정주의의 엄격함이었다.


​반면, 조희대 대법관(반대의견)은 성벽 밖으로 나갔다. 그는 '항(航)'자의 한자 뜻풀이까지 동원했다.


"배나 비행기가 다니는 길이라면 땅이든 하늘이든 무슨 상관인가. 법의 목적은 항공기의 안전 운항이다."


그는 문언을 확장했다. 텍스트의 문자적 의미보다 텍스트가 달성하고자 하는 목적과 체계를 중시한 '유연한 문언주의'였다. 여기서 김신의 문언주의가 '형식'에 갇혀 있었다면, 조희대의 문언주의는 '가치'를 향해 열려 있었다.



​나. 국가의 침묵은 동의인가: 조합설립 동의 사건


​재건축조합을 설립할 때 국공유지가 포함된 경우, 국가나 지자체의 동의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2014년 판결에서 조희대 대법관(다수의견)은 "국가가 명시적으로 반대하지 않으면 동의한 것으로 간주하자"고 했다. 사업 추진의 효율성과 공익을 고려한 지극히 현실적인 판단이었다.


​그러나 김신 대법관(반대의견)은 격분했다.


"법 어디에 침묵을 동의로 간주한다는 규정이 있는가? 법률은 서면에 의한 동의를 요구한다. 국가는 특권 계급이 아니다. 국가도 사인(私人)과 똑같이 도장을 찍어야 한다."


그에게 '구체적 타당성'이라는 명분은 법률의 문언을 파괴하는 핑계에 불과했다. 그는 효율성이라는 이름으로 법의 형식이 무너지는 것을 견딜 수 없었다. 이 지점에서 김신 대법관의 문언주의는 타협을 모르는 깐깐한 훈장님의 회초리 같았다.



​다. 노조의 변신: 산별노조 조직변경 사건


​산업별 노조의 지회가 기업별 노조로 조직 형태를 변경할 수 있는가? 이는 노동계의 지각변동을 일으킬 수 있는 거대한 쟁점이었다. 조희대 대법관(다수의견)은 결사의 자유와 헌법적 가치를 들어 이를 허용했다. 실질적으로 독립된 단체라면 조직 변경의 자유가 있다는 법원리적 해석이었다.


하지만 김신 대법관(반대의견)은 노동조합법 제16조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법은 노동조합만이 조직 변경의 주체가 될 수 있다고 규정한다. 지회는 노조가 아니다. 법적 근거가 없다."


그는 더 나아가 보충의견을 통해 입법자의 의도를 묻는다.


"입법자가 지회의 독자적 변경을 허용하려 했다면 명시했을 것이다. 그것이 입법 기술상 어려운 일도 아니다."


그는 입법부의 침묵을 함부로 해석하여 사법부가 입법 행위를 하는 것을 경계했다. 삼권분립에 대한 그의 철저한 신념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4. 김신의 초상(肖像): 가치중립적 문언주의



​그렇다면 김신 대법관의 문언주의는 어떤 색깔인가? 나는 그것을 '가치중립적 문언중심주의'라 명명하고 싶다.


​그는 무색무취하다. 변호사 보수 사건이나 대물변제예약 사건에서는 시장의 자유를 옹호하는 보수적인 결론처럼 보인다. 하지만 휴일근로수당 사건에서는 노동자에게 유리한 진보적인 결론을 냈다(비록 소수의견이었지만). 그가 진보적이어서, 혹은 보수적이어서 그런 결론을 내린 것이 아니다. 그저 텍스트가 그곳을 가리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판결에는 서사가 없다. 오직 구조만이 존재한다. 그는 법률이 보수적이면 보수적으로, 진보적이면 진보적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것이 민주주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선출되지 않은 권력인 법관이 자신의 가치관을 법 해석에 투영하는 순간, 법치는 무너지고 사법 독재가 시작된다는 공포. 그것이 김신을 활자의 감옥 안에 스스로를 가두게 만든 동력이었다.





​5. 조희대의 초상(肖像): 가치지향적 문언주의


​반면 조희대 대법관의 문언주의는 색채가 뚜렷하다. 나는 이를 '가치지향적 문언중심주의'라 부른다.


그는 문언을 존중하지만, 문언에 갇히지는 않는다. 그에게 문언은 목적을 향해 건너가는 징검다리다. 그 목적은 무엇인가? 판결들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공동체', '질서', '안전', 그리고 '상생'이다. 이는 다분히 보수적인 가치들이다.


​항공기 회항 사건에서 그는 '엄벌'이라는 가치를 위해 문언을 확장했다. 조합설립 동의 사건에서는 '사업의 원활한 진행'이라는 공익을 위해 문언을 축소했다. 배임죄의 손해 개념을 논할 때(2017도1104), 그는 김신 대법관처럼 엄격한 경제적 손해만을 고집하지 않고 법률적 위험까지 손해로 포섭했다. 이는 기업 비리에 대한 엄단이라는 사회적 요구에 부응하는 해석이었다.




​6. 결론: 두 개의 거울이 비추는 풍경



​김신과 조희대. 두 대법관은 모두 문언주의라는 배를 타고 법의 바다를 항해했다. 그러나 김신에게 문언주의는 결코 놓을 수 없는 '닻'이었고, 조희대에게는 목적지를 향해 조정할 수 있는 '키'였다.


​김신 대법관의 법학은 기하학이다. 점과 선이 만나 도형을 이루듯, 문언과 문언이 만나 결론을 도출한다. 그 과정에 해석자의 감정이나 외부의 풍경이 개입할 틈은 없다. 그는 자신의 판결이 '차가운 피'를 가졌다는 비판을 감수하면서도, 입법권에 대한 존중과 사법권의 절제라는 헌법적 가치를 수호하려 했다. 그는 스스로를 지움으로써 법을 드러내려 했다.


반면 조희대 대법관의 법학은 건축학이다. 문언이라는 벽돌을 쌓되, 그 안에 사람이 살 수 있는 공간을 만들려 한다. 그는 문언의 견고함을 유지하면서도, 그 안에 시대의 공기와 공동체의 온기를 불어넣으려 했다. 그의 판결은 때로 문언의 경계를 넘나드는 위태로움을 보였지만, 그 끝에는 항상 '해결'이라는 안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누가 옳은가? 이 질문은 어리석다. 법학에는 정답이 없다. 다만 서로 다른 해답을 향한 치열한 고뇌만이 있을 뿐이다.


오늘날 대법원의 판결들은 점점 더 화려한 수사학으로 치장되고 있다. '정의'와 '사랑', '인권'이라는 거대 담론들이 판결문을 가득 채운다. 그러나 나는 가끔 김신 대법관의 그 건조하고 딱딱한 판결문이 그립다.


"법에 그렇게 써 있다."

그 한 마디가 주는 서늘한 공포와, 역설적으로 그 한 마디가 보장해주는 확실한 자유가 그립다.


​김신 대법관은 자신의 신념이 진보적이든 보수적이든 상관없이, 법이 명하는 대로만 판결했다. 그는 약자를 사랑했지만, 법이 약자를 보호하지 않을 때 법을 억지로 비틀어 약자를 구하려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침묵으로 웅변했다.


"이 법이 잘못되었다면, 국회가 고쳐라. 나는 판사이지 입법자가 아니다."


이 지독한 금욕주의. 이것이야말로 김신 대법관이 우리 법학계에 남긴 가장 거대한 유산이 아닐까.


​창밖의 은행잎이 이제 다 떨어졌다. 앙상한 가지가 드러난 나무는 마치 법전의 활자들처럼 검고 뚜렷하다. 겨울이 오고 있다. 문언의 겨울이, 혹은 해석의 봄이 오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책상을 정리하며, 다시 한번 김신 대법관의 판결문을, 그 정직한 활자의 감옥을 어루만져 본다. 그 감옥 안에서 비로소 자유로웠던 한 법관의 영혼을 기리며.




참고문헌(參考文獻)



서영수, 《어떤 문언주의인가?: 김신 대법관의 문언주의적 법해석론 - 조희대 대법관과의 비교를 중심으로》 , 서울대학교 법학연구소 법이론연구센터,『기초법학연구』 제1호, 2022. 5., 45-94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