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고지기의 생각, 제9면
이상한 나라의 법감정(Rechtsgefühl) 해부학
누군가의 생각으로 보인다.
종이를 편다.
읽다.
어떤 판결문을 읽다가 손이 떨린 적이 있다. 법리적으로는 흠이 없었다. 논리의 사슬은 촘촘했고, 법조문의 인용은 정확했다. 그런데 무언가가 틀렸다. 정확히 말하면, 무언가가 빠져 있었다. 그 빈자리에는 이름도 없고 조항 번호도 없는, 그러나 분명히 실재하는 어떤 것—흔히 '법감정(Rechtsgefühl)'이라 부르는 것—이 있었다.
법감정은 대중의 분노인가, 아니면 정의의 원천인가. 그것은 법치주의의 토대를 허무는 감정적 충동인가, 아니면 굳어버린 법조문이 살아있는 현실을 따라잡지 못할 때 그 균열을 메우는 촉매제인가. 이 글은 그 물음에 답하려는 시도이지만, 명쾌한 답을 약속하지는 않는다. 법감정의 본질이 바로 그 모호함 속에 있기 때문이다.
19세기 독일의 법학자 루돌프 폰 예링(Rudolf von Jhering)은 『권리를 위한 투쟁(Der Kampf ums Recht)』에서 법감정을 단순한 불쾌감으로 환원하기를 거부했다. 그에게 법감정은 권리가 침해당했을 때 인격 자체가 부정당했다는 도덕적 고통이었고, 그에 맞서 저항하는 능동적 에너지였다. 법은 저절로 형성되지 않는다. 분노하고, 싸우고, 포기하지 않는 개인들의 투쟁이 법을 만든다.
예링은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의 소설 『미하엘 콜하스』를 불러낸다. 말 떼를 부당하게 빼앗긴 주인공 콜하스는 법적 구제를 시도하지만 부패한 관료들에게 가로막히고, 마침내 스스로 칼을 든다.
예링은 이 반란을 단순한 복수가 아니라 '도덕적 자기 보존 본능'이라고 읽었다. 짓밟힌 권리를 되찾음으로써 손상된 인격을 복구하려는 몸부림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예링의 콜하스는 동시에 경고다. 정의를 향한 선의가 절차를 무시하는 순간, 또 다른 폭력이 된다. 법감정이 '엔진'이 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제어되지 않으면 '폭주 기관차'가 된다. 이 역설이 법감정 논의의 출발점이다.
한스 켈젠(Hans Kelsen)은 예링의 열기에 찬물을 끼얹은 사람이다. 그의 '순수법학(Reine Rechtslehre)'은 법을 도덕·정치·심리로부터 철저히 분리하려는 기획이었다.
켈젠에게 법은 'A가 발생하면 B라는 강제 조치를 취하라'는 당위(Sollen)의 위계적 집합이다. 그 체계 안에서 대중이 어떤 감정을 느끼는가는 법학의 연구 대상이 아니다. 정의(Justice)조차 학문적으로 검증 불가능한 '비이성적 이상'에 불과하다.
켈젠의 엄격함에는 역설적이게도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 숨어 있다. 법이 '민족정신'이나 '정치적 결단' 같은 모호한 감정에 휘둘릴 때 나치즘 같은 전체주의로 미끄러질 수 있다는 공포가 그를 형식주의자로 만들었다. '지도자의 명령이 곧 법이다'라는 선동에 맞서기 위해, 법을 누구나 객관적으로 확인 가능한 구조물로 만들려 한 것이다.
그러나 켈젠식의 순수한 법 논리는 '개념의 천국(The Heaven of Juristic Concepts)'을 짓는다. 예링이 만년에 풍자했듯, 그 천국에는 현실의 고통도, 인간의 욕망도, 삶의 냄새도 없다. 오직 차가운 논리 기계만이 돌아간다. 법이 그 성곽 안에만 갇힐 때 어떤 일이 생기는지는 역사가 이미 증명해 왔다.
예링의 뜨거움과 켈젠의 차가움 사이에서, 현대 법철학은 다른 길을 모색한다. 에리히 페히너(Erich Fechner)는 법감정이 가족과 학교라는 공동체의 기본 단위에서 자란다고 보았다. '약속을 지켜야 한다', '잘못하면 책임을 진다'는 원초적 경험이 법감정의 뿌리라는 것이다. 법감정은 그러므로 일시적인 군중심리가 아니라 인간이 공동체를 살아내기 위해 갖추게 되는 '전형적으로 인간적인 것'이다.
구스타프 하이네만(Gustav Heinemann)은 여기서 '존재개방성(Seinsoffenheit)'이라는 개념을 꺼낸다. 법감정은 고정불변이 아니라 변화하는 사회 현실에 열려 있다. 과거에 당연시되던 가부장적 제도가 오늘날 부당하게 느껴지는 것처럼, 굳어진 법조문이 변화하는 삶을 따라잡지 못할 때 법감정은 그 틈새를 메우고 법의 진화를 이끄는 촉매가 된다.
마사 누스바움(Martha Nussbaum)은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그녀는 『사유의 격변(Upheavals of Thought)』에서 감정을 맹목적인 충동이 아닌 '인지적 판단(Cognitive Judgment)'으로 격상시킨다. 어떤 판결을 보며 '분노'를 느낀다면, 그것은 단순히 혈압이 오르는 생리적 현상이 아니다. '저 행위는 부당하며, 누군가에게 심각한 해를 끼쳤다'는 이성적 판단이 그 분노 안에 이미 들어 있다. 누스바움에게 법은 이 이성적 분노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
법학자 카를 엔기슈(Karl Engisch)가 말한 '사실과 규범 사이를 오가는 눈길(das Hin- und Herwandern des Blickes)'이 여기서 의미를 얻는다. 법관의 시선은 법전과 사건 현실 사이를 끊임없이 왕복해야 한다. 그 왕복 속에서 작동하는 직관적 판단력—그것이 법감정의 실체다.
법치주의의 과제는 법감정의 개혁가적 얼굴은 받아들이고, 폭도의 얼굴은 제어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세 가지가 필요하다.
법원이 현행법의 한계로 인해 정서와 괴리된 판결을 내릴 때 '입법적 해결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적극적으로 표명하는 제도, 국민참여재판의 확대를 통한 시민의 법감정 제도화, 그리고—가장 근본적으로—판결문이 전문가들의 암호문이 아닌 시민의 언어로 씌어지는 것. 법관이 자신의 고민을 시민에게 설명하고, 시민이 그 고민을 이해하는 순환 안에서 비로소 법감정은 '분노'에서 '신뢰'로 전환된다.
법전 속의 '인간(Person)'은 합리적이고 감정 없는 추상적 주체다. 그러나 법정에 서는 '사람(Human)'은 상처받고, 오열하고, 분노하는 구체적인 실존이다. 리얼리즘 소설이 독자에게 감동을 주는 것은 부조리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면서도 그 속에서 인간애를 잃지 않기 때문이다. 법도 그래야 한다. 차가운 이성의 뼈대 위에 따뜻한 공감의 살을 입혀야 한다.
법감정이란 무엇인가. 나의 답은 이것이다. 그것은 법이 인간의 얼굴을 하기를 바라는 멈추지 않는 기도다. 그 기도가 '떼법'이라는 이름으로 매도되지 않고, 건전한 입법과 사법의 에너지로 승화될 때, 우리 사회는 비로소 '법의 지배(Rule of Law)'를 넘어 '정의의 지배(Rule of Justice)'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예링은 말했다. "법의 목적은 평화이지만, 그 평화로 가는 수단은 투쟁이다." 오늘날 그 투쟁은 더 이상 칼과 창이 아닌, 깨어있는 시민들의 법감정과 성찰하는 법률가들의 지성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치열한 대화여야 한다. 그 대화가 계속되는 한, 법은 여전히 살아있다.
확인하였다
접다.
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