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아무 말 대잔치 06
올 겨울에도 어김없이 슈톨렌이 유행하는 모습이다.
제법 알려진 베이커리의 택배 판매는 개시 5분도 지나지 않아 마감되었고, 10차, 15차 슈톨렌 판매글 같은 것도 흔하게 보였다.
무엇이 슈톨렌을 크리스마스 시즌마다 챙겨 먹어야 하는 빵이 되게 만든 것일까?
환상을 품은 빵
이미지는 대개의 경우에 생각 이상으로 중요하다.
나는 카페를 운영하면서 그것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음식의 이미지, 공간의 이미지, 넓게는 브랜드의 이미지.
이미지는 비단 음식의 모양, 매장의 인테리어나 SNS 사진 정도의 시각적인 요소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고, 정말이지 많은 잠재력을 가졌는데, 이에 대해서도 언젠가 깊게 다루어 볼 수 있었으면 한다.
슈톨렌으로 돌아와 과연 이 빵이 가진 이미지가 무엇인지를 살펴보자.
마른 가지, 열매, 리본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케이스.
그 안에 1년 동안 술에 정성스레 숙성했다는 건과일, 견과류, 마지판 등이 듬뿍 들어간 빵이라는 설명과
크리스마스 인사, 슈톨렌 보관법을 자세히 적은 카드를 곁들여주는 포장.
하얀 슈가파우더가 감싸 마치 소복하게 눈이 내린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빵의 겉 부분과 동그랗게 박힌 마지판 주위로 과일과 견과류가 먹음직스럽게 보이는 큼지막한 단면.
그리고 생소한 이름의 향신료 등에서 느껴지는 이국적임.
마지막으로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며 얇게 썰어 한 조각씩 먹는다는 낭만적인 배경 스토리까지 곁들이면 겨울과 크리스마스에 이보다 더 잘 어울리는 디저트가 또 있을까 싶다.
물론 딸기 생크림 케이크는 예외로 하자.
나 또한 슈톨렌을 먹어보지 못했더라면 이 빵에 혹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슈톨렌을 먹어보면
하지만 실제로 슈톨렌은 그렇게까지 환상적인 맛을 가진 빵까지는 아닐 수도 있다.
일단 무척 달다는 사실에 놀랄 것이고,
(괜히 하루에 한 조각씩 먹는다는 게 아니다.)
여러 재료들의 풍미를 하나하나 느끼는 것도 평소에 많은 식재료를 접해본 사람이 아니라면 쉽지가 않으니 말이다.
부분 부분 곱씹어가며 꼼꼼하게 먹어보아야 하는데, 잘 바스러지고 여러 재료들이 섞인 상태의 슈톨렌에서 그것들을 캐치하기란 꽤나 어렵다.
아마 그냥 “이게 무슨 맛이지?” 하며 한번 먹어보았다는 사실 정도에 만족할지도 모른다.
또한 슈가파우더가 어마어마하게 날리는 이 빵을 얇게 자른 다음 다시 래핑하고 있노라면 위에서 말한 낭만은 더더욱 현실과는 거리가 멀어지게 된다.
어쩌다 보니 슈톨렌 안티가 된 듯 글을 적어나가고 있지만, 나는 솔직히 매년 슈톨렌을 먹으며 즐겁기도 하지만, 실망하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슈톨렌이 빵집마다의 특징을 느낄 수 있는 빵임은 확실하다.
제빵사분들의 많은 수고가 따르는 빵이기도 하고,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며 한 조각씩 까먹는 소소한 재미도 분명 있다.
다만 그것이 슈톨렌을 겨울에 이렇게까지 예약 전쟁을 치르며 먹어야 하는 빵으로 만들어주냐고 묻는다면 확실하게 “네”라고 대답을 해줄 수가 없다.
그래도 슈톨렌은 올바르다.
물론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슈톨렌 그냥 그래 라는 맥 빠지는 이야기는 아니다.
환상을 자극하는 작업은 그만큼 중요하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 이 글을 적게 되었다.
슈톨렌에서 시작했지만, 우리가 어떤 음식을 먹고 싶어 지거나, 어느 공간에 방문하고 싶어지는 이유는 뭘까?
바로 누군가의 추천 또는 글이나 사진 등을 받아들이며 무의식 중에 그것에 덧씌워 버린 이미지가 있기 때문이다.
슈톨렌은 겨울의 12월이, 펑펑 내리는 함박눈이, 크리스마스의 빨간 산타클로스의 선물이 가진 환상을 품었다.
코로나로 해외여행이 막히며 외국에 대한 갈증이 더 심해진 것도 한 몫할 것이고,
밖으로 나가는 대신 홈파티를 즐기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슈톨렌은 그럴 때 필요한 디저트로 자리를 잡았다.
만약 본인이 수고로움을 감수하고 찾아먹는 것에 익숙한 빵 마니아이고, 식재료에 관심이 많으며, 새로운 맛에 도전하는데 거부감이 없는 사람이라면 환상의 여부와 상관없이 슈톨렌을 빵집 별로 찾아먹어 보는 걸 추천한다.
실제로 슈톨렌에는 들어가는 많은 공정 속에서
매장마다의 개성과 베이커의 고민 그리고 노력의 흔적이 확연히 드러나니 말이다.
(예를 들자면 평창의 브레드 메밀에선 순메밀과 금강밀 베이스의 반죽에, 마지판 대신 보늬 밤을 넣어 만든 슈톨렌을 선보였고,
파이로 유명한 대전의 빵 한 모금에선 파이 반죽으로 겉을 감싼 슈톨렌을 내놓았다.)
슈톨렌에 대해 문득 떠오른 단상을 적어보았습니다.
언제나 그렇듯 제 말이 무조건 맞아 이런 뜻으로 적지는 않았고요.
제 생각에 슈톨렌만큼이나 환상을 품은 음료는 바로 와인이 아닐까 싶습니다.
특히 내추럴 와인이 유행을 탄 지도 벌써 몇 년이 지났죠.
저는 올해도 슈톨렌을 찾아먹고 있는데, 재미난 걸 발견했습니다.
바로 슈톨렌과 내추럴 와인의 페어링인데요.
논현동 꼼다비뛰드의 사장님께선 가볍게 이 와인이 슈톨렌이랑 먹어보니 맛있더라 정도의 느낌에서 와인을 들여놓으셨고,
잘 알려진 베이커리 카페인 어니언에서는 제대로 각 잡고 구성해 내어놓았습니다.
어니언의 슈톨렌에 무화과잼과 대구의 식료품 샵 모남희가 픽한 내추럴 레드 와인을 조합해 감각적인 패키징까지 곁들여서요.
바로 제가 이러한 페어링에 홀딱 빠진 사람입니다.
환상이 어쩌고 하더니 저마저도 실제로 이렇게 사고 있지 않습니까.
(이미지가 이렇게 중요해요.)
슈톨렌과 와인의 페어링이 어울렸냐고 물어본다면 저는 생각보다 좋았다고 대답할 거 같습니다.
저는 와인을 디저트에 곁들이는 걸 애초에 좋아하기도 하고, 내추럴 와인 특유의 쿰쿰함이 슈톨렌 특유의 물리는 맛을 제법 깔끔하게 잡아주기도 하더군요.
앞으로는 또 어떤 환상을 담은 빵과 디저트가 나타날까요?
개인적으로 슈톨렌과 더불어 이미지의 긍정적인 효과를 보여준 빵이 소금빵이라고 생각합니다.
둘 다 예전부터 있던 빵들인데 이렇듯 풀어내기에 따라 참 다르긴 다르구나 싶었습니다.
요식업에 종사하게 된 사람으로 왜 내가 먼저 앞서 나가지는 못하는 걸까 하는 아쉬움을 항상 느끼는 요즘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