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리 Dec 30. 2023

새 차를 살 때 내가 떠올리는 것들 3

우리는 과연 새 차를 살 수 있을까?

남편의 차는 낡았다. 정확히 몇 년 됐는지 모르지만 그걸 굳이 밝히지 않아도 모두가 충분히 느낄 수 있을 만큼 낡았다. 시트의 가죽 커버는 진작 해져 있고, 뒷좌석에 오래 앉아 있으면 등허리와 엉덩이가 딱딱하게 굳어져서 아프다. 오래된 경유 차라서 그런지 일 년 전쯤에는 시에서 ‘배출가스 5등급 운행 제한 차량’에 해당된다며 앞으로는 운행이 금지된 날에 운행하다가 적발되면 벌금을 물겠다는 안내장을 받은 일도 있었다. 그것은 ‘당신의 차는 환경에 해로운 영향을 끼치고 있으니 새 차를 사시오. 그렇지 않으면 앞으로 불편한 일이 생길 것이오.’라고 말하는 일종의 경고장이었다. 공문서 특유의 건조한 문체로 완곡하게 에둘러 쓰여있어도 속내는 뻔한 거였다.


그는 나보다 더 심하게 소비에 있어 보수적이며 확고한 경제관념을 가지고 있다. 일례로 그에게 옷은 그저 신체를 외부의 위험과 사생활 침해로부터 보호해 주고 활동하기에 불편하지만 않으면 무엇이든 상관할 바가 아니다. 그 옷이 이미 오래전에 한물간 유행을 따르고 있는 바람에 인터넷에서 떠돌아다니는 웃기는 밈 속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런 우스꽝스러운 행색을 하고 있다고 해도. 심지어 바지의 엉덩이 윗부분에 “Everything You Desire”라는 의심스러운 문구가 있는데 도대체 이것이 누구를 위한 디자인인가, 아마도 이 문구를 새겨 넣은 사람은 뭔가 멋진 문구라고 생각해서 넣었으리라 짐작되지만, 남성복 바지 엉덩이 위쪽이라는 그 문구의 위치와 의미(“당신이 원하는 모든 것”이라니! 나한테만 그렇게 읽히는 건 아니겠지…….)의 조합으로 인해 뿌리 깊게 자리 잡은 우리의 이성애중심사회에서 의도치 않게(의도였을 수도 있겠지만) 대단히 급진적인 디자인으로 해석될 가능성을 발견하고 웃음이 터지는 이 문구를 봐도 아무렇지 않은 사람이다.(이 외에도 그의 지나칠 정도로 검소한 경제관을 뒷받침해 줄 증거들은 차고 넘치지만, 여기까지만 하겠다.)


놀랍지 않게도 그는 차에 있어서도 매우 확고한 가치관을 갖고 있었는데, 차는 멀쩡하게 잘 굴러가기만 하면 되는 거였다. 그 차가 얼마나 오래되었든, 시에서 경고를 날리든, 그것은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겨버렸다. 여름에 에어컨이 시원하게 나오지 않는 것이다. 여름 내내 카이런은 지하 주차장에 처박혀 있고 내 스파크만 주야장천 타고 다니는 일이 자연스럽게 느껴질 때쯤, 내가 그에게 물었다.

“에어컨도 안 나오는데, 이제 카이런은 그만 버리고 새 차를 사는 게 좋지 않을까?”

그는 내 말에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멀쩡히 잘 굴러가는 차를 뭣하러 버리고 새 차를 사야 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음. 정말 그 다운 대답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가 정말로 새 차를 샀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시에서 보낸 경고장이 문득 떠올랐다.

“저번에 시에서 배출가스 5등급 운행 제한 차량이라고 무슨 경고 같은 거 왔잖아. 앞으로 그런 걸 일일이 신경 쓰면서 타고 다녀야 할 텐데 너무 불편하지 않겠어? 시에서도 이제 카이런을 그만 타는 게 좋겠다고 말하는 거잖아.”

그는 배출가스 5등급 운행 제한인 날이 일 년 중에 며칠 되지 않는다면서, 그날만 피해서 운전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했다. 그날을 체크하는 일도 그리 번거롭지 않다는 말도 덧붙였다. 음. 역시 그를 설득하기는 쉽지 않다. 그럴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그로부터 몇 년이 흘렀다. 그 사이에 무슨 변화가 있었는지 그는 새 차를 알아보겠다고 했다. 처음에는 무조건 큰 차가 좋다며 기아의 카니발을 사야겠다고 침이 마르게 이야기했다. 나는 그 차가 너무 커서 골목길 주행이나 주차할 때 불편하지 않을까 걱정된다고, 약간 회의적인 태도로 반응했지만 그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차는 무조건 큰 것이 좋다고 했다. 우리는 어른 둘에 아이 둘로 구성된 4인 가족이니까 그렇게까지 큰 차가 필요할 일이 많지는 않을 것 같다고 했지만, 그는 큰 차가 필요할 일이 많지 않더라도 가끔은 필요할 때가 있을 거라며 그때는 그게 아주 좋은 선택이 될 거라고 응수했다. 이유야 얼마든지 갖다 붙일 수 있었고 그는 카니발에 꽂혀 있었다. 그래도 차를 새로 사겠다고 결심한 게 어디야. 나는 적어도 에어컨이 나오는 차를 탈 수 있다는 사실로 만족하기로 했다. 그래. 카니발을 사자.     

 며칠 뒤 그가 볼멘소리를 냈다. 전기차가 앞으로의 대세가 될 것 같은 조짐이 시작되었는데도 카니발은 여전히 휘발유 차만 판매하고 있다는 거였다. 언젠가 전기차 판매가 시작될지도 모르지만 지금으로서는 그게 언제가 될지 알 수 없었다.

“꼭 전기차를 사야 해? 그냥 휘발유 차 사면 안 돼? 문제 될 것 없잖아.”

나의 대꾸에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이제 대세는 전기차가 될 텐데, 지금 휘발유 차를 사는 건 너무 아쉬울 것 같아. 기왕 차 사는 거, 차는 한번 사면 오랫동안 타는데 한두 푼도 아니고 미래를 생각해서 좋은 걸로 사고 싶어.”

네, 그러십시다. 뭐라고 대꾸할 말이 없어서 내키지 않았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해서 카니발 전기차가 출시될 때까지 우리의 새 차 구입은 무기한 연기되었다.





*다음 글에 이어집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새 차를 살 때 내가 떠올리는 것들 2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