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의 양 극단에서 갈등하는 인간이라는 존재

느릅나무 밑의 욕망_유진 오닐

by 휴식시간

느릅나무 밑의 욕망은 유진 오닐이 1924년에 발표한 희곡이다. 미국 현대 희곡의 아버지인 유진 오닐은 발표하는 작품마다 화제를 일으켰다. 그의 작품은 대개 그의 불행한 삶이 반영 되듯 비극적이고, 유럽의 표현주의를 미국에 정착시켰으며 작품마다 희곡의 형식적 실험을 시도했다. 1936년에는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고, 1956년에는 그의 최고작 중 하나인 '밤으로의 긴 여로'를 통해 퓰리처상까지 받았다.


느릅나무 밑의 욕망은 순수한 욕망을 상징하는 농가와 이를 제어하려는 느릅나무 사이의 갈등을 보여준다. 그의 작품 전반에 나타나는 '정신 분석학적 시선'에서 보면 이드와 초자아의 갈등이며, 극 중 인물로 따지면 비도덕적이고 동물적인 애비와 신실하고 엄격한 캐벗의 갈등이다. 그리고 극은 양 극단 사이에서 혼란스러워 하는 인간적인 존재, 이븐의 시점을 중심으로 극을 전개된다. 애비와 캐벗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고, 왜 그런지 명확하게 알고 있는 반면, 이븐은 두 선택지를 두고 혼란스러워하며 쉽사리 선택을 내리지 못한다. 이러한 모습은 욕망을 다스리고자 하면서도 항상 흔들리는 인간이란 존재의 조건에서 비롯된 내적 갈등을 보여준다.


느릅나무 아래의 욕망이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작가는 욕망이라는 개념을 전면에 내세운다. 이것은 어떤 대상을 가지고 싶은 마음 혹은 특정 목적 이루고 싶은 마음이다. 작가는 본격적인 이야기를 전개하기 전에 공간을 인간에 비유하여 묘사한다. 한 농가 양쪽에 심어진 느릅나무의 가지들이 지붕 위로 늘어뜨려져 있다. 그런데 그냥 덮고 있는 것이 아니라 ‘보호하면서 동시에 압도하려는 듯한 모습’으로 ‘농가를 억압하듯이 덮고 있다.’ 그 모습에서 ‘사악한 모성’과 ‘지친 여인’의 이미지가 비춰진다. 마치 농가는 인간의 내면, 느릅나무의 줄기는 팔, 가지들은 손가락처럼 보인다. 돌담 내부에 있는 농가와 느릅나무의 전체적인 이미지를 거리를 두고 떨어져서 본다면, 이것은 팔을 명치 쪽으로 모으로 손바닥을 아래로 향한 채 손가락을 벌리고 있는 인간처럼 느껴진다.


욕망은 농가와 동일시된다. 즉, 농가는 욕망의 공간이다. 보통 욕망은 인간의 무의식 아래에 있어 일상생활에서는 쉽게 알아차리기 어렵다. 이를 본능이라고도 하며 사회화 과정에서 억눌려 평소에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래서 욕망의 이미지를 표현할 때 대저택의 지하공간, 물 속에 잠긴 빙산의 아래 부분처럼 우리가 지상에서는 잘 볼 수 없는 것으로 묘사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여기서 욕망은 지상 위에 당당히 솟아 있어 명료하게 드러난다. 극 중 모든 인물들은 자신의 욕망을 말과 행동으로 가감없이 드러내며 표현한다. 이븐과 애비, 캐벗은 말 할 것도 없고 잠시 나오는 보완관조차 “정말 좋은 농장이야. 내 거라면 좋을 텐데”라고 말한다.


그러나 느릅나무는 농가를 보호하면서 동시에 억압하고 있다. 즉, 욕망을 타이르면서 동시에 억누르고 있다. 그래서 극의 초반 일출 때 느릅나무의 초록색은 빛이 나지만 집은 여전히 ‘창백하고 바랜 듯한 모습으로 어둠 속에 있다.’ 욕망은 기본 전제로서 극에 전면으로 드러난다. 다만 그 속에는 여전히 터져 나오지 않은 무언가가 있다. 시미엇과 피터가 캘리포니아의 황금을 꿈꾸고 이븐이 농가를 다 차지하겠다고 외칠 당시엔 느릅나무에 의해 제어되는, 평범한 욕망에 불과하다. 무의식 속을 흐르는, 순수한 욕망은 애비가 등장하고 나서 표면 밖으로 고개를 들이밀기 시작한다. 이븐은 이것을 억누르기 위해서 고군분투한다.


모든 인물들은 저마다 욕망을 표현한다. 특히 물질적인 욕망은 모두에게 내재 되어있다. 그러나 욕망이 나타나는 양상은 다르다. 우선 욕망의 크기와 방향을 기준으로 크게 둘로 구분할 수 있다. 시미엇, 피터, 그리고 캐벗, 이븐, 애비로 가능하다. 시미엇과 피터는 보통 사람의 욕망을 지녔으며 농가에만 집착하지 않고 다른 인물들보다 시야가 넓다. 그들은 돈에 대한 갈망이 있으나 적절한 기준을 갖고 있다. 1부 2장에서 캐벗이 죽은 이후 농장에 대한 몫을 두고 이븐과 대화할 때, 농장 전체가 자신의 것이라고 하는 이븐과 달리 시미엇과 피터는 자신의 몫은 전체 농장의 3분의 2라고 말한다. 이븐보다 나이도 많고 농장을 일구는데 훨씬 기여를 많이 했음에도, 몫의 배분을 평등하게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농장에 대한 탐욕을 가감없이 드러내는 이븐에게 맞서기 보다 그에게서 필요한 돈을 받고 서부로 떠난다. 여기에는 단순히 황금을 캐내기 위한 탐욕만 내재된 것이 아니라, ‘돌담에 갇힌 노예 노릇’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싶은’ 희망도 포함되어 있다. 떠나기 전에 그들이 일에서 손을 때고 술을 마실 때 마냥 즐기지 못하고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은 체화 된 노예처럼 보인다. 이것을 자신들도 알기 때문에 족쇄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것이다. 시미엇과 피터는 신체적으로 강인하고 동맹관계를 맺고 있기에 농가를 탐할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고 떠났다. 그들은 다른 인물들과 달리 물질적인 가치와 정신적인 가치를 조화롭게 중시했기 때문이다.


시미엇과 피터가 떠나기 전까지는 캐벗과 이븐은 거의 동일한 인물처럼 보인다. 1부 2장에서 이븐이 미니를 만나러 갈 때와 1부 4장에서 이븐이 탐욕을 부릴 때, 시미엇과 피터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아버지를 꼭 닮았어. 판에 박았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들 눈에는 둘 다 탐욕스러운 인간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이븐이 자신은 캐벗의 아들이 아니라고 스스로 부정하면서 그를 증오하는 모습을 보면, 싫어하는 사람과 닮았다는 사실을 거부하려고 발버둥치는 것 같다. 실제로 그와 닮지 않았다고 스스로 생각한다면 이렇게 발버둥칠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닮기 싫은 사람과 닮았다는 사실은 고통스럽다. 분명 시미엇, 피터 그리고 캐벗 중에서 이븐은 후자에 가깝다. 캐벗과 이븐은 ‘농가의 모든 것’을 자신이 소유하길 원한다.


그러나 애비와 이븐이 서로 끌리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들의 경계는 새롭게 구획되기 시작된다. 이는 강렬한 욕망의 근원이 어디에서 비롯되는가에 따라 세분화된다. 이것은 캐벗과 애비가 욕망을 표현하는 방식과 이븐이 양 극단으로 대표되는 둘 사이에서 방황하는 과정을 통해 이뤄진다. 둘은 각각 다른 형태의 욕망을 갖고 있다. 캐벗과 애비는 욕망하는 대상과 그 이유가 명확하며 이것의 당위성에 대해서 고민하지 않는다. 다만 둘은 다른 형태의 욕망, 각각 내적이고 순수한 욕망과 의식적이고 엄격한 욕망을 품고 있다. 반면 이븐은 내면에 흐르는 순수한 욕망을 의식적으로 거부한다. 자신의 욕망이 넘칠 때마다 이를 억누르면서 오히려 마음과 정반대의 말을 강하게 내뱉는다. 단, 이런 의식의 근거가 캐벗과 달리 엄마의 권리를 지키고자 하는 신념에 있다.


캐벗의 욕망은 전적으로 하나님에 의해 관리된다. 감정과 물질적인 욕구, 그리고 생각까지도 통제된다. 시미엇과 피터가 자신을 능멸하고 떠난 뒤 분노를 다스리기 위해 하나님에게 기도를 하고, 물질을 쫓아 서부로 떠나던 자신에게 “이건 아무 소용없다. 집으로 돌아가라”고 외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발걸음을 돌린다. 그리고 아무것도 없던 땅에 돌담을 쌓고 농지를 일구고 결혼을 했다고 밝히는데, 이것은 모두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 손에 사로잡힌 종”으로서 한 것이다. 즉, 캐벗에게 이 농가는 하나님의 의도를 온전히 반영한 공간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과 똑같은 혈육’이 아니라면 이 농가를 넘겨줄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물질적 대상이 아니라 정신적인 가치를 실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애비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려고 한다. 젊은 여자에 대한 색욕 때문이 아니다. 실제로 그는 색욕을 극도로 거부하는 것을 넘어 이해 자체를 하지 못하는 것 같다. 3부 1장에서 마을 사람들은 직접 보지 않고도 애비와 이븐의 불륜을 확신하고 있는데, 캐벗은 끝까지 모르고 있다가 마지막에 직접 목격하고 나서야 알게 된다. ‘간음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를 전적으로 통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그의 유일한 인간적인 면모는 외로워서 결혼을 한다는 점에 있다. 이것을 금지하는 교리가 없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긴 하지만, 그의 감정을 하나님이 아닌 인간에게서 위안받고 싶어 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그러나 그의 유일한 ‘인간적인 소망’은 번번히 실패한다. 그래서 세번째 결혼이 끝나고 그는 하나님에게 더욱 의지한다. 충격에 휩싸여 슬프게 투덜거리다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도 강하고 외로운 분이야”라고 외친다. 이제 외로움은 인간에게서 해소되어야 하는 감정이 아닌, 하나님처럼 안고 살아가야 하는 것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반면 애비는 본능에 따라 욕망을 온전히 표현한다. 이븐과의 첫만남부터 끌림을 느끼고 그를 유혹한다. 처음에는 물질적인 욕망 때문에 그런 것처럼 보이지만 점점 사랑의 형태로 변화한다. 자신을 버리고 미니를 만나러 간 이븐에게 강한 질투심을 느끼고, 자신을 원하지만 자꾸만 밀쳐 내는 이븐을 끈질기게 설득하여 사랑을 나눈 뒤에는 비공식적이지만 본격적인 연인이 된다. 그에 대한 집착과 사랑을 얻어 내기 위한 노력이 다소 비정상적인 것처럼 보이기는 하나, 그 기저에는 분명 애정이 깔려 있다. 그리고 3부에서 애비는 자신의 거짓말 때문에 돌아선 이븐의 마음을 붙잡기 위해 둘 사이에 낳은 아이를 죽이기 까지 한다. 그리고 자신이 무슨 짓을 한지 제대로 자각하지 못한 채, “이븐, 해냈어! 할 거라고 말했잖아! 당신을 그 무엇보다 사랑한다는 것을 증명했어. 이제 더 이상 나를 의심하지 못하도록”이라고 흥분하며 외친다. 사랑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는 외침은 순수한 것처럼 보인다. 어떤 외부 요인-도덕, 신-도 개입되지 않은 욕망의 형태로서 말이다.


이븐의 내적 욕망은 애비와 거의 같다. 그러나 어머니를 떠올림으로써 이것을 의식적으로 거부한다. 내적 욕망과 의식 간의 갈등 양상은 크게 두가지로 나눌 수 있다. 우선, 애비와의 사랑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갈등이다. 이븐과 애비는 순수한 욕망을 지녔다. 이것을 무의식적으로 알아 챈 둘은 첫만남부터 서로에게 심적으로, 육체적으로 끌린다. 2부 1장 초반에는 시각적, 청각적 신호가 거의 없음에도 애비는 이븐의 움직임을 감지하고 이븐도 그녀의 존재를 느낀다. 2부 2장에서는 벽을 사이에 두고 각자 방에 있는 애비와 이븐이 서로 뜨겁게 응시하며 강한 긴장감을 만들어내는데, 둘은 서로 보고 들을 수 없어도 상대를 느낄 수 있는 것 같다. 애비는 이런 끌림을 인정하고 이븐을 유혹하며 손을 내민다. 그러나 이븐은 오히려 끌리기 때문에 이를 거부하기 위해서 애비에게 상처를 주고 혼자 있을 땐 자해에 가까운 행동을 한다. 2부 1장에서 자신을 다 아는 것처럼 말하는 애비에게 “집에 대한 엄마의 권리를 위해 당신과 싸우고 있다”, “미니가 당신보다 예쁘다”고 말하며 화를 내고 빈정댄다. 전자는 의식적 다짐이고 후자는 진심을 감추기 위한 말이다. 내적 갈등은 점차 심화되는데 2부 2장에선 이븐이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향해 팔을 뻗고 정신을 차린 뒤에 스스로 욕을 내뱉으며 침대에 몸을 내던져 엎드리는’ 모습에서 잘 드러난다. 이는 금욕을 위해 다리 사이를 날카로운 것으로 찌르는 남자의 모습과도 같다. 그러나 자신의 방에 찾아온 애비를 보고 이븐은 마음을 서서히 인정하게 된다. 이어진 장에서 둘은 이븐의 엄마 방으로 들어가는데, 이븐은 처음엔 방에서 느껴지는 엄마의 영혼때문에 혼란스러워 한다. 애비는 그런 이븐을 엄마처럼 타일러주고 이븐은 그녀를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애비와 성관계를 맺은 뒤에 “엄마는 무덤으로 돌아갔어. 이제 편히 잠들 수 있어”라고 말하며, 자신의 욕망을 제한하는 기제가 사라졌음을 선언한다. 이때부터 욕망은 느릅나무의 제약으로부터 벗어나 마음껏 분출하며, 결국에는 극단적인 결론에까지 이르게 된다.


그리고 애비가 아이를 죽였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이븐은 다시 한번 갈림길을 마주하며 내적 갈등을 겪는다. 자신의 아이를 죽인 애비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애비가 죽인 사람이 캐벗이라고 오해했을 땐 충격에서 벗어나려고 애쓰고 “술 취해서 죽은 것처럼 보이도록 빨리 손을 써야 돼”라고 말하며 애비를 도우려 한다. 즉, 살인 자체는 덮고 넘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죽은 사람이 자신의 아이라는 사실이 밝혀졌을 땐, 경악과 공포에 휩싸여 다시 엄마를 찾으며 “왜 막지 않았어요?”라고 묻는다. 그러나 이미 사라진 엄마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분노에 차서 뛰쳐나가 보안관에게 애비를 신고하지만, 다시 돌아와서는 그녀에게 용서를 구하고 눈물 어린 사랑을 고백한다. 자신의 아이를 살해한 여자를 심판해야 하냐 용서해야 하냐의 갈림길에서 처음엔 의무를 선택했다가 결국엔 마음을 선택한 것이다. 그리고 법에 따른 죄값을 함께 나눠서 받겠다는 의지를 드러낸다. 그런데 이것은 죄에 대한 뉘우침이나 신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서부로 가면 밤낮 당신 생각으로 더 고통스러울”까봐 그리고 “당신과 함께 라면 전혀 외롭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께 빌지 않고’ 보안관에게 잡혀가는 와중에도 서로 사랑한다고 말하며 키스를 한다.


양 극단의 갈등은 결국 욕망의 승리로 끝이 난다. 유혹에 흔들리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깊이 빠져들다가, 넘어서는 안 되는 선을 넘어선 순간 제약은 사라지고 그 결과 파멸로 이르게 된다. 엄마의 권리를 되찾기 위해 물질적 탐욕을 드러낼 때 까지만 해도 이븐은 불행하진 않았다. 애비에게 끌려도 엄마 덕분에 흔들리지 않으려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새엄마인 애비와의 성적욕망을 실현한 순간, 단기적으로는 행복과 자유로움을 느끼지만 결국 모든 것을 잃는다. 그가 꿈꾼 엄마를 위한 농가를 잃고 가정은 풍비박산이 난다. 그녀와의 사랑을 실현은 했지만, 애비와의 사랑도 현실에서 이루지 못하고 둘은 갈라서기에 비극적이다.


작가는 기본적인 욕망을 인정하고 이것의 층위를 구분했다. 욕망을 단순히 부정적인 요소로 단정짓지 않고 이를 세분화하여 인물들에게 개성을 부여한 뒤, 이들이 갈등하는 과정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이 희곡은 지금 읽어도 공감이 가고 납득이 되는데, 최근에도 욕망을 극단적으로 추구하다가 파멸에 이르게 된 이야기를 자주 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약을 무절제하게 하다가 목숨을 잃고 혹은 사채업자에게 빚을 내면서까지 도박을 하다가 나락으로 떨어지는 이야기는 누구나 들어 봤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인간은 욕망을 추구하지 않을 수 없다. 오히려 ‘모든 것에 마음을 비워라’는 종교적인 격언은 비현실적인 것처럼 보인다. 작가는 이 점을 진작에 이해했기에 윤리적인 교훈에 따라 선과 악을 이분법적으로 나누지 않고 현실적인 인간의 모습을 다층적이고 복합적으로 표현했다. 인간은 달콤하고 강렬한 욕구에 흔들리나 이를 제어하기 위해 애쓴다. 이것들은 팽팽하게 대립하는 것 같지만 둘 사이의 경계는 종이 한 장 차이이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이런 진실을 이해하게 되면, 우리는 둘 중 무엇이 좋고 나쁜지를 쉽게 단정지을 수 없음을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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