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를 믿는 믿음, 자기확신
여러분은 비관적인 사람이 좋습니까? 아니면 낙관적인 사람이 좋습니까?
스스로는 어떤가요? 비관적인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아니면 낙관적인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비관적이기 보다 낙관적이길 바랄겁니다.
실제로도 매사에 비관적이고 불평 불만인 사람보다는 낙관적이고 쾌활한 사람이 인기 있죠.
하지만 행동하지 않고 말 뿐인 낙관, 현실을 보지 못하는 맹목적인 낙관은 피해야 합니다.
사실 2008년 금융위기의 큰 원인중 하나가 바로 이런 맹목적인 낙관주의 때문이었죠. 그냥 현실을 무시한 체 다 잘될거야, 라는 생각으로 모두가 돈을 펑펑 빌려썼습니다. 이런 식의 낙관은 비관만큼이나 해롭습니다.
말만 앞세운 낙관, 맹목적인 낙관은 별로 소용 없습니다. 이런 쓸모없는 나쁜 낙관이 아니라 좋은 낙관이 필요합니다. 그럼 좋은 낙관이란 뭘까요?
바로 행동하는 낙관, 현실적인 낙관입니다. 이걸 또 다른 말로 확신이라고 합니다.
확신은 허구의 희망에 휩싸이는 대신 상황의 본질을 똑바로 바라보는 시각을 말한다. 여의치 않은 상황에 놓였을 때 위축되는 대신 아주 작게나마 자신에게 남은 여지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태도다.
- 확신은 어떻게 삶을 움직이는가
확신을 가진 사람의 가장 큰 특징은 이너게임에 강하다는 점입니다.
이너게임은 외형적인 성공이나 다른 사람의 인정에 기대지 않는 태도입니다. 외부의 기준보다 자기 스스로 세운 내면의 목표, 내적인 성취를 중시하는 태도입니다. 스스로 얼마나 확신하고 행동하는지가 중요합니다.
진정으로 노력했다면, 본인은 그 사실을 알 것이다. 그렇다면 외부에서 봤을 때 성공하든 실패하든 상관없이, 그 사람은 저녁에 집에 돌아와서 ‘나는 오늘 이겼어’라고 말할 수 있다. 최선을 다했고, 그보다 더할 수는 없었으니까.
확신은 결과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결과는 내 통제 밖에 있음을 확신하는 태도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했음을 아는, 스스로에 대한 확신입니다.
이렇게 진심으로 이너게임에 집중하면 외부 환경이 아무리 혼란해도 마음의 평정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외적인 목표를 못이뤘다고 해도, 스스로는 이미 최선을 다했음을 알고 있기 때문에 내면의 만족을 얻을 수 있습니다.
확신은 위기상황에서도 도움이 됩니다. 특히 질병과 싸우는 상황에서 더욱 그렇습니다.
심장마비를 겪고 나서 막 재활 프로그램을 이수한 환자들을 대상으로 장래 계획이 있는지를 물었다. 그 결과, 금방 나을 것이란 확신이 강한 사람일수록 더욱더 건강해졌다. 조기 회복에 대한 확신이 있는 사람들은 운동을 하고, 기름진 음식과 스트레스 상황을 피하는 등 회복을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확신은 그저 심리적인 효과뿐 아니라 더 좋은 상황을 만들도록 행동하게 만드는 효과도 있습니다.
확신이 대책없는 낙관과 다른 점은 바로 행동으로 이어진다는 점입니다. 잘 될거라는 희망을 가지되 예상되는 어려움을 인식하고 실제로 극복하고자 행동합니다. 단순히 모든 것이 잘 될거야, 라는 기대에만 머물지 않죠. 확신은 희망을 잃지 않으면서도 현실적인 장애물을 고려하는 태도입니다. 난관을 극복할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는 용기입니다.
온라인 게시판에 로그인하거나 식탁 의자에 앉아서 길고 장황하게 이 세상의 불행과 불공평함에 대해서 논하는 것보다는, 그러고 있느라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한 가지라도, 아주 작고 사소한 것일지라도 실제로 행동하는 것이 훨씬 의미 있다는 얘기다. 그렇게 하면 이 세상이 아주 조금이나마 좋아질 뿐 아니라 그 사람의 기분도 한결 나아질 것이다.
확신하는 사람은 외부 환경의 불확실성을 기꺼이 받아들입니다. 확신은 현실적인 낙관주의죠. 그래서 현실에 산재해 있는 불확실성을 수용합니다.
확신은 확실성과는 다릅니다. 확실성만 쫓는 사람은 변화를 수용할 줄 모르죠.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있는 사람은 어떤 불확실성이 닥쳐와도 크게 힘겨워하지 않습니다. 무엇을 마주하든 잘 대처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죠.
요즘 같은 시대에는 익숙하고 확실한 것에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일은 무의미하다. 그보다는 변화를 받아들이고 불확실성 속에서 새로운 무언가가 나오리라고 믿는 편이 훨씬 유익하다.
특히 창의적인 직업을 갖고있는 사람들이라면 ‘불확실성에 대한 수용’은 필수적입니다. 사실 요즘에 창의성이 필요하지 않은 분야가 없죠. 그래서 누구나 불확실성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항상 해오던 것, 익숙하고 편안한 것에만 머물면 안됩니다.
가끔은 낯선 상황, 장소, 사람을 의도적으로 접하고, 항상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시각을 바꿔볼 필요가 있습니다. 불확실성 속에서도 스스로에 대한 확신은 더 커지는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확신하는 사람은 의미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어떤 일에 열중할 때 그 일이 의미있기 때문에 그렇게 합니다. 남들이 보기에 무모하거나 가능성 없어 보이는 일에 도전하기도 합니다.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다 해도 그 일 자체가 의미있기 때문에 기꺼이 도전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행복을 인생 최고의 가치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행복은 짧습니다.
행복에 겨운 상태는 누구나 알다시피 굉장히 짧다. 사랑에 빠진 행복, 새로운 직장을 얻은 기쁨, 놀이공원에서 느끼는 재미 등에는 유감스럽게도 단점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순식간에 지나가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의미를 쫓는 경험은 지속적입니다. 극적인 즐거움과는 거리가 멀지만 훨씬 깊은 만족감을 얻을 수 있습니다. 긍정적인 감정만 포함하는 행복보다 훨씬 포괄적입니다. 의미를 지향하면 부정적인 감정, 고통스러운 과정까지도 의미있는 경험으로 바꿀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의미를 쫓는 사람은 자신에게만 집중하기 보다는 더 큰 맥락에 연결되고자 합니다. 다음 세대 혹은 인류, 아니면 무엇이든 더 큰 전체에 기여하려는 노력이 동반됩니다. 자아의 울타리를 벗어나 타인과 세상을 어떤 방식으로든 돕고자 합니다. ‘자아 지향’에서 ‘의미 지향’으로 전환하게 되는 것이죠.
타인을 도우려고 준비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더 큰 전체와 연결된 기분을 느낀다. 우리의 존재와 우리가 지향하는 인생이 우리가 속한 전체와 무관하지 않다는 느낌은 기꺼이 그 책임을 감당하도록 만든다.
이렇게 의미를 쫓는 삶은 극적인 행복감은 덜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더 지속적이고 충만한 행복을 맛볼 수 있습니다.
요약해 봅니다.
확신은 대책없고 말뿐인 맹목적인 낙관과는 다릅니다. 현실을 직시하고, 행동하는 낙관입니다.
확신은 이너게임입니다.
확신을 가진 사람은 외부가 아닌 내면의 목표에 따라 움직입니다.
확신은 행동입니다.
현실적인 어려움을 고려하고, 이를 돌파할 계획을 세우고 행동합니다.
확신은 불확실성을 수용합니다.
스스로 확신하는 사람은 익숙함, 편안함에만 안주하지 않고, 낯설고 새로운 것을 적극적으로 접하고 받아들입니다.
확신은 의미를 중시합니다.
자아의 울타리를 벗어나 타인과 세상에 도움되는 방식으로, 의미를 쫓는 삶, 의미 지향의 삶을 삽니다.
대책없이 말뿐인 맹목적인 낙관의 네모에 갇혀 있지 않습니까?
현실을 직시하고 행동하는 낙관, 확신으로 그 네모를 깨세요!
#울리히 슈나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