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에게 돈을 벌고 자기만의 방을 가지라고 권하는 것은, 리얼리티와 직면해서 살라는 뜻입니다. 여러분이 그것을 전할 수 있든 없든, 활기찬 삶이 나타날 겁니다. - 자기만의 방, 버지니아 울프, 문예출판사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내가 처음 내 방을 가지게 된 것은 중학생 때였다.
초등학교 2학년 전까진 온 가족이 단칸방에서 같이 지냈고, 2학년부터 졸업 때까진 여동생과 한 방을 썼다. 작은 방이었지만 그 방에서 노래도 부르고 피아노도 치고, 문을 닫으면 나 혼자만의 시공간이 생기는 느낌이어서 좋았던 기억이 있다.
올해로 결혼 14년차, 우리집에는 내 방이 없다. 안방이라는 이름이 있지만 밤에는 동거인의 코골이에 당해야 하고, 자기 전엔 아이들이 자꾸 놀이공간으로 점유한다.
그림은 모두 잠든 후에 거실의 식탁에서 그리기 시작했다. 내일 아침이 오기 전에 깨끗이 흔적을 없애야 하므로, 급하게 그리거나 새벽까지 그리고 잠들기도 했다. 그리고 출근해야 하니, 그 여정도 점점 간소해져서 최근엔 디지털 드로잉이나 펜 드로잉 쪽으로 기운 추세였다.
누군가는 혼자인게 외롭다고 하지만은, 나는 꼭 나만의 공간이 필요한 사람이다. 지금은 지나치게 사회화가 잘 되어 사람들과 어울릴 때 어색해보이지 않지만, 놀랍게도 나는 꽤 내향인이어서 많은 이들과 부대낀 날엔 반드시 나만의 시공간이 꼭 필요하다. 혼자 숨 쉴 틈. 그 틈이 결혼 후엔 주어지지 않아서 점점 숨막히던 나날이었다.
9월을 마무리하기 3일전 아침, 갑자기 남편이 조그만 휴대폰 화면을 내 앞에 들이밀었다. “여기, 작업실로 좋을 거 같은데 어때?” 평소 손해 보기 싫어하는 남편이 이런 제안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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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0줄에 그림을 다시 그리기 시작하면서, 늘 작업실 로망이 있었기에 방 네 개짜리 아파트로의 이사를 염원해왔지만 현실은 빌라살이. 그것도 지독히도 안 팔리는 곳...
올해도 이사는 글렀다 싶어서 나만의 작업공간(집 어디 한 켠이라도)은 언감생심이었는데, 갑자기 다른 곳에 내 작업실이라니...
몇 년간 주변 시세를 꾸준히 체크해왔던 터라, 남편이 보여줬던 원룸은 4층 건물에 3층이고 볕도 잘 드는 위치에 월세도 반지하 정도로 저렴해서 솔깃했다. 우리집에서도 도보 7분 거리.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9월 30일, 건강검진 후 수면내시경 마취?가 완전히 깨지 않은 상태로 남편 손에 이끌려, 공간을 보러 갔다왔다. 10월 1일, 계약금을 치르고 계약서에 날인했다. 10월 10일, 오늘! 잔금을 치르고 드디어 입주!
타임라인은 간결하지만, 그 사이 정말 수도 없이 마음이 오르락 내리락했다.
‘우리 형편에 무슨 작업실이야’ ‘로망은 로망일 때 아름다운 거지, 현실 생각 안 하니’ ‘작품이 맨날 팔리는 것도 아닌데, 이게 맞나?’
점점 두려워진 나머지, 남편한테 완전 솔직하게 물어봤다.
“기분 나쁘게 들릴 수도 있는데, 정말 궁금해서 물어볼게. 혹시 나 최근에 작품 하나 팔았다고, 가능성 보여서 작업실 계약하는데 도움 준거야?”
그날 밤, 남편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해준 말은 정말 감사해서 잊지 못할 거 같다. “연애 할 때도, 결혼해서 10년 동안도 몰랐는데, 당신 그림 정말 잘 그리는 것 같아. 난 미술에 조예는 없지만 옆에서 보면, 그리는 소재에 제한도 없고 시야가 편협하지 않아서 시도도 다양하고 멋져. 정말 재능 있는 사람이야. 당장 이사는 어려울 것 같고, 가더라도 방 네 개는 어려우니, 이렇게라도 한번 시작해봐, 일단 2년 동안 꿍을 펼쳐봐, 다음 생각은 2년 후에 하자. 잘해봐!”
오늘 작지만 내 나름 큰 이사를 마치고, 혼자 그 공간을 쓸고 닦으며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이게 정말 나만의 공간이구나, 살지는 않지만 무언가를 창조할 수 있는 공간! 이게 현실이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