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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현 Dec 22. 2023

비키니를 입은 여인

여인의 수영 솜씨는 선수급이다

 여기, 관능적인 한 여인이 있다. 비키니를 입고 해변에 비스듬히 누워서 환한 미소를 띤 여인. 사진의 연도는 나의 언니가 태어나기 딱 10개월 전인 1984년 8월로 찍혀있다. 사진의 장소는 경포대 해수욕장이다.


 사진 속에서 햇살은 넘실거리는 청록빛 바다를 비추고 있다. 동시에 여인의 건강미 넘치는 몸도 비추고 있다. 햇살의 온도는 딱 여인이 비키니만 입고 있게 할 만큼 다습다. 해초와 소금물이 뒤섞인 내음이 따듯한 바람을 타고 여인의 코로 들어온다. 여인과 비스듬히 한 면을 닿아 있는 모래의 감촉은 거슬린다기보단 오히려 기분을 좋게 만든다. 파도가 와해되면서 만들어내는 소리는 잡생각마저 와해시키는 신비한 능력을 지니고 있어 여인의 마음을 평화롭게 한다.


 이다음 사진에서 여인은 똑같은 비키니를 입고 한층 더 밝아진 표정으로 복이와 함께 있다. 아마도 때는 연애 시절 해변에서 복이와 행복한 휴가를 즐기고 있는 것이겠지. 이 당시의 생김새로만 봐서는 복이에 비해 여인이 조금 아까운 느낌이다.


 이 둘은 젖은 모래 위에 자신들의 이름을 적는다. 모래 알알의 촉감이 손끝으로 전해지며 온몸에 퍼진다. 이내 파도가 참을 수 없다는 듯 그들의 이름을 지워낸다. 바다도 질투하는 그들의 사랑은 그 여름의 태양만큼이나 뜨겁다.


 평온한 해변의 일부인 것처럼 소탈한 외모를 지닌 복이와 달리 여인은 작위적이게 화려하다. 나는 이 여인을 잘 알고 있지만, 여인의 이런 화려한 모습을 아직까지도 본 적이 없다. 사진 속의 여인은 엉덩이와 가슴이 아주 풍만하고, 육감적인 바디라인에 잘 어울리게 머리숱까지 풍성하다. 내가 아는 여인이지만, 내가 모르는 생소한 여인의 모습.


 내가 태어나기 전의 엄마란,

 누구보다 빛나는 여자였구나.


 그로부터 사십여 년이 지난 지금, 여인은 더 이상 비키니를 입지 않는다. 대신에 원피스로 된 수영복을 입는다. 머리숱은 여전히 풍성하지만, 간간이 새하얀 빛을 내는 머리카락이 섞여 있다. 그리고 그때만큼이나, 어쩌면 그때보다도 더 물을 좋아한다.


 요즘 여인의 낙은 수영이다. 여인은 일주일 중에 육일을 물속에 들어간다. 여인이 병상에 누워있거나 상중에 있는 것이 아니라면, 비가 오건, 눈이 오건, 날이 춥건, 날이 덥건, 날씨 따위는 가볍게 무시하고 수영장에 간다. 여인이 수영을 한 지도 어느덧 14년째다. 사진 속 그 시절에는 여인이 물에 빠지면 틀림없이 복이가 제 몸을 던져 구해줬을 텐데, 이제는 물에 빠져도 혼자서 당차게 헤엄쳐 나올 만큼의 수영 실력이 생겼다.


 자유롭게 수영하는 여인을 보고 있자면, 보는 사람도 덩달아 자유감을 느낄 수 있다. 여인에게 있어서 삶 속의 자유를 찾는 것은 매우 중요한 과제로 보인다. 여인의 인생은 태어나자마자 불안정 그 자체였으니까.


 여인의 기원으로 돌아가 보면, 여인의 어머니는 집에서 본처가 아니었다. 그러다보니 여인의 집에서는 대를 이을 아들을 절실히 필요로 했다. 그때는 아들이 있는 것만으로도 권력이 될 수 있는 시대였다. 여인은 4남매 중 둘째였다. 여인의 위로는 성격이 드센 언니가 한 명있고, 밑으로는 말괄량이 여동생과 집안의 사랑을 독차지 하는 막내 남동생이 있었다. 그 사이에 낀 여인의 포지션은 애매하기 짝이 없었다. 여인은 유년 시절을 무관심 속에서 자랐으며, 여인의 어머니는 여인이 초등학생의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가정부 일을 시켰다.


 여인이 어머니로부터 온전히 사랑을 받았던 것은 제 어머니의 태중에서 태어날 아이가 아들일지 딸일지 그 성별을 알지 못하고, 아들일 거라는 막연한 희망을 품고 있었을 때가 유일할 것이다. 그때만큼은 여인도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모태의 양수를 마음껏 헤엄쳤으리라. 어쩌면 여인은 그때의 어머니의 바다를 그리워하는 지도. 그래서 이렇게나 수영을 좋아하는 건지도 모른다.


 수십년이 지난 지금의 여인에게도 여전히 어릴 적 불안정한 가정의 잔재가 남아있다. 여인은 많은 순간을 초조해하고, 매사에 서두른다. 여인의 자유로운 모습은 물 속에 들어가서나 볼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여인이 수영하는 것을 좋아한다. 여인의 자유로운 모습이 좋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인의 수영이 항상 좋아보이는 것은 아니다. 여인이 추구하는 즐거움이 때로는 누군가에게 민폐가 되기도 한다. 여인은 물놀이를 모른다. 복이와 함께 따스한 해변에서 물놀이하던 시절은 전생의 기억처럼 모두 잊어버린 듯 하다. 여인은 물 속에서 유영하는 법이 없고, 스포츠로써의 수영을 즐긴다. 그러다보니 여인은 휴양을 하러 오는 고객이 대부분인 리조트 수영장에서 수영 선수처럼 첨벙첨벙 수영을 한다. 덕분에 수영장 안에 있던 커플들이 모조리 떠난다. 또 스노쿨링 스팟인 에메랄드빛 바다에서는 자신만의 열렬한 레이스를 펼친다. 물고기들은 여인을 피해 부단히 도망친다.


 여인이 짧은 키에 짧은 팔다리로 야무지게 헤엄치며 사람들과 물고기들을 내쫓을 때, 여인의 가족들은 주로 여인을 알지 못하는 사람인 척 고개 돌리고 있는다.


 여인은 그 시절 사진 속과 달리 이제 더이상 비키니를 입지 않지만, 대신 원피스 수영복을 입고 힘차게 수영하는 모습이 어쩐지 더 행복해보인다. 그래도 그것은 찐 행복이어서, 나도 모르게 마음 속으로 조금 응원하게 된다.


 물고기들이 부디 그녀를 잘 피해가기를.



사진: UnsplashMuhammadh Saam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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